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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예능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제작비화

by 501™ 2013. 8. 1.
지금은 없어진 필름 2.0에서 당시에 다뤘던 기사입니다. 없어진 언론사의 기사라 전문을 올립니다.
시간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격동 5년, 누가 성냥팔이 소녀를 모함했나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파란만장 제작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1998년 모 영화 월간지 1월호 141쪽을 통해 잉태됐다. <나쁜 영화> 때문에 참 피곤한 97년을 보낸 장선우는 심드렁하게 잡지를 넘겼을 것이다. 하고 많은 쪽 중에 왜 하필 141쪽에서 책장이 더이상 넘어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장선우의 침 묻은 손가락이 그 쪽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지하창작집단 파적'의 멤버 김정구가 쓴 시 한 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 그대로 장선우의 더벅머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네버엔딩 대하 프로젝트. 그 격동 5년의 파란만장한 시작은 그랬다. 

제1화 : 사라진 장선우 

2001년 5월 24일 부산 서면 네오스포 아파트 10층. <성소재림> 촬영부 A팀 숙소.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앉았다.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사람은 모두 7명. 다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방바닥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스탭 MT에서 윤수일의 '황홀한 고백'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예용성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바로 옆에 앉은 정성욱의 손에 A4 용지 한 장이 들려 있다. 촬영장에서 늘 해맑게 웃는 청년이지만 여느 때와 달리 표정이 굳어있다. 오전 10시 30분. 이윽고 또박또박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 그들의 요구에는 더이상 맞추기 어렵습니다. 매우 유능하고 존경스러운 새 액션 감독팀 지휘 아래 즐거운 촬영이 앞으로 기대되었었는데... 매우 안타깝습니다. 성소재림은...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여러분들 일일이 찾아보고 정을 나누어야 하나 민망하여 그냥 먼저 갑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저에겐 우리 성소 식구들의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모습만 남을 것입니다. 나중에 만나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편히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녕히... 2001. 5. 23. 2301호에서 장선우."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정성욱은 편지를 내려놓고 담배부터 찾았다.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미쳐버리겠구만." 누군가 낮게 뇌까렸다. 그날 촬영팀이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장선우의 잠적.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일 거라 짐작한 적이야 있었지만 실제로 그러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장선우는 <성소재림>이 도대체 어떤 영화가 될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누가 영화에 대해 물으면 투자자도 스탭들도 배우들도 한결같이 "장선우 감독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고 말해왔다. 나중에 가서야 장선우 머릿속에도 다 들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투자자를 경악시켰지만 적어도 당시는 다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잠적하다니. 무정한 애인의 이별 통보도 이렇게 전격적이진 않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아파트 23층에 혼자 방을 얻어줄 게 아니라 스탭들 숙소와 같은 층에 배정해 돌아가며 감시라도 할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때까지 물경 50억 원을 쏟아부은 프로젝트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실로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지난 넉 달간 장선우만 믿고 힘든 객지 생활을 버텨온 120명 스탭들이 제일 충격받았다. 그중에는 넉 달이 아니라 98년부터 4년째 이 프로젝트에 매달린 스탭들도 있다. <나쁜 영화>의 6mm디지털 카메라 기사로 처음 인연을 맺고 <거짓말>에 이어 또 한번 장선우와 호흡을 맞추는 김우형 촬영감독이 그중 하나다. 그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회고한다. 

"되게 당황했어요. 전혀 눈치를 안 줬거든요. 그게 서운했죠. 편지를 딱 봤을 땐,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뭘 해야 하나. 그런 생각만 들더라고요. 결국 고향(전남 광주)으로 갔죠. 다 끝났나보다 싶었거든요." 

속절없이 3일이 흘렀다. 전화가 걸려왔다. 제작부였다.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심 감독이길 기대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장선우가 잠적한 지 꼬박 1주일 만에 김우형은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5월 31일 부산 좌천동 골목길에서 진행한 53회차 촬영. 돌아온 장선우가 레디 액션을 외친 첫 장면이었다. '주'가 방장 '추풍낙엽'의 도움으로 친위대의 추격을 피하는 신 넘버 59번을 촬영하는 그날 밤, 장선우 감독은 끝내 스탭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제2화 : 황우현의 때늦은 후회 

김우형이 턱을 괴고 정성욱이 담배를 피워 물던 그 시각. 튜브엔터테인먼트(이하 튜브)의 황우현 이사도 사무실로 전송된 팩스 한 장을 읽고 있었다. 제작부가 보낸 장선우의 편지였다. "그들의 요구에는 더이상 맞추기 어렵습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면 과장이겠지만 초탈하게 세상을 낙관하며 염화미소를 지었다 해도 거짓말이다. 황당했다. 속된 말로 '벙쪘다'. 

"한방 먹은 거죠. 연락을 해도 연락도 안 되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황우현에게 한방 먹이기 전에 장선우는 몇 차례 잽을 날렸다. 잠적 50일 전. 장선우가 부산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에서 열린 제작 발표회에 앞서 본지와 한 인터뷰가 그중 하나다. 당시 그는 'TALK2.0' 마지막에 으레 던지는 행복하냐는 질문에 조금 이상한 대답을 했다. 

"음... 근데 사실 지금은 안 행복해. 행복을 만들려고 하는 건데, 과정 자체는 행복하질 않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다구." 

허창경 프로듀서(이하 PD)는 "그 즈음 제작진과 투자사 사이에 일반 관객들이 잘 모르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주 슬픈 일'이란 여기서 말하는 '우여곡절'과 동의어로 봐도 무방하다. 당시 성소 제작팀과 투자사 튜브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고 모를 만한 사람도 들어서 알 정도였다. 세상만사 다 그렇듯 돈과 시간이 문제였다. 

부산 롯데백화점 앞 액션 신은 무사히 끝났다. 시내 번화가 버스 정류장을 200m나 옮기고 10차선 중 4차선을 막아놓고서 마냥 찍을 수는 없는 일. 장선우 스타일을 알기에 걱정하는 이 많았다. 다행히 애초에 약속한 기한 1주일을 칼같이 지켰다. 문제는 을숙도였다. 철새가 잠깐 머물다 간다는 을숙도에서 그들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허PD의 증언. 

"오인조 아지트에서 비련파와 라라가 대결하는 장면이었죠. 을숙도 폐공장에서 찍었는데, 홍콩 액션 감독 리들리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거야. 그게 이 영화에서 처음 찍는 액션인데다 한국에서 자기가 선보이는 첫 액션이고 하니까 그냥 이것저것 다 하더라고. 그 친구 땜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애초에 한 5일 예상했었나? 다 찍고 나오는데 딱 20일 걸립디다." 

황우현은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 

"크랭크인하기 전에 장선우 감독을 만나 얘기를 했어요. 액션 블록버스터는 풀 콘티가 나와야 하고 테스트 촬영도 해보고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준비가 너무 허술하다. 한마디로 크랭크 인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3~40%밖에 준비가 안 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결국 장감독한테 진 거죠.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때 잘못한 거예요." 

김우형은 생각이 다르다. 준비를 못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장감독님이 그러지 않은 것이 스탭의 한 사람으로서 대단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준비를 했다면 훨씬 편했을 겁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찍어야 하는지 명료하니까. 그러나 이런 액션, 이런 규모를 장선우식 방법으로 찍을 때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감독 스타일이 확 바뀌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불필요한 예산 낭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좋은 장면들이 살아남은 거잖아요." 

그러나 황우현이 보기에 장선우식 연출의 피해는 컸다. 비단 액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김우형도 인정했듯이 "현실 속 성소 희미(임은경)가 오락실에서 동전을 바꿔주는 장면에서 어마어마한 필름을 썼다". 아무리 장선우 감독이 신인 배우를 훈련하는 나름의 방식이라 해도 돈 대는 사람이야 안달할 일이다. 임은경은 오락실 오토바이를 당기면서 거친 육두문자를 내뱉는 장면에선 무려 "마흔 번 넘는 테이크를 찍었다"고 털어놓는다. 신인 배우를 기용한 대가라고 하기에도 이건 좀 지나친 여유가 아닌가. 황우현 이사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참 난감했죠. 도대체 촬영 회차를 못 지켜요. 일정이 자꾸 딜레이되고 돈이 한없이 오버하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결국 우리 쪽에서 압력을 넣을 수밖에 없는 거죠. 촬영을 일시 중단하고 남은 스케줄을 다시 검토하자고 했습니다. 스탭 재정비하고 찍을 수 있는 신만 찍어야 한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죠." 

투자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현장에서 보기엔 너무한 처사였다. 제작진은 튜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맞춰 현금 지급이 중단됐다. 일부러 안 보내준 것인지 보내주고 싶어도 못 보내준 것인지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어쨌든 현장에 돈이 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장선우가 알았다. 실무를 총괄하는 황우현 이사에게 따져 묻는 게 순서겠으나 그 무렵 장선우 감독은 황우현과 얘기하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의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화법을 장선우는 싫어했다. 그가 원한 건 최종 권한을 가진 김승범 대표와의 담판이었다. 

제3화: 김승범의 결심 

2001년 5월 26일 토요일. 튜브엔터테인먼트 김승범 대표는 충남 대천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장선우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1주일 쉬는 셈치자고 하더라고. 월요일에 부산에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나도 좋다고 그랬죠." 

백방으로 수소문한 김승범은 운 좋게도 장선우와 직접 연락이 닿았고 대천 어머님댁에 내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잠적한 지 벌써 이틀. 하루라도 빨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 길로 장선우에게 달려가던 중이었다. 김승범은 다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황금 같은 주말 오후, 따뜻한 5월 햇살을 쬐면서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때 김승범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애초에 이 험난한 여정에 발을 들여놓은 걸 후회하지나 않았을까. 

튜브가 이 프로젝트를 떠안은 건 2000년 4월이다. 어느 날 기획시대 유인택 대표가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성소 2.0 버전 시나리오였다. 촬영 당시 스탭들 손에 쥐어준, 항간에 말보다 말줄임표가 더 많다고 알려진 3.5 버전보다는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였다. 이 모호한 시나리오의 시작은 <거짓말>을 준비할 때로 거슬러올라간다고 조감독 인진미는 술회한다. 

"감독님은 원래 <거짓말>보다 <성소재림>을 더 하고 싶어했어요. <거짓말> 준비하면서 1주일 정도 잠깐 어디를 다녀오더니 <성소재림>을 해야겠다면서 시놉시스를 던졌어요. 주인공은 TTL로 한다고 써 있었죠. 게임을 차용한다는 컨셉이 그때부터 있었고요. 오히려 지금보다 게임 코드가 더 강했달까?" 

99년 <거짓말>이 큰 논란을 일으킨 그 해 부산영화제 때 인진미등 몇몇 스탭은 따로 장소 헌팅을 시작했다. 당시 <리베라 메> 헌팅중인 부산영상위원회 김현석이 그들을 도왔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파주에 전셋집을 얻어 합숙을 시작했다. 겨우내 게임에 익숙해지겠다고 플레이스테이션만 했다. 그렇게 완성한 시나리오는 맨 먼저 신씨네로 갔다가 유니코리아, 이스트필름을 거쳐 기획시대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파트너의 손에 건네진 것이다. 

김승범은 2주 동안 숙고한 끝에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33억9천만 원이면 예산 부담이 적고 무엇보다 장선우 감독 영화라는 점에 끌려서" 그랬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하지만 돌아가는 모양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2000년 9월, 크랭크인 3일 전 계산기를 두드렸다. 56억이 나왔다. 크랭크인 하루 전 다시 계산했다. 62억이 나왔다. 일단 크랭크인을 막았다. 엎느냐 마느냐 고민이 시작됐다. 유니코리아에 지불한 2억 6천만 원을 포함해 준비하는 데 이미 10억 가까이 지불한 상태였다.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성소재림>은 촬영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다시 4개월 뒤인 5월 28일 월요일 저녁, 김대표는 부산의 한 술집에서 장감독과 마주 앉았다. 

"우리 입장도 이해해달라, 회사가 자금 압박이 심하다, 그랬죠. 장감독도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본인 역시 고통스럽게 찍고 있다면서 왜 지금 이 영화를 찍어야 하는지를 쭉 이야기하더라고요. 사실 난 그날에서야 장감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술자리는 새벽 4시까지 계속됐다.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거쳐 종교 이야기로 넘어갔다. 불교 교리에 대한 깊은 대화가 오고간 후 김승범은 결심한다. "장선우를 믿고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하긴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미 묶인 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결과물이나 좋게 나오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비교적 예산 부담이 적어서" 시작한 영화 <성소>가 국내 최대 제작비를 경신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훗날 이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시련을 겪을지도. 

함께 술집을 걸어나오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이틀 뒤 <성소>의 촬영이 재개됐다.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일단 촬영 스케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4월에 11회, 5월에 10회에 그친 촬영 횟수가 6월부터 20회로 늘었다. 제작진이 타이 촬영과 타워 크레인 등 품이 많이 드는 촬영을 미루고 우선 찍을 수 있는 것부터 촬영하자는 튜브 쪽 제안을 수락한 것도 한몫했다. 성소가 보위대와 대치하는 97번 신 촬영지로 염두에 두었던 컨테이너 부두 섭외가 여의치 않은 걸 빼면 로케이션 섭외도 순조로웠다. <성소재림>의 로케이션 섭외를 맡았던 부산영상위원회 김현석씨는 "오히려 감천 화력발전소로 대체했더니 감독이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말한다. 홍콩 스탭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처음보다는 한결 수월해졌다. 리들리 대신 순둥이 원덕이 무술감독으로 합류한 덕분이다. 하긴 리들리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와이어에 매달아두고 지들끼리 회의하는 바람에 옆에 매달린 스턴트맨과 가위바위보를 해야 했던 김현성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거의 니가 뭘 아느냐, 액션에 대해서는 내가 베테랑인데, 이런 식이었죠. 자기 마음대로 카메라 위치까지 지적을 하니까 촬영감독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장감독님도 처음에는 그냥 지켜보시다가 나중에는 계속 스톱을 거셨죠. 계약 기간 끝나고 다른 사람 부르고 나서는 필요한 것만 딱딱 빼먹더라고요." 

촬영이 일사천리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지켜졌다. 재촬영 거의 없이 차곡차곡 신 넘버를 채워나갔다. 대신 재충전 거의 없이 달려온 스탭들이 점점 지쳐갔다. 8월 20일, '주'와 '이'의 빗속 결투 신으로 대망의(?) 100회 촬영을 채웠다. 김진표가 연기한 이의 대사. "넌 원래 내 상대가 못 돼. 미안하지만 떠나줘야겠어." 마치 영화가 스탭들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제4화 : 김우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김우형은 작년 여름이 몹시 힘들었다. 무거운 카메라 짊어지고 와이어에 매달려 공중을 빙빙 돌지 않나 광안대교 난간 밖으로 위태롭게 몸을 내밀지 않나. 몇 달째 온갖 희한한 콘티를 소화하느라 힘든 건 당연하다. 여기에 여자친구와 갈등이 얽혀들면서 살맛을 잃었다. 그래도 김우형은 다행이다. 실연당한 스탭이 여럿이었다. 성소는 진정한 사랑을 얻는데 우리는 왜 이 모양인가. 강타가 부른 주제곡 '섬'의 가사가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아, 얼마나 아파야 하나∼" 이래저래 짜증나는 여름이었다. 

객지 생활 반년이 넘어가면서 사건 사고도 꼬리를 이었다. 허 PD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지사 아들을 때려 잡혀간 홍콩 스탭들 뒤치다꺼리도 모자라, 현장을 통제하다가 주민을 밀어 넘어뜨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스탭을 빼내느라 바빴다. 빼내야 하는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영화에 오뎅 역으로 출연한 제작부 한택관은 광안리 모래사장에 박힌 자동차를 빼내느라 애를 먹었다. 조감독 인진미와 그 일당들이 술김에 동트는 바다가 보고 싶다며 핸들을 꺾은 결과였다. 

그래도 다행히 큰 사고는 없다고 안심할 즈음 기다렸다는 듯이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다. 9월 18일부터 부산 삼성자동차 공장 앞에서 촬영한 시스템 정문 바리케이드 신. 인진미가 "맨날 나이트 신만 찍다가 갑자기 햇빛을 받아서" 더욱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문제의 신을 찍을 때였다. 폭발하는 지프 와이어가 끊어졌다. 육중한 차체가 현란한 공중 회전을 하더니 B팀 카메라를 덮치는 게 아닌가. 다행히 카메라맨 머리 위를 스치듯이 지나가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하마터면 순직이란 이런 거구나 몸으로 체험할 뻔했다. 

이런 위험을 피해가며 기본 2대, 많을 때는 7대가 동원된 카메라를 세팅하는 것도 일이었다. 카메라끼리 서로 걸리지 않으면서 각 카메라별로 완벽한 앵글을 확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아까운 시간을 축냈다. 돈도 비쌌다. 게다가 위험했다. 누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나? 웬걸, 김우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영화 시작하면서 이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그때 사람들은 감독님이 머릿속에 있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다 생각했겠지만 난 아, 정말 장감독님이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장감독님이 <나쁜 영화> 때부터 여기저기 인터뷰하시면서 자기가 축구 감독이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직접 플레이하지 않으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 적절하게 배치하는 스타일이라고. 그렇듯이 일단 판을 벌린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예견했다고 보기엔 힘들죠. 다른 액션 감독이 오면 어차피 액션의 모습이 또 달라질 테니까요." 

카메라가 많다보니 버리는 장면도 많았지만 김우형은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왕가위가 <해피 투게더> 때 40만 자를 찍었대요. 누군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한테 물었죠. 그중에 1만 자로 영화 만들면 아깝지 않느냐? 도일이 그랬대요. 찍은 게 다 어디 가겠냐. 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참 멋있는 말이더라고요" 

멋있긴. 제작자가 들으면 하나도 멋있지 않은 말이다. 당시 튜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산에서는 와이어가 끊어졌지만 서울에서는 돈줄이 끊어졌다. 이때의 절박한 상황을 김승범 대표에게 직접 들어본다. 

"최악이었죠. 회사가 넘어가게 생겼으니까. 더이상 펀딩이 불가능했어요. 영화가 결국 엎어진다더라, 장선우가 촬영은 안하고 놀고 있다더라, 온갖 악소문이 돌 때였습니다. 투자자들이 다 등을 돌렸어요. 결국 회사 경영권까지 넘겨가며 성소에 대한 투자를 받기로 했습니다.

<집으로...>가 아니었다면 튜브는 CJ와 합병했을지 모른다. 예상 외로 대박을 터뜨린 <집으로...> 덕분에 직원들이 집으로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터리 없는 게임기에 끼워준 할머니의 2천 원처럼 눈물겨운 돈이 <성소재림>에 재림했다. 그 와중에 촬영이 끝났다. 2001년 10월 31일 139차. 방장 아지트 신을 끝으로 10개월에 걸친 부산 생활을 청산했다. 인진미는 "11월에 올라오기 싫어 10월 31일에 올라왔다"고 말한다.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부산을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5화 : 대단원 

부산에서 올라와 한 번의 해외 촬영과 두 번의 나머지 촬영을 더 했다. 지루한 후반작업도 이제 끝이 보인다. 오는 9월 13일. <성소재림> 제작기는 드디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장선우의 편지와 황우현의 후회, 김승범의 결심, 김우형의 카메라, 허PD의 계산기, 인진미의 자동차를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면 대신 임은경의 기관소총과 김현성의 고등어, 라라의 톰 크루즈가 화제에 오를 테니까. 

지난 8월 12일 기자들을 상대로 한 시사회 이후에도 영화는 다시 수정 작업에 돌입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탈바꿈한단다. "지루한 7분을 삭제하고 재미있는 7분을 추가했다"는 게 제작사의 주장이다. 어쩌면 <성소재림> 제작진의 재미있는 7일의 추억을 삭제하고 지루한 7일의 노동을 집어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장선우의 편지와 달리 <성소재림>이 미완성으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02.09.14 / 김세윤 기자 

엠팍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