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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코스모스에 얽힌 사연

by 501™ 2012. 6. 26.




한 아이가 젊은 부부의 눈에 띤 것은 열차가 길게 기적을 올린 뒤였다.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긴머리의 여자아이. 그 아이의 가슴에는 코스모스가 한 묶음 안겨 있었다. 아이가 어른들 틈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것을 보다 못한 젊은 부부가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좁히고는 아이를 불러서는 앉혀 주었다. 

“서울 가니?”


젊은 부인이 먹고 있는 땅콩을 나누어주면서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예쁘네. 그 꽃 누구 줄 꺼니? 엄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제 동생 줄 꺼예요. 스웨덴이란 나라에서 왔거든요.”

“네 동생이 스웨덴에서 왔다구?”

이번엔 젊은 남자가 물었다.

“예, 걔네 엄마랑 같이 왔대요.”

“아니, 걔네 엄마라니? 그럼 너의 엄마는 하나가 아니구나?”

“그래요. 영미는 스웨덴으로 입양을 갔드랬어요.”

아이의 입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판잣집이 많은 어느 도시의 변두리에 살았어요. 아버지는 날마다 술 마시고 들어와선 엄마를 때렸어요. 아버지한테 맞은 엄마는 우리를 끌어안고 울곤 했는데 항상 도망가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럴 때마다 영미와 나는 엄마가 정말 도망 갈까봐 치마자락을 붙잡고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아이가 울음을 터트릴까 봐 젊음 부인이 아이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 날밤도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은 엄마가 울지 않았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가 안 보이는 거예요. 며칠 동안이나 해질녘이면 영미를 업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렸지만 끝내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영미의 별명은 ‘울보’가 된 거죠. 어느 날이였어요. 아버지가 큰 시장에 가자고 해서 우리는 좋아라하고 따라 나섰지요. 아버지는 그 날 우리가 사달라는 대로 다 사주셨어요. 풍선도 꽃신도 그리고 새 때때옷까지두요.. 사탕 한 봉지를 들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서 약장수 굿을 보다가 거기서 아버지를 잃었어요.”


젊은 부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젊은 남자가 아이의 손에 쵸코렛을 쥐여 주었다. 아이의 얼굴은 또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우리 영미가 이 쵸코렛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고아원에 있을 때 쵸코렛을 준다고 하면 울다가도 금방 그치곤 했으니까요. 어쩌다가 외국손님들이 오셔서 과자를 나누어 주고 가면 난 언제나 쵸코렛을 먹지 않고 아껴 두었다가 몰래 영미에게 주곤 했지요. 영미가 처음 입양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싫다고 했어요. 우리 둘이 있으면 엄마, 아빠가 같이 찾으러 올거라구요. 원장 아버지가 눈물을 글성거리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외국에 가면 영미는 좋아하는 쵸코렛을 실컷 먹으며 행복하게 살수 있단다.’라구요. 영미가 떠나는 날 아침, 제게는 영미에게 줄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코스모스를 한아름 꺾어서 가슴에 안겨 주고는 도망쳐 버렸어요. 멀어져 가는 차소리를 들으며 다락 속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떨리는 아이의 어깨를 젊은 부인이 안아 주었다. 

“그래도 용케 동생을 만나는구나.”

“예, 고아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영미네 새 엄마, 새 아빠가 우리를 만나게 해주고 싶으시대요. 그런데 보낸 사진을 보니 너무 많이 달라 졌어요. 키도, 얼굴도, 너무 많이 변해서 내 동생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원장님도 그냥 웃으셔요. 헤어진지 6년이 지났으니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구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영미가 더 나를 못 알아 볼 것 같아요. 그 앤 그때 겨우 4살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코스모스를 가지고 가는 거예요. 한아름 안겨준 코스모스를 받고 환히 웃던 네 살 박이 내 동생 영미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젊은 부부도 주위 사람들도 모두 코스모스를 보았다. 전에 없이 아름답고 한이 많아 보이는 그런 꽃이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들어섰을 때는 차창 밖으로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육교를 지나 출구로 향하는 아이 뒤엔 젊은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가고 있었다. 차츰 출구에 마중 객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마중 객들 중에서 쏜살 같이 달려오는 아이가 있었다. 오른손을 마구마구 흔들면서... 아! 깃발같이 흔들리는 아이의 흰 손! 거기에도 코스모스가 한 묶음이 들려 있지 않은가!!


“언니!!”


“영미야!!”

두 아이가 끌어안고 울음을 우는 순간 어른들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편 밝은 하늘 아랜 이젠 별이 시들고 찬란한 태양이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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