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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세기의 살인마들 - 노약자 금지

by 501™ 2012. 7. 12.
세계의 살인마들
        



경고: 아래 내용은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해외에서 다큐멘터리와 특집 보도 등을 통해 여러 번 방영됐던
사건들입니다. 극도로 끔찍한 내용이 많으니 비위가 약한 분이나 임산부 및 노약자 분들은 읽지 마시길 권고 드립니다.  








로텐부르크의 인육먹는 남자

2002년 9월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으로 독일의 로텐부르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2001년 아민 마이베스(Armin Meiwes, 당시 41세, 컴퓨터 기사)는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모집 광고를 냈다.



Hi, ich bin Franky aus Deutschland, ich suche nach jungen Mannern zwischen
18 und 30 Jahren, zum schlachten. Hast du eine normal gebauten Korper,
dann komme zu mir, ich schlachte dich und esse dein kostliches Fleisch.
Franky


안녕, 난 독일의 프랭키라고 해. 난 지금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살해당할' 젊은 사람을 찾고 있어.
만약에 당신의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나에게로 와 주길 바래.
그럼 난 당신을 죽여서 신선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먹을 테니까.
프랭키


이 광고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총 430명의 사람들이 식인 행위의 희생자로 자원했으며,
이 중 유르겐(Jurgen B.)이라는 컴퓨터 기술자가 '당첨'된다. 

서로 동의 하에 두 남자는 만났으며 유르겐은 마이베스에 의해 잡아 먹힌다.
이 과정이 모두 캠코더로 녹화됐는데 마이베스는 처음엔 유르겐을 살해한 뒤에 먹었다고 말했으나,
녹화 테이프 분석 결과 유르겐은 잡아 먹힐 동안 살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 받을 당시의 아민 마이베스.
그는 끝까지 자신은 희생자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주장함


이후에도 마이베스는 유르겐의 시신을 토막내 냉장고에 보관하며 두고두고 먹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마이베스는 재판을 받았으나 희생자의 요청에 의해 잔학 행위가 이뤄진 것을 감안,
8년 6개월 형이라는 가벼운 형을 언도 받았다.




사가와 잇세이(Issei Sagawa)

1949년 고베에서 태어났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의사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일본 내에서 입지전적인 사업가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는 불쌍한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의사의 말과는 다르게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의 발육 성장은 그다지 좋지 않아 다 자란 그의 키는 150cm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체에 상당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체구가 큰 여자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서양 여자들에게 특이한 판타지를 품게 됐는데, 바로 자신의 식탁에 여자들을 요리해 올리는 것.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상형의 여자를 발견한다.
잇세이의 클래스메이트였던 네덜란드 여성 르네 하테벨트(Renee Hartevelt).
이들은 서로 무척 가까웠는데 연인 사이였다기보다는 학문을 함께 배우며 토론하던 '동성적' 친구였다고.


잇세이에 의해 살해당한 르네 하테벨트.
굉장한 미인이었던 그녀는 잇세이에 의해 눈 뜨고 보기 힘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사체로 전락한다.


어느날 잇세이는 자신의 오랜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르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의 신체 부위를 잘라내었으며 그녀가 녹음해 준 시를 들으며 그녀를 뜯어 먹었다.
또한 '요리'를 위해 찢겨진 그녀를 시간(屍姦)하기도 했다.

그는 르네의 시체를 다 먹지 못하고 사체를 여행용 가방에 넣어 공원에 버리려 했다.
이 와중에 경찰에 발각, 가택 수색 끝에 체포된다. 그의 집에는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인육과
프라이 팬에 요리된 신체 부위가 널려 있었다.

경찰에 체포된 잇세이.
그는 자신의 범죄를 단 한 순간도 뉘우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은 그는 병원에 수감되어 있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재계에 영향력이 있던 아버지의 노력 등)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고 일본 정신병원에서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그는 국지주의 범죄 규정에 따라 일본에서마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풀려난 그는 일본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판해 큰 돈을 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점차 잊혀져 갔고 아버지의 사망 후 재산을 상속 받은 어머니는 살인마 아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때 일본 매스컴의 주목을 받던 인기인이었다.
당당한 자세와 지적인 언행이 그의 인기 비결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으며, 현재 일본의 일간지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사상 최악의 연쇄 식인 살인마,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

1991년 7월 미국을 비롯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 제프리 다머는 공식적인 기록
(유죄로 판결 받은 것)만 하더라도 그 희생자가 무려 17명이나 된다.
(대부분 흑인이나 하층 이민자 집안의 젊은이들이었다.)

제프리 다머의 희생자들.


다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돼 길러졌다.
입양 부모는 선량한 소시민이었으며, 친부모는 끝내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살인마였던 셈이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주로 게이바에서 살해 대상을 물색했다.
돈을 미끼로 자신의 아지트로 희생자를 끌어들여 약에 취하게 한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일반적인 연쇄 살인범의 경우 희생자가 공포에 떨며 약자가 되어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데 반해
제프리는 희생자를 살해한 후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 특이한 케이스이다.
(그는 희생자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보관했다)

그는 무척이나 잔혹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데,
약에 취한 사람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염산을 부어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는 희생자를 시간하거나 시체 위에서 자위를 하는 등 변태 성욕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시체를 기괴한 자세를 취하게 한 후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머리를 잘라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냄비에 끓여 두개골만을 채취하여 전시했다.

그가 인육을 먹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재판을 받고 있는 제프리 다머
금발의 백인 남성으로 180cm정도의 건장한 체구


그는 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방에 감금했던 소년이 탈출했을 당시 유려한 말솜씨로 경찰의 손에서 소년을
빼내오기도 했다.  이렇듯 지극히 정상적이며 논리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재판 당시 자신이 '비정상'으로
판결을 내리게 하려 했으나 여러가지 정황을 들어 결국 15차례의 유죄판결(2건은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다)을
받아 957년형을 받는다. 재판을 받은 위스컨시에는 사형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11월 감옥에서 흑인들에게 살해당한다.




어린이 유괴 살인마, 알프레드 피쉬(Albert Fish)

1870? ~ 1936. 미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어린이 연쇄 살인범.
그는 총 7명의 아이들을 살해했으며 그중 일부를 먹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신병이 있는 가계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길러졌다.
고아원에선 끔찍할 정도로 폭행을 당하며 자랐는데, 그는 당시 맞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극심한 자학 증세가 있는 정신병자였다.)

미국 이곳저곳을 떠돌며 칠쟁이로 일하던 그는 결혼을 하고 6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가정을 꾸린 뒤 그의 자학증세는 더욱 극심해지기 시작,
급기야 아이들을 납치해 살해하고 그들의 사체를 먹기에 이른다.
(그는 가죽 혁대에 못을 꽂아 아이들을 때렸는데, 인육을 보다 연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했다.)




알프레드 피쉬의 희생자 중 한명인 그레이스 버드(당시 10세).
그는 그레이스를 살해하고 잡아 먹은 뒤, 그녀의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 그 과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1935년 체포돼 재판을 받는다.
당시 그는 정신병으로 사형을 면하려 했지만, 법원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36년 전기 의자에서 생을 마친다.


달빛 미치광이, 브루클린의 흡혈귀 등으로 잘 알려진 알프레드 피쉬.


알프레드는 죽음의 순간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전기의자에 앉게 돼 더할 수 없는 스릴과 희열을 느낀다고 했으며,
전기의자에 자신을 묶을 때 간수들을 도와 주기도 했다.


(출처 미상)







"언론은 나를 카니발니즘(cannibalism,식인주의)의 대부로 만들었고, 그사실에 만족합니다.
나는 항상 식인인의 눈으로 세계를 지켜볼 것입니다." --- 이세이 사가와---





이 글은 1981년 6월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쇼킹한 살인사건 및 카니발니즘에 대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읽은 이의 혐오스러움을 유발할 수 있으니 각자 조심해서 읽어주시기 바란다.


자신을 카니발니즘의 대부로 자칭하는 이세이 사가와는 프랑스의 소르본에서 일러스트를 전공했다.
그는 성실하고 조용한 학생으로 그저 평범한 동양인이었다.
그에게는 르네 하르테벨트(Renee Hartevelt)라는 미모의 네덜란드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가 어떻게 르네를 사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가와는 왜소하고 가냘픈 체구의 사내다. 반면 르네는 사가와보다 신장이 훨씬 컸다.
또한 탐스러운 금발머리와 신비스러울 정도로 파란 눈과 하얀 피부를 지녔고 그것은 사가와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매력이었다. 일본 여자들보다 훨씬 큰 가슴, 뽀얀 피부를 생각하면서 잠을 설친 적도 많았을 것이다.


사가와는 곧잘 르네를 자신의 아파트에 초대해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 주곤 했다.
어느 날 사가와는 르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며, 성적 욕망을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성적흥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라고도 말했다.


르네가 사가와의 침대에서 독일 시를 읽고 있을 무렵 사가와는 진심으로 그녀를 먹고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가졌다.
사가와의 베스트셀러인 <안개 속에서(In the Fog)>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때의 감정을 표현했다.


"나의 열망은 컸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오로지 이 소망뿐이었다."



르네는 그 다음날 다시 사가와의 아파트에 왔다.
잠시동안 사가와는 르네가 시를 읽고 있는 것을 녹음했고 그녀를 죽이기 위해 권총을 준비했다.
르네가 시를 다시 한번 읽기 시작했을때, 사가와는 그녀의 뒤에서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그녀는 그 즉시 사망했고, 사가와의 식인행위는 시작되었다.


어떻게 사람을 먹어야되는지 몰랐던 사가와는 그녀의 엉덩이 부분부터 먹기로했다.
그는 부엌에서 날카로운 포크를 가져와 죽은 소녀의 살점을 나누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체의 많은 죽은 살에서 분비물이 나왔다. 마치 옥수수 콘 같았다.
계속해서 분비물이 나왔는데 정말 이상했다.
죽은 살 아랫부분에서 빨간 새살이 있는 것을 본 나는 그것을 떠서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아무런 냄새와 맛이 없었으나 살점은 점차 내 입에서 녹아 마치 참치를 먹는 기분이었다.
나는 르네의 눈을 보고 말했다. 이봐! 당신 참 맛있어!"



사가와는 저녁내 르네의 시체를 조각 내어 각 부위별로 요리를 해서 어떤 맛이 있나, 맛을 보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 살을 요리해서 저녁식사로 먹었는데 소금과 머스타드소스로 양념을 했고 그녀의 팬티를
네프킨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매우 양질의 고기..."


그는 그녀의 가슴한쪽부분을 썰어 오븐에 넣은 후 구웠는데 기름기가 너무 많았다.
그는 또한 그녀의 남아 있는 부분을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성관계도 가졌고 심지어 같이 자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계속 해부를 했고 몇 부분을 냉장고에 보관했다.



사가와는 르네의 시체를 정육점의 전시 마냥 걸어놓은 후 그녀의 시신을 부위별로 나눠 슈트케이스에 담아놓았다.
이틀 후 밤(6월 13일)에 슈츠케이스 두 개에 루네의 시체를 넣어 불로뉴 숲의 호수에 버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버린 슈츠케이스는 이튿날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파리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목격자의 진술로 동양인에 의해 버려진 슈트게이스를 조사한 경찰은 그것이 이세이 사가와의 것으로
확인하고 그가 머물던 아파트를 급습한다.
놀랍게도 그의 아파트에서 발견된 것은 르네의 입술과 그녀의 왼쪽 가슴과 두쪽의 엉덩이였다.
사가와는 르네의 살인범으로 6월 15일 즉각 체포되었다.
체포된 그는 르네 살인을 순순히 인정했고 식인을 자백했다. 일련의 사건은 프랑스와 전 유럽,
그리고 일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재판은 앙리 콜린 정신병동에 갇힌 채로 이루어졌다.
세 명의 심리학자가 그를 검진했는데 그의 정신이상은 치유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했다.


사가와를 프랑스 내의 병동에서 치유하고 보호하는 것이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판단한
프랑스는 1985년 그를 일본으로 강제 이송했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언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시대의 식인인인 그를 만나보기를 소망했다.
그는 도쿄의 마츠자와 병원에 격리되었고 당시 그곳의 의사인 츠고우 가네고는 이렇게 그를 진단했다.


"그는 지극히 정상이며, 유죄다. 그가 있을 곳은 병원이 아닌 감옥이다!"


하지만 일본 내 손꼽히는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로비에 의해 1986년 8월 12일 그는 자유인으로 풀려나게 된다.
법률적으로 또한 몇 가지 이유에 의해 그는 더 이상 기소되지 않았고 살인에 대한 문학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미국의 제프리 대머와 같이 사가와는 큰 명성을 얻었고,
풀려난 지 1년후 앞서 말한 '안개 속에서'라는 책을 통해 자신이 행한 범죄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살인, 강간, 식인, 시체유기의 내용이었지만 점점 더 큰 명성을 얻게된다.
일본의 한 텔레비전에도 나와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행위를 시청자들에게 알리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토크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가와는 살인과 여자를 먹었던 것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말하고 책으로 출판했으며,
현재는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주로 여인의 엉덩이를 그린다고 한다.
그의 범죄를 그린 만화도 등장하고 있으며, 팬 중에는 그를 동화 속 왕자로 보고 있는 여성들도 꽤 많다고 한다.


당시 사건 사진, 노약자는 안보길 권해요

(역시 출처 미상의 퍼온글)









질 드 레(Giles de Rais 1404.?~1440.10.26)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연쇄살인범을 들자면,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 레 남작을 지명하겠다. 잔다르크의 상사로서 영국과의 백년 전쟁에 참전한 전쟁영웅이자, 왕관만 없다 뿐, 왕에 버금가는 부와 권력을 가진 이 작자는 영지에 거주하는 수 백명의 아이들을 인간의 상상이 허하는 거의 모든 고문들을 가하며 살해했다. 신체절단은 말할 것도 없고 시체뻑커(necrophile)에다가 아동뻑커(pedophile) 되시겠다.  

그의 이런 행동 이면에는 전쟁 끝나고 할 일이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연금술과 흑마법에 심취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의사(擬似)과학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희생제의로 그는 아동살해를 취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다 소리를 들었던 남작은 피 잔치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교회와 왕권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첨에는 열라리 거만하게 튕겨대다가 종국에 참회했다 전해지는 이 살인마는 모든 탓을 엄격하지도 못했고 요절까지 한 자신의 부모들에 돌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남작의 이런 행적은 다소 부풀려지거나 혹은 꾸며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그를 교회와 왕이 당연히 견제하고 있었을 테고, 그를 숙청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도덕적 타격이 필요했을 테니까. 전술했듯 그는 전쟁영웅이었으므로.... 승자의 역사는 루저에게 불친절하다. 해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런 행적들이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살해지망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는 거다. 드 레 남작은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푸른 수염'의 푸른 수염 캐릭터 원형이기도 하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1888)

원래 미해결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전설이 되기 쉽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하반기에 영국 런던의 빈민 지역에서 연속 발생한 살인사건의 살인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써, 범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아 더욱 유명하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자신이 범인임을 주장하는 편지에 친절하게도,  

"Yours truely, Jack the Ripper"

라고 써있었기 때문이다. 잭 더 리퍼의 이름으로 온 두 개의 편지는 그 진위여부가 엄청나게 논쟁적이었고 역시 끝내 밝혀지지 않았음이다.

사실, 당 사건 자체는 앞서 소개했던 미친 남작이나 이후 소개할 미치광이들보다는 어케 보면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거다.

런던의 빈민가이자 매음굴이 위치한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약 넉 달 동안 5명의 매춘업 종사 여성들이 칼로 난자당하며 살해된다. 살해수법의 유사성으로 인해 동일범의 소행일거라 추측될 뿐, 범인을 못잡았기에 이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주거지 한 복판의 거리에서 살해가 이루어진 점, 피해자에 따라서 많을 경우 40여 회 가까이 난도당한 점 등 대담하고 잔인한 살해양식은 곧 당대의 충격적 이슈가 되었고, 미제사건에 등극함으로써 수많은 용의자들과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칼 쓴 솜씨가 장난 아니게 깔끔했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정육점 주인들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 이상편력을 가진 외과의들이 용의자가 되기도 했으며 왕가의 사생아 출산과 관련된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작가인 루이스 캐롤이 잭 더 리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박스 참조)

9세기의 가혹한 자본주의가 아동의 노동력 마저 착취하던 암울한 이 시절에, 영국은 그 선봉에 서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건설에 젖빨던 힘까지 다하던 무렵이었다. 씁쓸하고 오싹하지만, 말 그대로 시대를 반영하고 풍미한 사건이 아닐까나...  

범인에 관한 주장 중 가장 솔깃한 것은 아니고 황망한 케이스 둘의 세부내용되겠다.

하나는, 음모론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써 왕족과 관련된 스캔들이다. 당시 왕이었던 빅토리아에겐 알버트라는 손자가 있었다. 클레런스 대공이자 왕위계승 서열 2위에 빛나는 알버트 왕자가 윤락여성과의 빠굴로 사생아가 생기자, 이를 알게 된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의 주치의를 시켜 '처리'하라 했다. 주치의 걸 경(Sir William Gull)은 자신의 마부와 함께 애 엄마와 애 엄마 친구들을 차근차근 살해했다는 다소 황망한 주장되겠다.

알려진 바, 알버트 왕자가 실제 주살해무대인 화이트채플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게이였다는 소문도 무척 강했고, 또 이런 혼외정사로 다섯 명이나 살해할 거까지 있었겠나 하는 점에서 신빙성이 마니 떨어지지 않능가? 뭐 하긴, 다이애나 공주 암살설도 파다할 정도로 영국왕실이 한 성질 하긴 한다.

다른 하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인 루이스 캐롤이 범인 중 하나라는 최근 주장이다. 리처드 월러스가 저서 'Jack the Ripper, Light-Hearted Friend(1996)'에서 제기 것인데, 근거로는, 그의 저서들이 살해 기간 중에 집필됐으며, 텍스트를 가지고 잘 연구--'anagram'이라는 일종의 철자바꾸기 등의 언어유희같은--하면, 당 연쇄살인과 관련된 내용이 숨겨져 있다는 거다.  

사실 루이스 캐롤이라면, 딱히 시대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살아간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제가 되려다가 긴장하면 더듬는 습관 때문에 수학교수가 되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캐롤. 그렇다고 그가 아동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재직하던 대학의 학장 딸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리즈는 사실, 당대의 영국인들이 아니라면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유머와 온갖 말장난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캐롤은 실제로 상당히 우울한 인간이었다 하는데 그렇다구 연쇄살인 공범이라는 주장은 너무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이론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수학자이자 작가인 캐롤이 작품에서 즐겨 쓴 'Pun'이라는 일종의 동음이의어 유희와 수학적 메타포 때문이 아닐까 본기자는 생각한다.  



앨버트 피시(Albert Fish 1870.5.19~1936.1.16)

 

일단 심호흡부터 하시라. 소설 혹은 영화 <양들의 침묵>의 닥터 한니발 렉터를 기억하시는가? 그의 원형이 되는 자가 바로 앨버트 피시 되겠다. '달미치광이', '회색남' 또는 '브루클린 뱀파이어'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 피시는 영화 속 렉터 박사가 그랬듯이, Cannibalism 즉, 식인행위로도 유명하고 또, 사도마조히즘적 가혹행위도 만만치 않게 유명하다.

피시는 화가였다는데 여기 저기 떠돌며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아동성학대 및 고문을 펼쳤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흑인 빈민가 아동들이었다. 왜냐면 흑인 아이들이 멍들거나 다친다거나 혹은 실종된다 해도 별다른 경찰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어서였댄다. 20세기 초의 미국엔 흑인'시민'은 엄썼다, 쳇!

최소 15명의 아동을 살해했고 그들 중 다수는 먹어치우기까지 하셨다 하며 미국 전역에 걸쳐 많은 아동들을 고문하고 성적 학대했다 한다...  

피시의 골반 엑스레이 검은 줄들이 바늘!

피시는 남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고통을 가했다. 아니 말이 잘못됐다. 자신에게 가한 고문을 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게다. 자신의 후장과 음낭 주변을 중심으로 바늘을 꽂아 넣는다거나(재판 진행 때 20개도 넘는 바늘들이 골반 부근에 들어가 있음이 엑스레이를 통해 확인됨), 솜에다가 알콜을 적셔 직장에다 쑤셔넣은 뒤 거따가 불을 붙이는 등이 그의 주된 유희되겠다.

물론 자신이 한 다음, 피해아동에게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했음이다. 또 그는 희생자의 살만 먹은 게 아니라 오줌, 똥, 피도 즐겨 섭취했더란다.

고모며 삼촌, 동생들까지 병원을 들락거리는 등, 정신병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피시는 고아원에서 자라며 가혹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포된 이후, 자신의 경향과 업적(?)들을 학대받은 아동기 탓으로 돌렸다 하는데, 앞서 제시해드린 드 레 남작과 참으로 닮아있는 부분이지 않은가?  



그레이스 버드

 

결국, 10세 여아, 그레이스 버드의 살해혐의로 1935년 3월 11일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는 집안의 정신병력도 병력이려니와, 납중독(당시 물감에 납이 많이 들어가서)에 의한 정신 이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는, 오래 전에 딴놈과 눈맞아 집나간 아내 대신 6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성실하게 양육했고 나이에 비해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그는 정상이라고 주장했으며 배심원들은 유죄를 판결했다.

유죄에 대해서는 불만이었으나 판사의 사형 선고에는 피시의 눈이 반짝 빛날 정도였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1936년 1월 16일, 명성도 드높은 싱싱교도소의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했는데, 이때 "최상의 스릴(supreme thrill)"이라며 사형집행관을 도와 지몸에 가죽끈 조이는 거에 일익을 담당했다나...이 작자, 살인마였을까 아님 미친 놈이었을까? 확신범임에는 틀림이 없다.  

재판을 위해 피시를 만났던 프레드릭 워담 박사(Dr. Fredric Wertham)는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자상한데다 예의바르기까지한 모습에 아주 깜딱 놀랐다고 한다. 그는 일케 말했다는데...

"살고자 하는 특별한 열망도 엄꾸, 죽임당하고 싶은 특별한 열망 역시 엄써요. 나랑은 무관한 문제일 뿐. 내가 전부 옳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I have no particular desire to live. I have no particular desire to be killed. It is a matter of indifference to me. I do not think I am altogether right)"

자신이 정신이상임을 인정하냐고 묻자 피시는 "모르겠어....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Not exactly.... I never could understand myself)" 라고 했단다.  



에디 게인(Eddie Gein 1906.8.27~1984.7.26)

 

미국 위스콘신이 낳은 걸출한 살인광으로, 앞서 말한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버팔로 빌'의 모델이 된 작자며 히치콕이 만든 영화 '사이코'의 원작소설에 지대한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작자가 검거됐을 당시의 반향은 전지구적이었다 하더라.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절단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무덤도굴, 시신뻑킹, 복장도착(transvestism), 페티시즘 등 다방면에 능숙한 희대의 현신한 악마였다....가 맞을까?

1957년, 공구상 주인 살해혐의로 수색영장을 가지고 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그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집에 있던 아티펙트들을 함 열거해 보면,  

에디 게인네 집 부엌

일단 주방에 목 잘린 사슴고기마냥 널부러저 있었다는 공구상 워든부인, 해골로 만든 수프접시며 심장이 가지런히 올려진 후라이팬, 침실에는 잘려진 머리들, 사람피부로 만든 전등갓에 의자보도 있었다 하며, 입술로 만든 목걸이, 여자성기와 가슴으로 만든 조끼, 젖꼭지로 장식한 허리띠..... 옷장을 열어보니 역시 피부로 만든 레깅스 바지, 거의 미라가 되어 가죽같이 보이는 마스크.... 마당을 파보니 열 구 가까이 되는 잘려진 시신들, 시신들.... 악마 맞네에~~  

이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그이므로, 몇 년 사이 근방에서 있었던 모든 실종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고, 사회는 경악했다. 허나 최종적으로 3건의 살인혐의를 받았고 그 중 워든부인 살해건으로 기소됐다. 대부분의 아이템들이 주변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다가 만든 것이 밝혀졌고 그간의 실종자들에 대한 살해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정에서 정신이상이 인정되어 죽을 때까지 범죄인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한다.  

에디 게인의 성장기는 여타 심각한 범죄자들의 그것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무능력한 아버지, 집안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기가 세며 종교적으로 대단히 경도된 어머니를 가진 그는 사회성이나 감수성 발달이 또래보다 지체되었기에 학교에서는 따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그를 보호한답시고 어머니는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격리시키기에 바빴다. 인간의 원죄에 대해, 빠굴에 대해 혐오강박을 주입하믄서. 해서 하나 있던 형을 포함, 모든 가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망한 이후, 가뜩이나 외진 집에서 그는 완전한 '혼자'였다.  

61세의 에디 게인 (왼쪽) 여러 연구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이자 절대선이었고 그녀가 강요한 금욕생활이 일반적 사회생활을 가로막았다는 거다. 그가 주로 애호한 시신과 피해자는 늘 중년여성이었다. 이들로부터 떼어낸 피부를 입고서 자신만의 의식을 치러온 거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정신병원 수감 생활이 퍼펙트 그 자체였다고 주치의는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의 환자만 있다면 지들 정신과의들은 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호들갑을 떨더라. 결과적으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산 삶이나 이후, 각종 페티시즘에 점철된 삶 등 자유인으로 살 때 보다, 격리되어 감시받은 삶을 훨씬 더 행복해 했다고 한다. 아씨 기분 더럽게 착잡해진다.  

그는... 악마였을까, 아님 피해자였을까?  



테드 번디(Ted Bundy 1946.11.24~1989.1.24)

 

1974년부터 79년까지 활약한 테드 번디는 워싱턴, 유타, 콜로라도, 플로리다 등지에서 여성들을 살해했다. 정확한 살인 건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감 중 자백을 토대로 30명에서 100명 이상까지도 추정하고 있다. 똑똑하고 고학력에 사교적이며 매력적인 외모의 이 인간... 혹시 재판 중에 자신의 팬과 결혼한 사형수 야그 어서 들은 적 없으신가? 바로 이 작자 되겠다. 대학에서 우수학생으로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심리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테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여친한테 채인 데다가 출생의 비밀까지 알아버린 후라고 많이들 그러더라. 자신의 누나가 실은 친모였고 부모라 알고 있던 양반들은 조부모였던 것... 이거 드라마 <빠리의 연인>이 슬슬 걱정된다. 박신양 혹시 연쇄살인범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잔혹쓰릴러였군, 이 드라마... 어쨌거나, 1974년 캐롤 대런치라는 여성의 유괴혐의로 유타에서 체포된 테드는 15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콜로라도주에서 기소한 살인혐의로 다시 심리를 받다가 두 번의 시도에 걸친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전역을 누비며 강간살해를 저지르는데 그 수법이 참으로 악랄해마지 않았다. 일례로 플로리다의 한 희생자의 시신에는 험학한 성폭행 흔적과 함께 국부에 헤어스프레이가 꽂혀있었으며 몸 구석구석이 심하게 물려 있었다 한다. 유두 한 쪽이 거의 떨어져 나갔을 정도로 말이다. 본 기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희생자를 교살해서 신체를 절단한 뒤 푹 고아 먹는 놈이 알버트 피시를 위시한 이런 자식보다는 차라리 훨 났다고.... 희생자가 산 채로 공황과 고통을 견디다 죽어가는 건 듣고 있는 나도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말이다. 젠장...  

유죄평결에 어필하는 번디

테드 번디는 1978년 도주 2년 만에 붙잡혀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살해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고 배심원은 유죄를 인정했다. 이후 항소하여 일단 처형일을 미루고, 이번에는 유죄를 시인하며 '정신이상'을 주장했다. 6년 여의 공방 끝에 연방대법원은 항소를 기각했고 1989년 사형이 집행됐다.

그를 향해 온 미디어의 관심은 지대하다.

두 번의 탈옥과 재판정에서 올린 결혼식, 미디어가 좋아할 만한 외모와 지적 능력 등 그의 삶에 있어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여러 모로 주목을 받기에 쉬운 조건들 되겠다. 또, 그 자신, 심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바, 수감 기간 동안 FBI나 검찰 등에 '그린리버 연쇄살인범'의 심리나 양태를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제공하는 등 수사협조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이런 루트를 통해 그에 대한 분석 작업도 활발했던 것이다. 사형 전날 이루어진 한 기독교 단체의 짱 '돕슨 박사'와의 티비 이너뷰에서, 그는 폭력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자신의 범죄 행위에 실제적 영감을 주었다며, 미디어의 폭력물들, 특히 성적인 폭력을 담고 있는 것들이 뭇소년들을 '테드 번디가 되는 길'로 내몰 것이라 말했다 한다. 미국은 아시다시피 사형 바로 전에도 주지사 전화 한 통이면 사면이 된다. 이 자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고.... 경험에 바탕을 둔 진정한 충고였나 아님 주지사의 사면장이었나?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 1960.5.21~1994.11.28)

불우했거나 학대받은 어린 시절만이 연쇄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걸 증명하는 작자가 바로 제프리 다머다. 잘 배운 부모와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해,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최소한 15명을 살해하며 식인행위와 시신뻑킹을 즐긴 다머는 장하게도 '연쇄살인범'의 대명사가 됐다.

주로 젊은 흑인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 후 살해하는 수법을 즐겨 쓴 다머의 아파트에서는 커다란 염산통에 담긴 부패된 주검들이 발견됐고, 냉장고에는 잘려진 머리들이, 촛불 제단 위에는 해골들이 모셔져 있었다. 91년에 집중된 그의 엽기살인 양식을 잠깐 들여다 보면,

일단 게이바 등에서 상대를 꼬셔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야한 비됴 등을 보며 술이나 약물을 하다가 교살한다. 이후 시신을 상대로 성교를 한 뒤, 즉석사진을 찍어 기록. 그담에 상체를 갈라버렸다는데, 다머는 내장의 색채에 열광했고 방금 죽은 시체의 온기에 꼴렸다 전해진다. 그 후에는 각종 화학약품으로 여러 실험을 한 뒤, 염산으로 깨끗이 녹여 아파트 하수구나 화장실에 쏟아 부었다지... 맘에 드는 부위들은 물론 일종의 트로피로서 집에다 보관도 좀 하고 말이다. 성기는 포르말린에 담가두고, 머리는 푹 삶아 두개골이 빠지면 거따가 색칠을 했다나.... 글구 시체뻑킹에 열광하믄 보통 식인행위도 좋아라 한다고 한다. 다머네 집에는 인육을 보다 맛나게 먹기 위하야 각종 조미료와 연육제도 있었다구 한다. 얘네 냉장고가 무자게 유명했다는데, 스테이크감 모냥 썰어 얼린 사람고기가 잔뜩 쟁여있었기 때문이었다나 머라나~~  

   다머의 냉장고를 옮기는 중  

다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을 늘 곁에 두고 싶어 그들의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니까, 두개골 일부를 제거한 뒤 대뇌백질에다가 각종 화학약품을 떨구거나 해서 말 잘듣는 일종의 자동인간장치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었단다. 언제나 거부없이 잘 대주는 섹스 머신... 이 인간의 살인행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잡혀 있던 한 피해자가 용케 탈출해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바로 며칠 전에도 14살짜리 라오스계 소년이 극적으로 탈출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번개같이 나타난 다머가 '19살 먹은 내 앤인데 좀 아프다' 머 이렇게 둘러대니 걍 게이커플의 사정인갑다 하고 경찰아자씨들이 집구경만 하다 돌아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의가 벗겨진 채로 여기 저기 상처입고 공포에 질려 거리로 뛰쳐나온, 코네라크 신타솜포네라는 이름의 그 라오스 소년은 경찰에 의해 다시 다머의 집으로 들여보내짐으로써, 경찰이 두 번째 왔을 때는 이미 살해된 후였다. 아아...

코네라크 신타솜포네

제프 다머는 삼엄한 경비의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정신이상 판정을 호소했다. 15명의 살해혐의 모두가 인정되어 총 936년형, 즉, 감형이 있다해도 영원히 종신형이 되는 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이후,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활약하다가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흑인 동료죄수에게 얼굴이 짖이겨지며 살해당했다. 당 사건은 엽기공력도 공력이려니와, 이혼가정이긴 해도 성장기 피학대 경력이 없고 평탄하게 자란 인간도 잔인한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며 대단한 발견인 양 호들갑을 떠는 학계와 언론계에는 의미가 꽤 크다 하겠다. 해럴드 쉬프먼(Harold Shipman 1946.1.14~2004.1.13) 15명의 환자들을 약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2000년 1월 종신형을 선고받은 영국의 내과의 해럴드 쉬프먼은 2004년 자신의 감방에서 목매 자살할 때까지 살인 동기를 밝히지 않았다. 유죄 또한 인정치 않았고.... 2002년에 나온 보고서에 의하면 그러나 최소 215명에서 최대 459명까지 그에게 희생되었을 거라 추정되는데, 희생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양호한 건강상태를 가진 중년 여성이었다. 환자가 어케 건강하냐구? 영국에 있는 정통한 소식통 P씨에 따르면, 영국의 의료체계는 우리와 많이 달라서 1차 의료기관인 GP(General practice)에 각 지역민들이 등록을 하고 GP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주민들의 주치의가 되어 치료할 거 치료하거나 상급의료기관의 트랜스퍼를 결정한단다.  

쉬프먼은 바로 GP의 의사였다. 즉, 감기 걸려 쉬프먼을 찾아간 환자도 그의 살해대상일 수 있던 거다. 하여 그의 약물살인은 명백한 의지를 가진 범죄가 되는 거고, 주치의와 환자라는 신뢰의 관계가 여지없이 무너진, 가혹한 살해라 할 수 있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전 영국민들이 느낀 충격이 실로 증폭되었던 거고.  

능력 있는 의사였으나 수련의 시절부터 약물 남용에 대한 문제를 지적받던 해럴드 쉬프먼의 살해동기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다만, 희생자들 대부분이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서 어린 시절 암으로 사망한 그의 어머니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흥미로운 점은 '국립의료센터' 회원자격이 유효했으므로, 60세 이전에 죽은 그의 연금을 피부양인인 부인이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쉬프먼은 58번째 생일 바로 전날 자살했다.  



게리 리언 리지웨이, 그린리버 킬러 (Gary Leon Ridgway 1949.2.18~생존)

 

리지웨이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린리버 살해사건부터 말씀드리겠다. 미국 워싱턴주 켄트 지역의 그린 강 주변에서 1982년부터 1984년 사이를 피크로 대략 49건의 사체들이 발견되는데, 당 살해사건의 범인들을 총칭하는 말이 바로 그린리버 킬러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매춘여성 혹은 가출청소년이었다. 자, 게리 리언 리지웨이라.... 82년과 2001년에 매춘관련으로 체포된 바 있는 전직 트럭도장사 리지웨이는 83년에 당 연쇄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87년 경찰이 체모와 타액을 확보는 했으나 디엔에이 분석기술이 도입될 2001년까지 경찰서 증거보관실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드뎌 2001년, 이 증거물들이 리지의 디엔에이와 일치함이 밝혀짐으로써 리지웨이는 체포되어 기소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보다 훨씬 더 전에 발생한 게 그린리버 킬링이다.

어쨌거나, 1급 살해혐의로 기소된 리지웨이는 2003년 5월에 이른바, 플리바겐(Plea bargain)이라는 선고 형량 에누리제도를 통해, 사형을 면하는 조건으로 그간의 살인들을 자백했다. 경찰이 당 연쇄살인의 희생자로 추정한 49명 중에서 42명을 지목했고, 8건의 또다른 살인을 진술했다. 총 48건 되겠다. 그해 12월 킹카운티 상급법원은 리지웨이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매춘여성이었는데 세가지 이유를 대더라. 첫째, 이들 여성을 증오하고 둘째, 차에 태우면 별다른 의심없이 잘 타주고 셋째, 이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금방 수사가 되는 것도 아니며 혹은 수사대상이 되지도 않는다는 점.... 이란다.

48명을 죽인 인간에게 한 두명 죽인 인간보다 더 가벼운 선고가 내려지는 것에 대해 찬반격론이 펼쳐졌으나 결국,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플리바겐이 성사됐다. 진실? 그게 그리 중요하냐구?

그린리버 연쇄살인 희생자 및 실종자들 중에서  

희생자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추가 살인사실을 자백받는 것은 사건이 영원한 미궁으로 빠지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는 점, 그리고 신원미상 희생자들의 신분을 밝혀내고, 실종자명단을 훑어 살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들이 이런 거래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법질서 수호는 차치하더라도, 향후 많이 죽일수록 사형을 안당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만방의 연쇄살인범 혹은 후보자들에게 선언한 이 양날의 에누리는 논쟁적이지 않을 수가 없음이다.

또한 그의 살인행각이 82-84년에 집중됐다가 90년, 98년에 있었다는 점이 열라리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연쇄살인범의 특성상 일케 띄엄띄엄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든 살인을 킹카운티 안에서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할법정 이외의 곳에서 살인을 했다면 그쪽 검사가 공소제기를 할테니 말이다. 그의 플리바겐은 킹카운티 검사하고만 유효하자나. 48건의 자백으로 사형을 면한 리지웨이... 그 어느 연쇄살인범보다 그는 더 지능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