牟田口 廉也 (むたぐち れんや)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구 일본군 장성.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팀킬의 귀재, 인간 과부제조기. 그의 만행을 아는 한국 사람들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조롱을 섞어서 부른다. 아니, 이 자의 만행 덕에 독립이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 일본 우익들조차 그를 전쟁과 패망을 이끈 "삼간사우(三奸四愚)"의 일원으로 볼 정도이다. 성부터가 無駄口(헛소리, 쓸데없는 말)와 동음이의어. 일본 검색엔진에 牟田口廉也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바로 '무능'이라는 자동 검색이 뜬다. 이 사람을 보면 정말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더 무섭다'라는 말이 확 와닿는다(…). 그런데 이 인간의 행위를 보면 단순히 무능한 것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 병맛스러운 행동 때문에 앞서 언급했다시피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려 하는 일본 극우세력들도 이 놈만은 전혀 손대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일본 극우세력이 아무리 정신나갔다 해도 수만명을, 그것도 제대로 된 전투로 인해 전사한 것도 아닌 팀킬해버려서 연합군 승전에 도움을 준, 게다가 지 잘못은 인정안하고 뻔뻔하게 잘 살다 죽은 놈을 미화할리가 없지.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인간. 그것도 월권행위였다. 밤중에 휘하 병사 하나가 똥 싸느라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안 맞자 중국군에 협조를 요청해 병사를 찾던 도중 독단으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 허가명령을 내려서, 나중에 이걸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때 그는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없는 일개 부대장.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정작 그는 노구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도 않았으면서 직후의 작전회의에는 다치지도 않은 팔에 붕대를 감고 등장하여서 부상당한 척 하였다. [1] 뭐 사실 중일전쟁 자체를 결정한 건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삼은 상층부이기 때문에 관련이 없지는 않다 수준이었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일화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 유명한 희대의 팀킬, 임팔 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수만 단위로 팀킬시켜버린 일본 패망과 조선 독립의 일등공신(?) 중 하나.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이 결정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요직에 남았으며, 심지어 전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무튼 수 없이 정신나간 짓거리를 저질렀는데,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15일 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해놓고는 실제로 작전 기간이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악화되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정권 유지를 위해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남아 있다. (…) 웃긴 것은 작전 최종 인가를 한 곳이 자기집 목욕탕.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 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든 상태였지만, 그 이후로도 보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6]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함에도, 부하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도 진격하라고 계속 독촉하고선 실제로 자신은 초조해했다. 실제로 작전실패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상황을 파악하러 온 대본영의 장군 앞에서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고,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못 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결국 전투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부하들의 몰골을 보다 못 한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려 일본군 육군 항명 사건 1호다!).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다구치를 만나러 오자,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며, 그는 무다구치를 이 칼로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갖고 가버리기도 했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는 그가 무다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런 류의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다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는데, 오히려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을 정도로 열이 뻗혀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후에 사토 중장은 일본에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소환되어 입을 막기 위해 연금된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다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만 봐도 구 일본군이라는게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집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일본군은 미국-한국군의 준장과 같은 개념이 없었고, 소장-중장-대장 식으로 올라간다). 이정도 되는 자가 이래서야 구 일본군이 미군쯤의 병력이 있어도 전쟁이 쉽지 않았을것 같다(…). 전후 일본군의 여러 장성들이 전범 재판을 통해 사형 등에 처해졌으나, 이 인간은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에 다대한 피해를 끼치는 등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불기소 처분 되어서 그대로 석방되었다. 이상하게 검색을 해보면 중국 사이트들이 많이 걸린다. 임팔 작전 관련 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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