[세계사 숨은 이야기] 독일인들, “처칠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
글 정우량 월간중앙 기자 (Chuwr@joongang.co.kr)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독일 민간인들의 시신이 뒤엉켜 쌓여 있다.
2차대전 말기 “독일에 폭탄 한 개라도 더 투하하라” 지시
獨 프리드리히, 연합군의 무자비한 민간인 폭격 폭로
윈스턴 처칠은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에 대해 대부분 영국인들은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다. 2002년 11월 영국 BBC 방송이 실시한 ‘영국 역사의 대표 인물 100인’을 선정하는 여론조사에서 처칠은 44만7,423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19세기 과학자 아이삼바드 킹덤 브루넬보다 5만6,000표 이상 앞선 압도적 우위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처칠 숭배자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처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처칠이 아돌프 히틀러와 싸웠던 것처럼 자신도 사담 후세인과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영국인들이 발끈했다. 부시가 어찌 감히 자신을 처칠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부시는 히틀러와 비교돼야 할 인물이라고까지 꼬집었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이처럼 존경 받는 인물이지만 독일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보는 처칠은 전쟁광(狂)일 뿐이다. ‘20세기 최악의 범죄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독일인들이 처칠을 혹평하는 이유는 그가 독일에 대해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범죄’ 때문이다. 처칠의 범죄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에 가한 야만적 폭격을 가리킨다. 당시 연합군은 독일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돼 페허로 변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영국 폭격기들은 전쟁 초기 독일이 영국을 폭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도시들까지 무차별 폭격을 가함으로써 소중한 문화재들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동안 독일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두 번씩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전체를 파괴하고, 유대인 학살을 비롯해 수많은 인명을 대량살상하는 등 독일이 유럽 문명에 대해 저지른 엄청난 죄를 두고 두고 반성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반세기 이상 지났고, 21세기가 열린 마당에 역사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독일인들은 판단한 것 같다. 독일 사회의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2002년 말 출간된 ‘불’(Der Brand)이라는 책이다. 역사학자 외르크 프리드리히가 쓴 이 책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550만권이 팔렸으며, 현재도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 있다.
지난해 10월 프리드리히는 ‘불의 현장들’(Die Brandsttten)이라는 책을 새로 출간했다. 연합군의 무자비한 독일 폭격을 폭로한 미공개 사진들을 대거 수록한 이 책은 앞서 출간된 ‘불’보다 더 충격적이다. 떼죽음당한 민간인들의 시신들이 엉켜 있는 장면, 소이탄을 맞아 까맣게 숯덩이로 변한 부녀자·어린이·젖먹이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사진들이 포함돼 있다.
프리드리히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독일인이 60만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7만6,000명은 어린이들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종전을 불과 수개월을 앞두고 가해진 폭격은 군사적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1945년 1월부터 5월까지 “독일 영토에 한 개라도 더 많은 폭탄을 투하하라”고 지시한 처칠의 행동은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주장한다.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의 에센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연합군 폭격기들의 폭격으로 공포에 떨며 지새우던 밤을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중세 때부터 존재해온 160여 독일 도시들을 무참히 파괴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수없이 살상한 데 대해 영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책임져야 하며, 당시 총리였던 처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프리드리히는 주장한다.
1940년 5월10일 총리직에 취임한 처칠은 바로 다음날 독일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렸다. 처칠은 영국이 독일에 비해 폭격전에서 우위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영국의 랭카스터 폭격기에 비해 성능이 크게 떨어지는 독일의 하인켈 폭격기는 폭탄을 많이 실을 수 없었다. 처칠은 영국이 독일을 폭격하면 독일의 V 로켓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잘 알면서도 폭격을 단행했다.
처음에 폭격은 ‘군사목표’로 한정됐다. 그러나 군사목표에 ‘산업목표’가 추가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산업목표에는 산업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 주변 지역에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처칠은 “군사목표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은 전쟁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로써 영국 폭격기가 군사목표만 공격한다는 허구는 깨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군 폭격사령부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지역 폭격’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 폭격이란 군사목표가 위치한 전체 지역을 파괴하는 것이다. 영국 폭격기들은 먼저 소이탄으로 폭격해 화재를 일으킨 뒤 불을 끄지 못하도록 고성능 폭탄으로 다시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1940년 폭탄 5,000t을 투하했으며, 다음해에는 그 다섯 배인 2만t을 투하했다.
1942년 폭격사령부는 도시의 주거 지역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폭격기 한 대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4,000∼8,000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가옥을 파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독일 사람들은 친지가 죽는 것보다 사는 집이 파괴당하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한다. 가옥을 파괴함으로써 독일인들의 정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영국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폭격의 총책임자는 공군 원수 아더 ‘폭격기’ 해리스였다. 해리스는 폭격에 미친 사람이었다. 폭격을 제외하고는 어떤 취미도 없었다.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1920년대 이라크에서 비행중대장으로 근무할 때 해리스는 “폭격에 열중하며, 폭탄 투하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당시 해리스는 더 큰 폭탄, 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수송기를 폭격기로 개조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42년 3월28일 해리스는 독일 도시의 주거 지역에 대한 폭격을 명령했다. 뤼베크에 소이탄으로 야간 공습을 감행해 1만5,000명이 집을 잃었다. 4월18일 로슈토크를 공격한 데 이어 5월30일 쾰른에 한꺼번에 폭격기 1,000대를 보내 4만5,000명이 사는 가옥을 파괴했다. 1942년 한햇동안 3만7,000t의 폭탄이 주거 지역에 집중 투하됐다. 비단 가옥뿐만 아니라 병원·양로원·고아원 등 사회복지 시설들도 파괴했다.
영국 폭겨기들은 소이탄으로 폭격해 화재를 일으킨 뒤 불을 끄지 못하도록 고성능 폭탄으로 다시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1940년 폭탄 5,000t을 투하했으며, 다음해에는 그 다섯 배인 2만t을 투하했다.
1943년 영국은 폭격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참혹했던 것은 7월27일 밤 함부르크 공습이었다. 하룻밤 폭격에 4만5,000∼5만명이 사망했다. 그 중 대다수는 노인·부녀자·어린이들이었다. 영국 폭격기들은 기체에 알루미늄 은박지를 두름으로써 독일군 레이더를 피했다. 선도기가 조명탄을 떨어뜨리면 뒤를 이어 1,200t의 소이탄이 조명탄이 떨어진 지역에 집중 투하됐다.
폭탄이 투하되면 수많은 불꽃이 만들어져 중심부의 산소를 소모하고, 공기를 빨아들여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었다. 날씨가 덥고 습도가 낮아 가옥들은 불에 잘 탔다. 한 영국군 조종사는 마치 분출하는 활화산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아파트 지하 방공호에 숨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질식사했다. 시체들은 출구 부근에 쌓여 있거나 방공호 바닥에 흐른 기름 덩어리 속에 엉겨붙어 있었다. 방공호를 떠난 사람들도 거리에서 불타 죽었다.
‘독일 도시들과 주민의 절멸’이 폭격의 목적이라고 믿은 해리스는 함부르크 폭격의 성과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달랐다. 폭격사령부에서 작전분석관으로 일했던 핵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했다. 다이슨은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감옥에 갔거나 교수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고 자책했다.
해리스는 영국이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43년 12월7일 폭격 목표로 정한 38개 독일 도시들 가운데 4분의 1을 파괴했으며, 이듬해 첫 4개월 동안 4분의1을 더 파괴해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을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종전 후 발간된 회고록에서 해리스는 폭격을 더욱 강화했더라면 독일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치 정권을 타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독일에 불리해졌다. 양쪽 모두 종전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폭격 또한 한층 강도를 더했다. 해리스는 연합군 총사령부로부터 독일의 석유공업 기지를 공격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러나 해리스는 이를 교묘히 어기면서 도시들을 계속 불태워 나갔다. 드레스덴이 가장 대표적 희생물이었다.
폭격당해 앙상한 뼈대만 남은 드레스덴의 건물들.
‘독일의 피렌체’ 드레스덴은 수많은 예술품과 건축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도시였다. 1945년 2월 드레스덴은 피난민들로 넘쳤다. 연합군이 예술도시 드레스덴만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판단은 큰 잘못이었다. 2월13∼14일 영국과 미국 폭격기 800대가 드레스덴을 집중 공격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됐으며, 최대 13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드레스덴의 사망자 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전쟁포로로 붙잡혀 드레스덴 공습 후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했던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당시 경험을 토대로 소설 ‘제5 도살장’을 썼다.
보네거트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구절을 인용해 수많은 시체들이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반(半)액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원 확인은 물론 엉겨붙은 시체들을 떼어 놓을 수조차 없었다고 묘사했다.
드레스덴 폭격은 영국 내에서도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 리처드 스토크스는 “드레스덴에서 수만 명 주민들의 시체가 지금 불타고 있다. 이 같은 테러는 어떤 상황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다”며 정부를 공격했다. 처칠은 지역 폭격을 ‘재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처칠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독일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종전 후 영국군이 독일에 주둔할 때 필요한 편의시설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참모본부의 건의 때문이었다.
연합군 폭격기들은 독일에 무려 140만t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0∼45년 총 140만회 출격을 기록했으며, 44년의 경우 월평균 2.5개의 도시들을 폭격했다. 독일은 인구 10만명 이상 161개 도시에서 가옥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으며, 민간인 40만∼57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된다.
독일뿐 아니라 영국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보복에 나선 독일의 V 로켓과 폭격기의 공격으로 민간인 6만여 명이 사망했다. 이와 함께 독일을 폭격하기 위해 폭격기에 탑승했던 많은 승무원들도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사한 영국군 폭격기 승무원은 무려 4만6,250명에 달한다.
역사상 최초의 폭격은 1911년 11월1일 북아프리카 리비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의 지울리오 카보티 중위가 단엽 비행기를 타고 트리폴리 상공을 날면서 아랍 저항부대를 향해 네덜란드제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그로부터 지난해 이라크전쟁까지 폭격은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했던 것은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일 것이다.
폭격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다. 최첨단 정밀 폭격을 했다는 이라크전쟁에서도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영국의 의료 구호단체인 메닥트의 지난해 11월 보고에 따르면 미군 폭격으로 2만2,000∼5만5,000명이 사망했다. 이라크 전쟁은 끝났다고 하지만 계속되는 게릴라 전투로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고, 불발탄과 지뢰로 인한 사상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시작한 나라는 독일이다.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에 대한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이 그것이다. 스페인 출신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를 자신의 명작 ‘게르니카’로 남겼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무차별 폭격의 처참함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폭격의 역사’를 쓴 스웨덴 작가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한 개별 국가의 창안이 아니라 서구 산업사회 전체의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폭격은 서구인들로서는 한사코 부인하고 싶은 인종주의와 대량학살이라는 ‘서구의 지적 전통이 낳은 죄악’임을 린드크비스트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호수 2004년 01월호 | 입력날짜 200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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