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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아트

천명관-고래

by 501™ 2013. 5. 9.




천명관, 1964년생, 그전까지 시나리오 집필하다가 2003년 단편 「프랭크와 나」로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고래,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책표지와 책날개에서 읽을 수 있는 간략한 정보들이다. 그러니까 그는 만의 나이로 39세에 첫 단편소설을 쓰고 등단해서, 일 년 뒤 40세에 첫 장편이자 두 번째 소설로 국내 굴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소설을 쓰기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기에? 얼마나 깊은 글이기에? 기존 소설 전문가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 그 강렬한 흡인력은 무엇보다 능란하고 능청맞기 그지없는 스토리텔링의 힘, 그리고 가히 거창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서사구조를 빈틈없이 촘촘하고 정교하게 다듬어내는 구성력의 완성도에서 비롯된다. 만약 기발한 발상과 능란한 화법에만 의지할 뿐 각각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탄탄하게 엮어내는 구성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 소설은 기이하고 기발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그저 한판 허황한 ‘이야기놀음’으로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 고래, 천명관, 423쪽, 심사평(임철우, 소설가), 문학동네, 2004. 12. 

♣ 누구든 이 작가의 입심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성찬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 역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말이 아닌 글의 영역이다. 의도적으로 글을 배제하는 실험소설이라거나 혹 ‘글이여, 껍데기는 가라’ 식의 주장을 하기 위해 말을 전위로 내세운다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면서 소설 장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미적, 예술적 긴장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 고래, 천명관, 427쪽, 심사평(은희경, 소설가), 문학동네, 2004. 12. 

♣ 『고래』는 가히 소설이 무엇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응모작에 따르면 소설이란 무엇보다도 내레이션이다. 소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라는 것이다. 천명관 씨는 이를 위해 이제는 하나의 관습화된 장치로 사라진 옛날이야기의 화자를 끌어왔다. 전지전능하고 고압적이며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꾼의 입담에 힘입어 소설은 엄격한 형식의 규제를 뚫고 민담과 전설, 기담들, 무협지와 장르 영화의 부스러기들, 동화와 환상적 요소 등이 뒤섞이는 환상의 도가니로 돌변한다. 
: 고래, 천명관, 428쪽, 심사평(신수정, 문학평론가), 문학동네, 2004. 12. 

강렬한 흡인력, 스토리텔링의 힘, 작가의 입심, 이야기꾼의 입담... 도저히 주제를 생각해볼만한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쉼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들.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에선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미묘한 연관성을 내비치며 끊임없이 진행된다. 

그런데 알맹이는 없다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단지 어떻게 말하느냐라고? 그러니까 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이 소설은 쓰여 졌을 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소설 속 ‘구라장이’인 ‘약장수’를 통해 언뜻 자신의 음험한 속마음을 내비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한편, 약장수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카페를 자주 찾아가 그 지역의 예술가들과 직접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기실 언변이 뛰어나긴 했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배타적이고 콧대 높은 예술가들과 어울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험악한 장바닥을 떠돌며 눈치껏 살아온 덕분에 약장수는 그들과 어울리는 요령을 한 가지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하는 거였다. 그것은 무지를 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식과 예민한 예술적 안목 그리고 높은 인격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으며,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 연출과 적당히 예의 바른 미소,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짧고 인상적인 멘트 하나면, 물론 그것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익히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약장수는 특유의 언어감각과 뛰어난 모방능력으로 곧 그들과 무리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그런 식의 짧은 말 한마디면 사람들은 대개 그의 통찰력에 놀라며 의심없이 그를 자신들과 같은 부족으로 인정해주었다. 혹 누군가가 그의 언급에 대해 좀더 깊이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그는 신중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물러서곤 했다. (...) 

 

   그 정도면 언제나 충분했다. 그가 한마디 던져놓으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떠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는 적당히 미소를 머금고 앉아 듣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토론의 법칙이었다. 지식인이란 부류는 대개 음험한 속셈을 감추고 있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언제나 수박 겉핥기 식일 수밖에 없었으며 약장수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고래, 342~343쪽, 천명관, 문학동네, 2004. 12. 


그렇다. 제대로 된 소설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지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말은 가능한 적게 한 채, 어딘가에서 듣거나 읽거나 본 이야기들을 한 아름 툭 던져 놓음으로써, 기존 문학계를, 영화계를 그래서 기존 소설들과 문학상마저도 마음껏 비아냥거렸을지 모를 천명관, 그는 마지막 페이지 수상소감에서 또 다른 암상을 준비하고 있다. 

 

 

“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게 감사한다. 그분들은 나의 생각을 너그럽게 용인해주었다. (...)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 

 


도저히 주제를 생각해볼만한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쉼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들... 
그러나 이러면 어떨까라는 의미가 내포된 기존의 소설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이야기들... 

그래서 나는 이야기꾼, 천명관의 다시 계속될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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