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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맛집

각지역별 음식문화

by 501™ 2015. 2. 10.

식문화 1탄 - 중세시대


식탁에 둘러앉은 귀족 가족들. 스프와 샐러드, 스테이크에 이르기까지 메뉴가 차례로 서빙되고, 각각의 자리엔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습니다. 이세계에서 건너온 우리의 주인공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습니다. 오! 이거 꽤 맛있네요. 풀코스를 대접받은 주인공은 디저트를 먹으며 식사를 마칩니다.


이른바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귀족들의 식사입니다. 하지만 판타지의 배경을 중세(5세기~15세기중엽)시대로 본다면, 당시의 유럽 귀족들의 식사방식은 오늘날과 꽤 달랐습니다. 취향도 많이 달랐구요. 유럽의 식습관이 오늘날과  비슷해진 것은 16~17세기 경 프랑스에서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 입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 귀족들의 식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1. 레스토랑 하면 떠오르는 풀코스 서빙방식은 19세기부터
  보통 우리가 프랑스식 서빙방식이라고 알고있는 <한접시씩 차례대로 서빙하는 방식>은, 사실 러시아식 서빙입니다. 이는 19세기에 프랑스를 통해 각국으로 퍼져나갔지요. 그 이전에는 마치 중국식 식사처럼, 메뉴들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 한꺼번에 식탁에 배치되었습니다. 물론 커다란 식탁에 전부 고르게 요리를 배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석에는 고급요리가, 말석에는 그에 맞는 요리가 배치되었지요. 만약 말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상석에 배치된 요리를 먹고싶다면 시종이 와서 덜어주길 기다려야했고, 사람이 많으면 차례를 기다려야하기에 음식이 식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나 불합리한 방식이지요.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날씨가 매우 춥기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서빙했다간 음식이 기다리고말고도 없이 금세 식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순서에 따라 바로바로 주방에서 한접시씩 준비해오는 서빙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지요. 이게 현재 레스토랑에서 사용되고 있는 풀코스 서빙방식입니다.

2.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외에는 먹을 수 없었다
  밀가루를 사용한 면 요리, 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는 자주 먹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보통 유럽지역에서 밀가루의 용도는 빵과 스튜 정도였지요. 파스타가 유럽지역에 전파된 것은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인 무려 19세기 이후였습니다. 아직 쿠키나 케이크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였기에 당시에는 밀가루를 이용한 요리가 그리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3. 포크? 나이프? 그런거 없다!
  맨손식사 라고 한다면 인도나 동남아 지역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유럽지역도 무려 16세기정도까지는 맨손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식탁엔 늘 손을 씻기 위한 물이 담긴 볼이 있었지요. 앞서 말했듯이 음식은 커다란 접시에 담겨 서빙되었고, 가장 고급이라 할 수 있는 고기요리는 보통 가장 상석에 배치되었습니다. 고기메뉴를 칼로 자르는 것은 굉장한 명예로 여겨졌기에 그 역할은 무조건 그 집안의 가장이나 장남이 맡았다고 하죠. 바꿔말하면 이미 잘라진 고기가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나이프는 큰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숟가락은 2만년전부터 발명된 유서깊은 식기이지만, 중세시대 때에는 국물요리를 뜨는 공용 국자 정도 말고는 스푼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스프는 그릇 채 들고마셨지요. 중세 유럽에서 숟가락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15세기) 입니다. 이는 종교적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성직자들은 음식은 신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져도 되는 것은 인간의 손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포크는 훨씬 더 늦게 전파되었습니다. 면요리는 이탈리아에서밖에 사용되지 않았던데다가, 포크는 무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나마 15~16세기 경에 이탈리아에서 먼저 포크가 사용되었고, 16세기 후반부터 유럽인들이 점차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게 되면서 포크가 서서히 정착되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숟가락과 포크 라는 한 세트가 주어진 것은 18세기 경이었습니다.

4. 많이 먹어야 진정한 귀족이다!
  중세의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을 먹는 것을 전사의 긍지로 여겼습니다. 카를 대제도 매일 야생동물의 꼬치구이를 먹었다고 하지요. 고기를 먹는 방식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육즙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주로 고기를 삶아먹었고, 귀족들은 정체성과 권력의 상징으로 구워먹었지요. 만약 큰 실수를 저지른 귀족에게는 <평생 고기 금지> 라는 벌이 주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고기=귀족 인거죠. 
  또한 귀족들은 많이 먹는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식가가 아닌 자는 권력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유럽신화나 유럽설화에서는 신이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거나 먹기대결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지요. 영주가 뚱뚱할수록 환영받았고, 비만은 부의 상징이었기에 프랑스의 루이6세는 하루에 8번이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5. 색이 강렬하고 느끼할수록 좋다!
  중세의 궁정요리에서 가장 중시되었던건 첫번째가 양, 다음이 색과 향이었습니다. 맛은 논외였죠. 이슬람을 통해 동방의 향신료가 유입되면서, 귀족들은 특히 향신료에 열광하게 됩니다. 재료의 맛을 엄청난 향신료로 덮어버리는 것이 좋은 요리라고 생각되었죠. 게다가 칼라풀하게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여, 온갖 착색료와 향신료로 음식을 범벅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그런 요리가 나온다면? 맛도 완전 자극적인데다가 영양학적으로도 불합격, 색은 원색계열이니 시각적으로도 몸에 안좋아보였겠지요.
  당시의 맛은 단맛, 매운맛, 신맛의 3가지만 취급되었습니다. 짠맛은 단맛과 동일하게 취급되었죠. 짠맛과 단맛이 분리된 것은 위에서 말했던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 입니다. 
  현대인들이 맛있다고 할만한 요리는 15세기 이후 향신료의 유행이 사라지면서부터 입니다.

6. 먹지않는 연출요리, 앙트르메
  색과 향이 중시되었던 시대이니만큼, 먹기위해서가 아닌 장식하기 위해서 요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앙트르메죠. 예를들어 학의 통구이, 빨갛고 하얀 물감을 칠한 고기, 살아있는 새를 가둔 단단한 파이, 와인이 뿜어나오는 분수 등입니다. 부르고뉴 궁전에서는 앙트르메가 십자군 참가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연회에 사용되었다고 하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음식으로 장난치는> 행위였던 셈입니다.

7. 물보단 술을 더 자주 마신 중세인들 
  요즘도 그렇지만,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그다지 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인들은 생수를 잘 마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커피는 18세기에, 차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보급되었기 때문에, 물을 끓여마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뭘 마셨냐구요? 바로 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맥주와 와인은 물 대용으로 취급되었고, 어린이도 맥주나 와인에 물을 타 마셨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살짝 취해있는 상태가 기본이었지요. 목마를때마다 물이 아닌 술을 마셨으니까요. 유럽에서 차와 커피가 환영받았던 것도, 물을마신다=취한다 가 기본 공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마셔도 정신이 멀쩡한 음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옛날부터 깨끗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 축복받은 지역이라 할 수 있었던거지요.

8. 중세시대에서 야채도둑은 죄가 되지 않았다.
  고기가 최고라고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야채는 농민들의 음식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게다가 생야채는 손이 가지 않은 음식이라 하여 경원시되었습니다. 귀족들 중에는 평생 고기만 먹은 사람도 있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따라서 요즘같이 야채를 전문적으로 키워 파는 상인같은건 없었고, 각자 텃밭을 일구어 자기 가족이 먹기 위한 야채를 키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마늘이나 양파 순무 당근 등 유명한 야채 정도를 제외한다면 당시의 야채는 모든 야생초를 의미하였고, 따라서 잡초를 뽑는게 죄가 아니듯 야채를 뽑아가는 것도 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즘엔 서양 음식의 기본 재료라 할 수 있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토마토, 파프리카 등은 전부 15세기 후반에 대항해시대가 되면서 다른 대륙에서 가져온 식재료들입니다.
  귀족들도 제대로 야채를 먹기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로 16~17세기에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라고 합니다.

9. 중세에는 독한 술이 없었다!
  중세시대에 술이라고 한다면 맥주와 포도주, 사과주, 벌꿀주 정도였습니다. 전부 도수가 매우 낮은 술이지요. 오늘날 럼주, 브랜디, 위스키 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증류주는 11~13세기에 이탈리아의 수도원이 포도에서 리큐르를 제조하면서 <생명의물> 이라는 약품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즉 처음에는 술이 아닌 약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던게 15세기가 되면서 점차 유명해지고, 16~17세기에 일반화되게 됩니다. 썩지 않고 알코올도수 대비 부피가 작기 때문에 고가의 상품으로 유통되었습니다. 특히 대항해시대에서 럼주는 장거리항해에 썩지않는 음료로 환영받았지요. 도수가 낮은 술들은 물 대용으로 취급되던 시대에 독한 증류주는 진정한 <취하기 위한 술>로 생각되어졌습니다.
  참고로 동양에서는 서양보다 빠른 시대에 증류주(소주, 소홍주 등)를 만들어 마셨다고 합니다.

10. 그릇은 쓰지않는다. 빵이다!
  중세에서는 접시가 없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유리접시를 썼는데 뭔소리냐! 라고 하신다면, 물론 그들이 접시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사용하지못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던 식기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중세 기독교에서 음식에 그릇을 사용하는 것은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음식을 맨 바닥에 놓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사용한게 <트랑쇼와르>, 바로 그릇 대용의 딱딱한 빵입니다. 일주일간 보관해 매우 딱딱해진 빵이죠. 아 물론, 국물요리를 담는 것은 별개였겠지요. 이건 접시가 아니라 냄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당시의 중세시대에서는 개인마다 음식이 서빙되었던 게 아니라 식탁위에 커다랗게 음식을 차려놓고 거기서 덜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접시가 없기에 개인접시는 사용되지않았고, 국물요리는 트랑쇼와르 위에 덜어낼 수 있도록 걸쭉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음식을 담으면서 점차 축축해진 트랑쇼와르는 다시 새 트랑쇼와르로 교체되었고, 음식 국물이 배어든 트랑쇼와르는 개나 빈민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트랑쇼와르를 베푸는 그릇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지요. 서민의 가정에서는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트랑쇼와르를 식사 가장 마지막에 먹었다고 합니다. 그마저 준비할 수 없는 빈민이라면 그냥 나무판에 먹었을테구요. 
  접시가 보급되기 시작한건 15~16세기부터라고 하네요.

11. 과자의 혁명은 16세기부터
  당시에 과자라고 한다면 프레첼, 비스켓 정도의 구운과자였으며, 빵과 과자는 동일하게 취급되어 빵 직인이 과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자 길드가 만들어진 것은 1440년이었지요. 과자는 14~18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발전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귀족문화의 호화로운 식사에 의해 디저트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과자의 혁명은 16세기에 일어났는데, 그때야 비로소 설탕이 넉넉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설탕이 이슬람에 의해 독점되어 매우 비쌌었거든요. 16세기 이후 설탕이 유행하면서 온갖 과자들이 생겨났고, 단단한 설탕덩어리로 포크나 나이프를 만들어 식탁을 장식하는 유행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어떤가요? 중세시대의 식습관은 현재와 매우 다르지않나요? 판타지 시대에 나오는 식습관을 굳이 역사에 대조해보자면, 중세가 아닌 16~17세기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뭐든 짬뽕가능한게 판타지소설이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원래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먹었나 생각해보면서 판타지소설을 읽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ㅎㅎ



식문화 2탄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1. 대도시의 탄생과 화덕의 발명
  고대 문명 이전에는 부족단위로 살던 인간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 강력한 왕권에 의해 통치되면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마을이 아닌 커다란 대도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동을 위해 대충 지은 집이 아닌 정착하기 위해 흙과 돌로 만들어진 단단한 집이 만들어졌지요. 그 과정에서 흙을 이용한 화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밀을 익혀먹기 위한 요리도구의 시작인 셈이지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각각의 화덕을 발전시켰지만, 현재의 화덕은 메소포타미아식에 가깝습니다. 메소포타미아식 화덕은 돔 모양으로 만들어서 내부에 불을 지펴서 공기를 달군 다음 밀가루 반죽을 놓은 판을 집어넣어 빵을 넣는 구조입니다. 현대 이탈리아식 화덕과 비슷하죠? 이런 화덕을 아라비아어로 타누르 라고 불렀으며 인도식 화덕인 탄두르의 어원이 됩니다.
  그에 비해 이집트식 화덕은 속이 빈 원뿔형으로, 내부에서 불이 지펴져서 원뿔 꼭대기의 구멍으로 열기가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밀가루 반죽을 원뿔 표면에 붙여서 굽는 방식이죠. 말하자면 화덕 자체에 반죽을 붙여서 굽는 방식인데, 이러다보니 이집트의 빵은 오늘날의 빵처럼 둥글고 폭신한 빵이 아닌 납작한 빵이었다고 합니다.

2. 이집트는 빵을 약으로도 사용하였다
  이집트 초기에는 보리(대맥)가 주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보리빵이죠. 보리는 거친땅에서도 잘 자랐거든요. 그러다가 기원전 1500년 쯤에 이집트 문명이 절정기에 달하고, 주식이 보리에서 밀(소맥)로 바뀌면서 빵의 맛이 매우 좋아지게 됩니다. 그 후를 기점으로 여러가지 모양의 빵을 만드는 등 여유도 생기게 되지요. 그러면서 <아, 이런 맛있는 빵을 이용해 몸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시대니까요.
  물론 빵 자체만으로 약으로 쓴게 아니라 약간의 부가재료를 섞어서 처방했지요. 참고로 이집트에서는 발효빵을 먹기도 하였지만 이집트식의 화덕으로는 발효빵을 굽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무발효빵이 주류였습니다. 발효빵은 왕궁에서 주로 먹었다고 하지요. 
 이집트식 빵치료법 몇개를 써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골절 : 부위에 따른 종류의 빵 + 그에 따른 야채나 과일
 - 탈모나 비듬 : 시큼한 소맥빵
 - 황달 : <스토> 라는 이름의 빵
 - 화상 : 소금 + 기름 + 보리
 - 몸의 내부에서 생기는 병 : <치리스티> 라는 이름의 빵

3. 하이에나는 아주 맛있는 단백질원이지요!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매우 비옥한 토지를 갖고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가축과 들짐승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금기시했던 것은 돼지와 숫염소로,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가축을 기른다 하여도 고기는 귀했고, 신에 대한 숭배가 더욱 강하던 시기였기에 고기는 먼저 신에게 바쳐진 뒤 먹었습니다. 한번에 먹을 수 없는 고기는 냉장고가 없던 시대다보니 소금에 절였으며 소세지같은걸 만들기도 했다는 듯 합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새고기를 매우 좋아했으며, 이집트 벽화를 보면 새를 사냥하는 가족그림이 종종 등장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하이에나는 진미였다고 하네요. 

4. 육류는 상류층, 어패류는 서민층
  고기는 값이 비싸 주로 귀족들이 먹었다보니, 서민들이 먹는 고기는 주로 생선이었습니다. 이집트는 바다와 가깝고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에 생선을 구하기는 쉬웠거든요. 오히려 너무 쉽게 잡혔기때문에 생선은 값이 매우 쌌고, 딱히 보존할 필요도 없다보니 생선 가공방법도 별로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집트는 신화적으로 물고기가 부정하게 여겨졌기 때문에(선한 신 오시리스가 악신 세토에 의해 전신이 조각나 나일강으로 흩어졌고, 물고기가 그 조각을 먹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신관들은 물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5. 멈추지않는 힘! 어니언자이저!
  이집트의 노동자들이 노예취급이 아닌 정당한 보수를 받으며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것은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엄청난 무게의 돌덩이를 옮기며 피라미드를 만들어야했던 건 사실입니다. 고기도 충분히 먹지 못하던 때에 뭘 원동력으로 삼았던 걸까요?
  바로 고대문명의 에너자이저, 양파였습니다. 고대문명에서 대표되는 야채는 파, 양파, 마늘인데, 이집트에서는 양파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양파는 마력이 있는 야채로 취급되었으며, 신성화되었다고도 하죠. 축제때에는 목에 양파를 걸고 냄새를 맡기도 하였고, 무언가 맹세할 때에는 그 기간동안 양파를 끊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의 치킨사랑보다도 훨씬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현대인이 고대 이집트로 시간이동을 한다면, 아마 도착하자마자 마을에 가득 차있는 양파냄새부터 맡아야 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양파는 약이 된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분야에 처방하였습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양파 치료법 몇개를 써볼게요.
 - 냄새를 맡는다 : 시력회복, 수면유도 효과
 - 빵과 함께 먹는다 : 구내염에 좋다
 - 식초, 벌꿀, 와인에 섞는다 : 치통, 개에 물린 상처에 좋다
 - 삶은 양파 : 이질, 요통에 좋다
 - 좌약(...)으로 사용한다 : 치질에 좋다
 - 여성에게 먹인다 : 불임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6. 조미료는 꿀과 돌소금이 최고!
  이집트는 향신료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짠맛을 내기 위한 소금이 전부죠. 바다와 사막이 공존하다보니 바다소금과 암염을 둘 다 채취할 수 있었는데, 위에서 말했던 악신세토 신화의 이유로 바다의 소금은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암염을 더 가치있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미이라를 제조할 때에도 돌소금만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단맛은 당시에는 매우매우매우 귀한 맛이었는데, 사탕수수가 없었기 때문에 과일을 제외한다면 단맛이라곤 꿀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호복을 만들 기술도 없던 시대에 벌집 채취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죠. 따라서 꿀은 진짜 특정계층밖에 얻을수없는 초 귀중품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서민들은 단맛을 얻기 위해 메뚜기콩 이라는 당도가 높은 콩을 먹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벌집에서 나오는 밀랍은 미이라를 제조할 때 사용되었다고도 하네요.

7. 이집트에서는 무슨 야채를 먹었을까?
  이집트는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지대를 중심으로 매우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현대와 비슷할정도로 많은 야채가 재배되었습니다. 주요 야채는 양파, 부추, 당근, 래디쉬 등이었으며, 그 외에 양배추, 수박, 오이, 호박, 멜론, 샐러리 등을 재배했습니다. 상류계층은 자신의 정원에서 다양한 야채를 재배하였으며 서민들은 쉽게 잘자라는 콩류를 재배하여 먹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외에 자생하는 파슬리를 <사막의 샐러리> 라고 부르며 매우 좋아했다고 하네요.
  또한 연근도 매우 대중적인 야채였습니다. 삶거나 구워먹었다고 해요. 종이의 원료로도 유명한 파피루스는 당분과 유분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냥 먹거나 조리해먹어도 매우 맛있는 식재료였습니다. 워낙 먹어대고 종이로 써대서 현재 파피루스가 거의 멸종위기라고도 하지요.
  사막지형이기에 과일은 야채보다 고급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사막에서도 잘 자라는 대추야자와 무화과 등을 주로 먹었습니다. 석류나 사과, 올리브 등은 지중해를 통해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과일이었지요. 감귤류나 복숭아, 배 등은 당시의 이집트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8.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파, 양파, 마늘만 있으면 돼!
  이번엔 4대문명 중 중동지역에서 번성하였던 메소포타미아에 대해 알아볼까요? 사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에 비해 기록이 극단적으로 적은편입니다. 이집트는 아직도 살아있지만, 메소포타미아는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깔끔하게 멸망하고 그리스문화가 유입되면서 메소포타미아 고유의 건축양식이나 식문화가 사라져버렸거든요. 게다가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는 달리 소금기가 많은 염해 주변에서 시작되었기때문에, 사람이 거주하면서 꾸준히 관리해주지 않으면 금세 땅이 소금기를 띠어 황폐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명이 멸망하면서 일손이 줄어들자 유령도시화 되어 버린 것이지요. 문명을 기록해놓은 전승도 그다지 많지않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생활상은 출토품을 기반으로 단편적으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먹었던 야채에 대한 기록도 출토된 점토판에 기록된 레시피에 의한 건데, 20여종의 요리 전부에 파, 양파, 마늘 중 한가지는 꼭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의 교역기록에도 이 3가지 야채가 대량으로 유통되었다고 써있지요. 메소포타미아의 슈수엔 왕녀(기원전 2030년 경)는 타국으로 여행할 때 양파와 마늘을 각각 35kg씩 가져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순무나 양상추, 호박 등도 먹긴 했지만 대부분 끓이는 요리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끓이는 요리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야채를 으깨서 끓이거나 빵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만드는게 유행이었거든요. 
  한편 빈곤층은 콩을 주로 먹었습니다. 주로 병아리콩을 먹었으며 으깬다음 뭉쳐서 빵처럼 먹었다고 해요. 그러나 농촌에서 살고있는게 아니라면 신선한 야채를 먹기 힘들었기 때문에 비타민 부족으로 병에 자주 걸렸다고 합니다.

9. 물론 고기도 충분히 먹었어요
  메소포타미아는 앞서 말했듯이 땅에 염분이 많기 때문에 농지에 적합하지않은 황무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장소를 이용해 양과 염소가 사육되었지요.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주로 먹는 고기는 바로 양고기와 염소고기였으며, 양고기가 가장 맛있는 고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라고 생각하였고, 말, 개, 뱀은 금기가 있어서 먹지 않았습니다. 물고기는 이집트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는 고기였지요. 바다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다랑어와 같은 바다어류는 다른 민족과의 무역을 통해 얻었습니다.
  요리방식은 야채와 마찬가지로 끓여먹는 방식이 주류였습니다. 주로 지방을 듬뿍 녹인 스튜를 선호했다고 하네요. 거기에 야채나 양념을 더하기도 하고, 밀가루를 반죽해 넣어 수제비처럼 해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10. 대추야자는 신의 선물!
  열대지방 하면 떠오르는, 커다란 키에 꼭대기에만 방사형으로 삐죽삐죽 커다란 나뭇잎이 달린 나무를 기억하시나요? 지중해 유럽인들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이 올리브라면,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은 바로 대추야자였습니다. 소금기가 많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쉽게 자랐으며, 더위에도 강하고 키가 25m에 달하여 매우 크기 때문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였죠. 나무는 껍질에서 잎사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대추야자열매는 술이나 시럽, 빵 등에 사용되며, 그대로 먹기도 하죠. 또한 야채재배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사실 덥고 건조한 메소포타미아의 기후는 양파 등의 야채재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대추야자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면 그 그늘에서는 야채재배가 가능하였죠. 그래서 대추야자나무는 <생명의나무>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존재다보니 그 유명한 함무라비법전도 대추야자 과수원을 보호하는 법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11. 맥주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하였다!
  맥주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작은 메소포타미아가 먼저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맥주를 매우 좋아했는데, 삼시세끼 식사와 함께 맥주를 마셨으며 여행을 갈 때에는 맥주빵을 가져가 물에 담가서 간이 맥주를 만들어 마셨을 정도입니다. 맥주빵이 뭐냐고요? 그때에는 발효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맥주처럼 따로 맥주용 호모를 만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밀가루로 밧피아 라고 하는 맥주빵을 만들었고, 그것을 부숴서 물과 섞은 뒤 자연발효가 되길 기다려 맥주를 만들어 먹었지요. 
  물론 당시의 맥주는 지금것과는 맛이 전혀 달랐습니다. 떫은맛이 강한 탁주로 알코올도수는 지금의 맥주보다도 낮고 위에는 밀기울이 떠있었습니다. 그냥 마실수는 없었기 때문에 빨대를 꽂아 마셨지요. 고대문명에서 출토된 맥주용 빨대를 보면 끝부분에 거름망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밀기울을 걸러내기 위한 장치였던 거지요. 
  메소포타미에서 맥주는 문명의 증거로까지 생각되었으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빵을 먹는 법이나 맥주 마시는 법을 모르는 자>를 미개인으로 취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을 마시느냐 맥주를 마시느냐가 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였던 거지요. 이러한 맥주사랑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선술집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당시의 선술집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함무라비 법전에 그에 따른 법률이 기록되어있을 정도였습니다. 선술집의 주인은 보통 여성(가정에서 술을 만드는 담당이 주로 여자였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이 선술집을 맡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었으며, 선술집은 여관이자 창관(몸파는 곳)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또한 선술집은 대화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온갖 행상인들과 범죄자, 술꾼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였지요. 즉 판타지소설에서 흔히 볼수있는 주점겸 여관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선술집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 맥주만 만든 줄 알았지? 와인도 메소포타미아가 먼저다!
  놀랍게도, 맥주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와인을 최초로 만들어낸 것도 메소포타미아였습니다. 그야말로 술의 시작을 이끌어나간 선구문명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물론 과실주 자체는 그 전부터도 있었습니다만 포도를 사용하여 와인을 만들어낸 것은 메소포타미아가 최초죠. 기원전 4000년의 수메르 유적에서 와인용 항아리 뚜껑이 출토되고 있으며, 예상으로는 기원전 6000년부터 만들어 마셨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맥주와 마찬가지로 으깬 포도과육이 들어간 탁주였지만 점차 천으로 찌꺼기를 걸러내고 벌꿀을 더해 발효를 촉진하는 등 세련되게 변했다고 합니다. 와인이 절정기를 맞이했던 것은 기원전 2000년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포도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상류계층만 즐겨먹는 사치품이었습니다. 이후로 이집트에도 와인이 알려져서 이집트의 상류계층도 와인을 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서민들은 주로 맥주와 함께 대추야자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식문화 3탄 - 그리스 로마 문명 (1부)


1.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없었으면 그리스 문명도 없었다!
  로마가 번영하기 전에 빛나는 문화를 이룩했던 그리스. 신들의 땅 올림푸스로 유명한 그리스지만, 사실 그리스의 초기 식문화는 매우 소박했습니다. 그리스는 도시국가들의 동맹으로 만들어진 나라였는데, 땅덩이도 좁은 데다가 매우 척박하여 당시에 번영하고 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식재료를 풍부하게 얻기 힘들었거든요. 그나마 쉽게 얻을 수 있었던게 지중해기후에서 잘 자라는 포도와 올리브였습니다. 넉넉한 식물을 재배하는 이집트에서도 소박하게 먹고 있는 판국에, 그리스라고 다를 건 없었던거죠.
  땅에 평지가 적고 척박하다보니 주식인 밀류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밀류를 수입하기 전에는 포도나 무화과를 말린 것, 견과류 등으로 연명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과일류를 주식으로 삼아버리면 수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충분한 칼로리를 얻기전에 물배가 차버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일을 건조해서 먹은거지요. 하지만 보통 곡류의 섭취는 문명 성장의 분기점이 됩니다. 곡류가 있어야 탄수화물을 통해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거든요. 또한 식재료의 저장과 보관이 쉬워지고, 식문화가 발달하여 인구수도 쉽게 증가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에게 있어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은 이후 그리스의 성장이 달린 필수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다른 문명들보다 일찍부터 교역에 힘썼고, 기원전 1000년 경부터는 올리브와 와인을 팔게 되면서 꽤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그리스의 시작은 상업국가인 셈이지요. 와인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고급주류로 취급받으며 비싼가격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저번 글에서 보셨었지요? 와인의 시작은 메소포타미아였지만 지중해의 기후는 고품질의 포도를 생산해주기 때문에 그리스의 와인은 매우 인기리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가 얼마나 교역에 힘썼는지는, 당시에 사용했던 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주로 사용했던 교환재는 은인데, 오늘날처럼 100원 500원 하는식으로 금액이 정해졌던게 아니라 무게를 달아 그 무게만큼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은덩어리 만으로는 이게 어느정도의 무게인지 알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만들어진게 일정 무게만큼 떼어낸 은조각에 인장을 찍어서 이 무게만큼의 가치임을 증명하는 은화 였던거죠. 무게가 중요했기 때문에 모양은 일정하지 않았고 납작하고 울퉁불퉁한 은덩어리 전면에 자기 국가 나름대로의 문양이 찍혀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의 올빼미> 로 유명한 올빼미 도안을 은화에 찍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그리스의 교역이 활발하다보니, 이 은화가 지중해 유럽 온 구석구석 퍼지게 되었던 거죠. 딱히 화폐 인쇄권한 같은게 없던 시대였기에 다른나라들도 자기 은화로 그리스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자기네 은화에 올빼미 도안을 사용하게 됩니다.(다른나라가 올빼미 도안을 써서 은화를 사용했다 해도, 결국 무게만 같으면 되는거니까요) 그래서 당시 지중해 국가들의 은화들을 보면, 죄다 올빼미 도안으로 통일되다시피 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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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에서 사용된 올빼미 은화 )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다시 식문화로 넘어가서,
  교역을 통해 그리스가 먼저 입수했던 곡류는 보리(대맥)였습니다.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곡류의 입수가 늦었기 때문에, 빵도 아직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리스에서 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려 기원전 5세기부터라고 하지요. 그 전까지는 보리와 깨, 콩 등을 빻아서 죽을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보리죽은 현재의 그리스에서도 간단한 식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대두를 빻아 만든 가루에 민트를 섞은 <큐케온> 이라는 음료를 주로 마셨고, 보리를 끓인 <프티네사>(아마 우리나라의 보리차와 가깝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꿀물과 같은 <메리드라톤> 이라는 음료도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땅이 좁았기 때문에 방목을 할 여유가 없어 고기는 귀했습니다. 가축이 있긴 했지만 소는 노동력, 양은 털을 얻는데 사용되었죠. 그리스에 고기가 넉넉히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올리브와 와인을 팔면서 부터지만, 당연히 그러한 이익은 서민이 아니라 귀족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서민들은 고기를 접하기가 힘들었지요. 그리스에서 주로 먹은 야채는 콩, 깨 마늘, 양파, 크레송, 순무, 양상추 등이었고, 지중해 바로 옆이었기에 어패류는 매우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2. 변화하기 시작한 그리스 요리
  나라가 풍요로워지고 기원전 5세기 경에는 그리스에 빵집이 탄생하면서, 그리스 요리는 매우 다양해지게 됩니다. 요리의 폭이 넓어져서 올리브유를 사용한 튀김, 고기류도 자주 먹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고기요리로는 소 등의 가축을 이용한 꼬치구이, 피가 들어간 소시지, 내장구이 등이었다고 합니다. 식사도구로 국물요리에는 숟가락을 사용했고, 그 외의 음식은 손으로 집어먹었습니다. 고기요리는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져 나오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나이프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식사로 더러워진 손은 <아미론> 이라는 밀가루 반죽으로 닦았고, 사용한 아미론은 바닥에 버려 개나 고양이가 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는 <식탁의 현자들>이라는 자료에는 <참치 소금구이>, <장어찜 구이>, <비늘돔의 치즈와 올리브유 구이> 등 지금봐도 세련되어보이는 생선요리 레시피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바다국가라 생선은 오래전부터 먹었다보니 요리방법이 꽤나 발전했던 거지요. 심지어 식민지 시라쿠사에는 <라프뒤고>라는 미식가가 세계 최초의 요리학교를 세웠다고도 합니다.

3. 로마가 유럽 문화의 조상이라고? 나는 로마의 스승이다!
  그리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을때, 로마는 아직 변방의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딱히 화려한 문명이랄게 없었죠. 사실 로마제국의 화려한 번영은 로마 자체의 기술이 아닌, 전부 다른 나라로부터 흡수한 기술들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 문화의 시초가 되었던 것은 바로 에트루리아 였습니다. 로마의 문화가유럽 문화들의 기둥이 되었다면, 에트루리아는 그 기둥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에트루리아는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지 중 하나였으며 그들의 빵가마는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는 피자용 화덕의 선조였다고 합니다. 또한 고기를 굽기 위한 회전꼬치를 발명한 것도 에트루리아이죠. <로마의 귀족> 이라고 한다면, 어깨에 둘러진 긴 토가를 입은 채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접시에 놓여진 과일을 나른한 포즈로 하나하나 집어먹는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사실 토가도, 비스듬히 눕기 위한 긴 의자도 전부 에트루리아의 문화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의자에 누워 음식을 먹는게 연약하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습관을 받아들였다죠. 해보니까 편했나봐요.
  에트루리아는 고기를 즐겨먹었으며, 허브로 향을 내어 구워먹었다고 합니다. 요즘엔 흔히 키우는 닭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는데, 기원전 7세기 경에 지중해에 전해졌지만 18세기 전까지는 매우 귀했다고합니다. 그 점은 저번 중세때에도 설명했었지요. 에트루리아인들은 연회를 자주 열었는데, 음악에는 마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하는 주방에 악사가 들어가 음악을 연주했다고 해요. 또한 연회를 열 때에도 악사를 불러 먹으면서 음악을 즐겼다고 합니다. 요즘엔 레스토랑에서도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게 기본이지만, 그 최초의 시도는 에트루리아였던 셈이지요.
  한편 당시의 로마인들은 작은 도시국가였던데다가 주식은 누에콩이들어간 밀죽, 올리브유를 뿌린 생야채 정도였습니다. 에트루리아에 비하면 미개인에 지나지않았죠. 하지만 그 식사는 밸런스가 있었고(누에콩=단백질, 밀죽=탄수화물, 야채샐러드=비타민+식물섬유), 로마민족인 라틴족은 몸이 작고 야무지기때문에 싸움에 능했죠. 그래서 로마인들은 점차 주변에 전쟁을 걸어 땅을 넓혀가게 됩니다. 그리스와 에트루리아도 결국 로마에 먹혀버리게 되고, 그들의 선진 문화를 흡수한 로마는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게 되죠. 그리고 부유해진 로마는 점점 미식을 추구하게 됩니다.

4. 로마에서 공짜로 아침을 먹는 방법은?
  로마인들은 아침을 매우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아침식사는 매우 간소한 편이지요. 오히려 로마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 사람들을 교양이 없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먹는 식사를 <이엔타쿰>이라고 불렀는데, 메뉴는 보통 빵과 치즈, 과일 약간 이었습니다. 우유나 와인에 빵을 적셔 먹기도 했다고 해요. 집에서 먹지않는 사람들은 식당에서 먹거나 노점에서 사먹었는데, 당시 로마의 학생들은 새벽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길에 노점에 들러서 간단한 아침을 사먹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벌꿀이나 나무열매, 치즈가 들어간 롤빵과 파이 같은 것들을 주로 사먹었다고 합니다.
  서민들이라면 <파트로누스>의 집에 가면 <스포트루라>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포트루라>는 빵과 치즈, 과일 등 간단한 아침식사가 들어있는 바구니였는데, 바로 먹어도 되고 팔거나 교환해도 괜찮았습니다. <파트로누스>란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을 뜻하는데, 로마에서는 귀족이 시민들을 부양하는게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제 인 셈이지요.(물론 그것은 소수가 다수를 부양해도 별 부담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큰 빈부의 차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점심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먹거나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저녁 외에는 가볍게 먹는 게 상식이었거든요. 

5. 공중목욕탕은 씻는 곳이 아니라 노는 곳!
  로마인은 보통 하루 3회 식사를 했는데, 그 중 하루에 한번은 <케나(정찬)> 라고 하여 제대로 된 풀코스 식사를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이 케나가 점심식사였지만, 아무래도 낮엔 더워서 식욕이 없어지다보니 곧 저녁식사로 바뀌었습니다. 점심식사는 <브란디움>이라고 불렸지요. 점심 메뉴는 빵이나 죽, 차가운 고기나 생선, 전날 남은 음식, 계란, 과일 등이었으며, 집에서 요리하지않고 식당에서 사먹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오후에 <시에스타> 라고 하여 낮잠을 자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낮잠을 자고 난 이후에는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공중목욕탕은 단순한 목욕탕이라기보단 현대의 찜질방에 가까웠으며 마사지실, 게임판, 운동설비 등이 갖추어져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공원같은 장소였던 셈이지요. 음식도 사먹을 수 있었는데, 주로 비스켓, 기름에 튀긴 스낵, 야채 마리네, 말린과일, 고기완자, 소시지 등을 팔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중목욕탕은 사실 즐기기만 위해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보니, 시민들은 공중목욕탕에서 부자와 친해져 케나에 초대받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케나에 초대받을때까지 계속 목욕탕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투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의원들은 나름대로 시민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지명도나 인기를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6. 세련된 로마 귀족이라면 누워서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시 로마 귀족들에게는 누워서 먹는 것이 귀족의 특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른바 <트리클리니움>이라고 불리는 긴 의자를 사용하였는데, 이 의자는 가로로 길쭉하면서 폭도 널찍하고 등받이가 없는 평상 모양의 의자였습니다. 누울때 불편하지 않도록 푹신한 쿠션이나 깔개가 깔려있었구요. 이 의자 3개를 의자와 비슷한 높이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배치한다음, 비스듬히 누워서 가운데에 놓여진 음식을 집어먹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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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에 나온 트리클리니움. 가운데 테이블을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로마 귀족처럼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구요? 먼저 왼쪽 어깨를 아래로 하여 누운 다음 왼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가져다 먹으면 됩니다. 이제 당신도 훌륭한 로마 귀족이 될 수 있어요. 오래 그 자세를 하고있으니 팔이 저리다구요? 누워서 먹으니 소화가 안될 것 같다구요? 참으세요. 원래 귀족은 그런거에요.
  위 사진은 영화라 그런지 좀 작은 트리클리니움을 사용한 듯 하지만, 보통 한개의 트리클리니움은 3인용이었습니다. 즉 한 테이블에 최대 9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었던 거지요. 따라서 케나에 참가가능한 사람은 많아야 9~10명 정도였습니다. 좌석에는 상석과 하석이 있어서 그 위치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참석자가 화를 내고 돌아가버릴 정도였습니다. ㄷ자 위치 중 가운데 부분이 가장 상석으로 <집정관의 자리> 라고 불렸으며 사진상의 금발녀가 앉아있는 자리입니다. 보통 집주인이 아니라 초대한 손님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 앉았다고 합니다. 만약 여자가 손님일 경우엔 여자는 눕지 않고 앉아야했습니다. 즉 저 영화는 조금 고증이 잘못된거죠.
  게다가 복장도 엄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토가라고 하는 옷인데, 보통 로마 귀족 하면 떠오르는 천을 둘둘 감은 것 같은 의상이 바로 토가입니다. 이른바 현대의 정장과 같은 옷인 셈인데, 길이가 키의 3배나 되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거웠다고 합니다. 
  요즘 이런식으로 연회 한번 했다간 한번만으로도 진이 다 빠져버렸을 것 같네요.

7. 로마식 풀코스는 어땠을까?
  이렇게 먹을 준비가 다 되면, 이제 식사가 시작됩니다. ㄷ자형 배치에 누워서 먹다보니 가운데에 많은 음식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서양 코스요리처럼 음식이 담긴 접시가 먹는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놓여졌습니다. 물론 손으로 집어먹는 거니 개인접시 같은 건 필요 없었겠지요. 
  일단 시작은 식전주로서, 와인이나 허브가 들어간 벌꿀주 등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삶은계란(당시엔 닭과 계란이 귀했습니다)인데 여기에 가름(생선젓갈의 일종)을 뿌려 먹었습니다. 계란은 전채와는 별개의 코스로서 만찬을 시작할 때 반드시 가장 먼저 먹었다고 합니다. 그다음 두 차례에 걸쳐 전채(애피타이저)가 나오는데, 첫번째의 전채는 보통 굴, 문어, 야채 등을 사용한 마리네(생선, 고기, 식초, 기름, 향미료 등을 섞어서 담은 요리)였습니다. 또는 양파, 컬리플라워, 버섯, 아스파라거스, 식용달팽이 등을 조리하여 내오기도 하였지요.   두번째의 전채는 그리스인들이 좋아했던 요리인 산쥐의 벌꿀요리가 나오거나, 후추가 뿌려진 게나 새우, 가재로 만든 경단이 나왔습니다. 참고로 요리에 사용된 산쥐는 흔히 말하는 시궁쥐 같은 쥐랑은 좀 다르고, 굳이 비교하자면 기니피그 같은 뚱뚱한 쥐로 당시 유럽에서는 꽤 인기있는 식재료였습니다. 그리고 후추는 인도에서 수입하였는데, 엄청나게 비쌌다고 합니다.
  전채가 끝났으니 이제 메인요리를 먹어야지요. 보통 로마요리의 기본은 구이, 올리브유를 사용한 튀김, 찜 등이었습니다. 첫번째 메인요리는 생선이었는데, 광어, 숭어, 철갑상어, 굴, 문어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얘기를 할 때에는 고기는 귀족이 먹고 생선은 서민이 먹는다고 말했었지만, 로마시대에서는 고기와 생선은 동급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물론 절인 생선이 아닌 신선한 생선이요. 
  두번째 메인요리는 드디어 고기요리입니다. 멧돼지 통구이가 많았고, 어린 양이나 어린 염소 고기가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3세기까지는 소를 죽이는 게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았었지만, 나라가 커지고 부유해지면서 소고기 요리도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두번째 메인요리까지 먹으면 이제 손을 씻으러 갑니다. 다 끝났냐구요? 아니요, 이제 디저트를 먹어야지요.
  기름기가 묻은 손을 씻고나서 다시 자리에 모였으면 이제 디저트가 나옵니다. 보통은 사과가 나오는데, 사과가 없으면 다른 과일이 나오거나 밀가루와 우유를 반죽해 구워 꿀을 바른 <포카치아> 라는 과자가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인들은 식사의 마무리는 사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계란에서 사과까지> 라는 속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채에 이어서 생선요리, 고기요리, 후식에 이르기까지, 요즘의 프랑스 정식 풀코스와 많이 비슷하지요? 사실 로마의 케나는 프랑스 풀 코스 요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중세보다도 현대식 코스요리와 닮았죠. 중세에 게르만식이 되면서 다르게 바뀌었다가, 음식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요리사들이 로마의 방식으로 다시 회귀하였던 거죠.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배가 부르면 토하고 다시 먹는다> 라는 행위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 다만 자주 있진 않았고 월 1~2회 정도였는데(요즘 기준으로는 충분히 자주이지만), 이는 먹을 게 썩어넘쳐서 더 먹고싶은 귀족들의 몸부림이 아니라 일종의 건강비결이었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두번씩 토해주는게 몸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류층 사이에서 예의범절로 취급되었다고 하네요. 토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거나 했던 것은 아니고 구토 효과가 있는 약초를 사용하였습니다.

8. 우리는 젓갈뿌려 먹는다!
  중세인들에게 향신료가 있었다면, 로마인들에겐 만능조미료 <가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 만들어져 전해진 조미료인데, 그리스에선 <가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서양인들은 한국의 생선젓갈이나 홍어회만 봐도 질색하지만, 사실 자기네 문화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로마에서는 생선젓갈을 더 자주 먹었었습니다. 그게 바로 가름이죠. 이 가름은 과연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먼저, 생선을 햇볕에 썩힙니다. 초고급에서 가정용에 이르기까지 워낙 질이 다양했기 때문에 재료에도 온갖 생선들이 사용되었지만, 보통 청어, 고등어, 연어 등의 기름기 많은 생선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 참치, 가다랑어, 도미, 굴 등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생선이 적당히 썩었으면, 30리터 용량의 항아리에 허브, 썩은 생선, 소금을 2cm 정도 씩 깝니다. 그리고 그 3가지를 번갈아가면서 꾹꾹 눌러 쌓아줍니다. 그래서 항아리가 꽉 차면 뚜껑을 덮습니다. 허브에는 보통 회향, 샐러리, 민트, 코리앤더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항아리를 이제 7개월(!)동안 냅둡니다. 그 후 20일동안 내용물을 섞어주면서 숙성시키면 완성! 항아리 위에 떠있는 액체만 걸러내면 바로 가름이 됩니다. 가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는 <아렛크>라고 하여 가난한 가정에게 식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만드는 중에 지독한 악취가 나기 때문에, 시내에 가름 공장을 세우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름은 로마인들에게 매우매우 사랑받았고, 부자들은 소금보다도 더 자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중세 귀족들의 요리가 향신료 범벅이라면, 로마 귀족들의 요리는 젓갈 범벅이었던 셈이지요.(자 이로써 중세에 이어 로마요리에 대한 환상도 함께 깨졌군요) 로마 병사에게는 가름에 물을 탄 <히드로가름> 이라는 음료(간단히 말하자면 젓갈에 물탄거... 벌칙음료인가?)가 배급되었고, 와인에 가름을 넣은 <오에노가름>은 로마 멸망 후 동로마에서 귀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잘 만든 가름은 상당히 비쌌는데, 로마인들은 각지에 가름공장을 세워 가름을 수출함으로써 부를 쌓았다고 합니다. 고급 가름은 향수와 비슷한 가격이었는데 현재 시세로 따지자면 3리터에 700만원 정도나 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최고급 가름 중 하나로 알려진 <하이마티온>은 다랑어의 내장, 아가미, 피와 체액을 재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가름이 조미료 외에도 영양제나 약품으로서의 효능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미용수로도 인기가 있었는데, 실제로 가름에는 위장조정작용, 강장작용이 있고 비타민B와 미네랄이 풍부했습니다. 중세때 사치의 대상이던 향신료가 향 빼고는 별로 이로운 게 없었던 데 비해, 가름은 원래 발효식품이다보니 몸에는 좋았겠지요. 단 발효식품 특유의 퀘퀘한 냄새가 났을 거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지요. 귀족들은 소금대신 가름을 먹었을 정도였으니, 현재 우리 몸에서 마늘과 김치냄새가 나듯이(우리는 잘 모르지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을 만나면 그렇게 느낀다고 하죠) 로마인들의 몸에서는 젓갈냄새가 났었을 듯 하네요.


9. 로마 제국에서는 무슨 요리를 주로 먹었을까?
  로마가 제국이 되고 매우 부유해지면서, 로마귀족들은 점점 더 미식가가 되었습니다. 온갖 비싸고 희귀한 재료들을 수입하였고,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을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죠. 돼지를 더럽다고 싫어했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로마에선 돼지고기도 매우 좋아했는데, 주로 쪄서 먹었다고 합니다. 이렇가 하면 돼지고기에 양념국물이 스며들어서 부드럽고 맛있어지죠. 오늘날로 말하자면 중국의 <동파육>같은 느낌이랄까요? 또한 햄(돼지고기 허벅지살을 훈제한 것)도 먹었는데, 이는 북쪽의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인이 만든 것을 수입하였기 때문에 비쌌다고 합니다.
  우유는 마시기보단 주로 치즈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치즈는 정찬 코스에서 그대로 먹기도 하고, 훈제하거나 요리에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치즈 요리로는 치즈에 말린과일과 와인을 곁들여 가열하는 <이포트리마>, 치즈를 갈아서 마늘과 스파이스를 섞은 <모리튐> 등이 있었습니다.
  새고기도 매우 좋아했는데, 가금류(가축으로 키우는 새)는 물론 지금은 잘 먹지 않는  타조, 부엉이, 앵무새 등도 먹었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시대의 유명한 미식가이자 요리사인 아키피우스는 <커스터드 푸딩>을 발명하기도 했지요. 어류로는 다랑어, 숭어 등을 먹었고, 특히 다랑어는 비싸게 취급되었습니다. 로마는 따뜻한 지방인데다 냉장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생선류는 보통 소금절임으로 만들어지는게 기본이었지요. 조개류도 옛날부터 많이 먹었지만 생선보다 더 잘 썩기 때문에 내륙지방에서는 잘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굴을 매우 좋아했기때문에, 로마 군대에 소금에 절인 굴이 납품되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당시엔 생굴을 주로 박하와 파슬리가 들어간 벌꿀에 담가서 먹었다고 하네요. 어류 외에 성게, 오징어, 대하 등도 먹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조미료로는 졸인 포도즙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향신료나 허브로 후추, 커민, 코리앤더, 샐러리, 사프란, 파슬리 등이 사용되었지요. 당시에버터도 있었지만 싼 기름으로 취급되었고, 주로 올리브유를 선호했습니다. 소스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향신료나 허브 등을 섞어 소스를 만들었으며, 벌꿀을 섞은 양념을 생선이나 햄에 발라 요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0. 먹기위해 키워진 로마의 가축들!
  이렇게 요리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먹기위해 다양한 가축들을 키우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산쥐>입니다. 기니피그같은 통통한 체구를 가진 쥐인데, 당시 유럽인들이 매우 좋아하던 식재료였죠. 1부 풀코스편에서도 얘기했지만 산쥐의 벌꿀요리는 전채의 기본 메뉴였습니다. 산쥐는 매우 흔했기 때문에 산에 가도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굳이 사육하여 키운 이유는 겨울에 동면을 하면서 살이 빠져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면을 방지하고 살찌워서 양질의 고기를 얻을 수 있도록 일부러 양식을 했던 거지요. 산쥐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리라리움>이라고 하여 내부가 나선형으로 되어있는 특수한 항아리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산쥐는 중세 유럽에서까지도 즐겨먹었지만,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기피하게 됩니다. 다른종류이긴 하지만 어쨋든 쥐다보니 흑사병을 퍼뜨리는 시궁쥐와 닮았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사육하던 산쥐들이 모조리 버려지게 되었고, 숲으로 도망친 산쥐는 유럽대륙에서 다시 야생화되었습니다.
  가금류 중 거위는 고기 외에도 간(푸아그라)을 얻기 위해 양식되었고, 달팽이요리를 위해 기원전 50년경부터 식용달팽이가 양식되었다고 합니다. 닭도 있긴 했지만 귀한 재료였지요.
  해산물이나 민물고기 중 굴, 장어, 도미, 곰치는 양식을 하였습니다. 로마 교외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굴>이라 불리는 양식장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해요. 또한 상하수도 설비로 유명한 로마이니만큼 도시에서도 쉽게 물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시장에서는 오늘날 횟집처럼 해수어용과 담수어용 수조 등이 구비되어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의 기술로 생선을 살아있는채로 내륙까지 운반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신선한 생선이 매우 고급 재료였지요.

11. 비싸고 귀한 거라면 몸에도 좋지 않을까?
  위에서 말한 가축들이 <일반적인 식재료>라면, 로마에서는 돈이 넘쳐나는 귀족들이 일반적인 식재료들에 질려 점점 더 희귀한 식재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맛이 없더라도 신기하거나 귀하고 비싼것이기만 하면 좋은 식재료로 취급되었고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고 믿었죠. 또한 로마에서는 귀족들이 <케나>라고 하는 정찬을 열어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진귀한 재료를 구해 손님을 대접하면 주인의 인기가 올라가고 존경받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귀족들은 진미에 열광했습니다.
  당시에 유명했던 진미를 예를들어보자면, 우유에 끓인 돼지의 유방, 무화과로 살을 찌운 돼지의 간, 우유로 살을 찌운 식용달팽이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닭에게서 자른 볏, 낙타의 발굽, 백조, 돌고래, 잉꼬, 거북이 등도 귀한 진미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플라밍고의 혀는 역대 황제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하지요. 공작은 고기가 질기고 별로 맛이 없는 식재료였지만, 외관이 워낙 화려했기때문에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공작은 장식을 중요시여기는 중세시대때까지 만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였지요.
  로마시대의 진미들 중 오늘날에서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푸아그라(거위 간)입니다. 현재 서양의 3대 진미 중 하나로 취급받는 푸아그라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먹어왔다고 하죠. 로마시대때에도 푸아그라는 매우 고급 식재료였고, 거위에게 무화과를 먹여 간을 살찌웠다고 합니다. 로마가 시칠리아와 전쟁을 했던 핑계도 <무화과가 필요해서>였다고도 하죠.
  또다른 3대 진미 중 하나인 캐비어(철갑상어 알)는 당시에는 쓰레기식재료 취급이었습니다. 대신 철갑상어가 생선 중 가장 귀한 생선으로 취급받았죠. 캐비어는 철갑상어를 해체한 뒤 가난한 어부들이나 먹는 찌꺼기 음식이었다고합니다. 그런 캐비어가 현재는 초고급 재료가 되고, 정작 철갑상어는 이제 버려지고 있으니 참 신기하죠.

12. 앙트르메의 시작은 로마에서부터!
  학의 통구이, 빨갛고 하얀 물감을 칠한 고기, 살아있는 새를 가둔 단단한 파이, 와인이 뿜어나오는 분수 등. 바로 중세시대편에서 설명했던 장식을 위한 요리, 앙트르메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로마시대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중세처럼 아예 먹지못할정도로 꾸며놓은 음식은 아니고, 말하자면 <여러가지 연출을 넣은 요리> 였습니다. 예를들어, 새날개를 붙여놓아 신화속의 유명한 동물인 페가서스처럼 보이게 한 토끼구이, 내장처럼 보이게 뱃속에 소시지를 채워넣은 돼지 통구이, 살아있는 개똥지빠귀가 들어있는 멧돼지 통구이, 후추로 만든 소스 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표현된 생선찜 등이 있었죠. 
이러한 요리들은 연회에서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에서는 모방요리도 유행했다고 합니다. 카에키리우스 라는 로마인의 기록에 의하면, 애호박을 사용해 생선, 버섯, 과자 등을 만들게 하거나, 돼지나 소 모양의 틀을 이용해 동물의 통구이처럼 보이도록 요리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레몬잎과 벌꿀을 섞으면 로제와인 맛이 난다> 라는 식으로 맛의 모방에 대한 연구도 놀이의 하나로 행해졌다고 하네요.

13. 식사 한번에 차 한대 정도는 뽑아줘야 귀족이죠!
  당시 로마제국은 유럽 전부를 지배하는(당시엔 지중해 근처만이 유럽으로 취급되었고, 그 외에는 척박한 야만인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대 제국이었고, 그런 제국의 황제는 말 한마디로 새를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황제 밑의 귀족들 또한 높은 권력과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죠. 귀족들의 사치는 말 그대로 극에 달했고, 이러한 사치를 막기 위해 <낭비금지법>이라는 법이 제정될 정도였습니다. 물론 별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지요.
  요즘 현대에서는 아무리 돈많은 갑부라도 식비가 그렇게까지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물론 우리 기준으로는 충분히 비싸지만..) 이것저것 엄청나게 비싼 재료를 써댄다고 하더라도, 한끼에 몇백만원을 넘어가는 경우는 별로 없지요. 하지만 당시엔 요즘처럼 즐길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던시대라, 귀족들의 사치는 특히 <먹는것>에 집중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값비싼 식재료 구입을 법으로 금지시켰지만 귀족들은 밀수로 식재료들을 손에 넣었죠. 교통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다보니 수입밖에 방법이 없는 희귀한 식재료나 먼 바다까지 나가야만 잡을 수 있는 생선들은 엄청난 가격이 붙었습니다. 예를들어 타조, 황새치, 돌고래 등이 있었죠.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법에서는 <중요한 축제일의 요리에 노예 한 명분 이상의 돈을 들이면 안된다> 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당시 노예의 가격은 현대로 따지면 자동차 한대분의 가격인 2~3천만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규정이 있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식사 한번에 2~3천만원의 돈을 써대는 귀족들이 많았다는 걸 의미하죠. 그런 사람이 별로 없었다면 법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테니까요.
  예를들어 기행으로 유명한 황제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년)는 도를 넘은 요리로 신하와 손님들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10일간 계속해서 하루에 30마리의 돼지고기요리(진미로 여기는 유방과 자궁이 딸린 고기), 금가루와 보석가루가 뿌려진 콩요리, 진주가루를 뿌린 버섯요리 등을 대접했고, 한번의 식사에 600마리 이상의 타조의 뇌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진주알갱이를 넣어 만든 밥을 대접했는데, 밥을 먹다가 진주가 나오면 집에 가져가도 되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지나친 낭비가 원인이 되어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결국 수년만에 암살당했다고 합니다.

14. 빵은 딱딱한게 최고 아닌가요? 말랑말랑한건 씹는 맛이 없잖아요.
  로마에서 빵의 제조가 시작된 건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당시에는 빵과 케이크의 구분이 따로 없었습니다. 뭐 디저트가 제대로 발달했던 것은 중세 이후인 16세기니까요. 기원전 1세기 정도를 기점으로 로마의 주식은 밀죽에서 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 빵을 굽지는 않았고, 빵굽는 노예가 따로 있는 부잣집을 제외한다면 서민들은 보통 빵집에서 빵을 사서 먹었다고 합니다. 
  로마, 즉 라틴어로는 빵을 <파니스>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가 포르투갈에선 <팡>이 되었고 이게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빵>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됩니다. 로마에서는 빵을 만들 때 반죽에 여러가지 다른 재료를 섞는게 유행이었는데 보통 올리브유나 베이컨, 버터 등의 유지를 섞어서 만들었으며, 포도즙이나 와인, 우유, 계란 등을 섞어서 맛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빵 제조 기술은 점점 발전하였고 돌가마나 청동 화덕을 사용하여 숯으로 굽거나 꼬치에 꿰는 등 제조 방법도 다양해졌죠. 무발효빵도 인기가 많았는데, 베이컨 조각과 지방이 들어간 <파니스 아디파토스> 같은 무발효빵은 후에 피자로 발전합니다.(토마토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채소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직 없었습니다.) 
  이스트를 사용하여 폭신폭신한 빵을 만들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요즘처럼 말랑말랑한 빵보다는 단단하게 만든 빵이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빵을 와인이나 우유에 적셔먹는 것이 로마의 유행이었죠. 이러한 단단한 빵 사랑은 중세시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중세 유럽인들도 단단한 빵을 와인이나 스프에 적셔먹는 것이 기본적인 빵먹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로마의 빵 중에서는 <파니스 비켄티노>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질냄비에 반죽을 넣어 가마에서 질냄비가 깨질때까지 열을 가해 만든 것으로 포도즙을 넣어 달콤하긴 했지만 이가 안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단단했다고 합니다. 이 빵은 오랜시간 열을 가해야하다보니 만드는데 꽤 수고스러워서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고 하네요. 
  <파니스 무스타케우스>라는 빵은  과즙, 치즈, 허브 등을 넣어서 월계관을 씌운뒤 굽는 도넛모양의 빵인데, 이것은 로마시대의 웨딩케이크와 같은 음식으로 결혼식 때 먹는 축하음식이었다고 합니다. <파니스 파르레움>은 스펠트 밀가루(기원전 5천년 경부터 재배되었던 고대밀의 일종. 보통 빵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맥과는 다른 품종입니다.)로 만든 빵으로 신혼 초야에 부부끼리 나눠먹었지요. 또한 군대용 식품으로 <파니스 밀리타리스>라는 빵이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의 건빵이나 비스켓과 비슷하게 물기가 거의 없이 딱딱하게 만들어져 물에 담가 먹었다고 합니다.

15. 와인을 그대로 마시다니! 이사람, 예의가 없구만?
  그리스와 로마에서 와인은 매우 인기있는 술이었지만, 당시에는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브랜디나 위스키 등 도수높은 증류주가 많아서 양주에 물을 타 마시기도 하지만 와인은 비교적 도수가 낮으니 물을 타면 좀 밍밍했겠죠.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와인을 그대로 마시는건 야만적일 뿐더러 몸에 좋지가 않다고 여겼고, 와인을 그대로 마셔도 되는건 술의 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의 와인은 당도가 높아 달콤했고 증발로 쉽게 진해졌기 때문에 물을 타서 마셨던 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물을 넣는것도 규칙이 있었는데, 당시 로마에서는 와인에 물을 타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마치 영국에서 밀크티를 만들때 우유를 먼저 넣느냐 홍차를 먼저 넣느냐로 다투는 것 같지만, 반대로 물에 와인을 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그 비율은 와인:물 이 2:1, 5:2, 3:1, 4:1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와인셀러같은게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냉장고도 없었기에 와인의 장기보존이 불가능했습니다. 와인은 쉽게 변질되어 시큼해졌죠.(와인이 발효가 너무 진행되면 식초가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와인의 변질을 늦추고, 맛을 속이기 위해 여러가지 첨가물을 넣었습니다. 요즘처럼 첨가물을 몰래 넣고 멀쩡한 와인처럼 꾸며서 팔았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엔 와인의 변질이 흔하다보니 첨가물을 넣는것도 당연하다고 인식되었던 모양입니다. 예를들어 탁한 느낌을 내기 위해 계란 흰자나 석회를 넣었고(우웩;;), 색을 내기 위해 알로에, 사프란 등을 넣었습니다. 달콤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물을 섞은 과즙이나 벌꿀을 넣기도 했죠. 향을 내기 위해서는 향신료나 허브가 사용되었는데, 특히 이 경우에는 <그리스 와인>이라고 불리며 고급 와인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색을 내기 위해 역청을 섞기도 했는데, 참고로 역청은 천연 아스팔트(고체 석유)로 갈색의 타르같은 물질입니다. 당연히 몸에 안좋죠. 사실 오늘날에야 이러한 물질들이 몸에 안좋다는걸 잘 알고있지만 당시엔 뭐 먹으면 바로 죽는 독이 아닌 이상은 <색이 좋아보이네? 넣어보자!> 였을테니까요.
  이러한 첨가물이 들어간 와인은 와인의 변질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사실 로마인들도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와인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와인에 첨가물을 넣는 것은 로마 뿐만 아니라 중세 후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하네요. 

16. 로마의 최고의 와인과 최악의 와인은?!
  그리스에서는 일찍 딴 포도로 만든 산미가 강한 와인을 선호했지만, 초기 로마의 로마인들은 잘 익은 포도로 만든 달콤한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후기가 되면서 강하고 떫은 맛이 있는 와인으로 취향이 바뀌었지요. 당시에는 레드와인보다는 화이트와인이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와인들 중 가장 평가가 높았던 것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팔레루눔>이었습니다. 현재 나폴리 지방 남쪽의 팔레루누스 산 경사에서 딴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그 중에서도 산 중턱에서만 수확하는 포도로 만든 <파우스티안 팔레루눔>이 가장 최고급이었다고 하죠. 이 와인은 최소 10년이상 숙성시켜서 먹었으며, 황금빛을 띠는 화이트 와인이었다고 합니다.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21년에 만든 <오피니안 팔레루눔>이 매우 걸작이었으며 기원전 100년경에 카이사르가 즐겨마셨다고 합니다.
  그 외에 <팟슴>이라는 건포도로 만드는 와인도 있었는데, 일반적인 포도보다 더 높은 당도로 만들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로마에서 가장 최하급으로 취급받는 와인은 뭐였을까요? 바로 <로라>라는 이름의 와인입니다. 이 술은 와인을 짜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노예용의 자가제 와인이었다고 합니다. 바꿔말하자면, 당시에는 노예도 어떻게든 와인을 만들어마실 정도로 와인이 대중적인 술이었다는 이야기지요.

17. 와인 말고는 뭘 마셨을까?
  물론 로마에서 와인만 마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와인 다음가는 술로는 벌꿀주가 있었죠. <아쿠아 무루사>라고 부르는 술로, 벌꿀과 물, 이스트균을 섞어 발효시켜서 만들었습니다. 벌꿀주는 와인보다는 안좋다고 여겼기 때문에 주로 시골사람들이 마시는 술이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시골이란, 북방지역에 살던 유럽인들을 가리킵니다. 포도는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북유럽 지방에서는 포도를 재배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나 벌꿀은 북유럽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매우 인기가 많았던 맥주는 로마에서는 <아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완전 질이 낮은 음료로 취급받았습니다. 가격은 노예용 와인이라는 <로라>보다도 절반의 가격이었죠. 그리스&로마인들은 맥주를 마시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시대가 되면서, 게르만족이 유럽을 차지하게 되자 그들이 즐겨마시던 맥주는 다시 인기있는 술이 된거지요.
  여기까지는 술에대한 설명이었고, 그 외에는 무슨 음료수들이 있었을까요?
  로마어린이들은 <테후루툼>이라는 음료수를 주로 마셨습니다. 과즙을 졸여만든 시럽이었죠. 이걸 물이나 식초에 타서 희석해서 마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집에 가보면 흔하게 있는 매실원액 같은 느낌인거죠.
  <포스카>는 물을 탄 식초로 향신료나 벌꿀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식초를 넣으면 물이 잘 상하지 않기 때문에 여행시에 주 음료로 사용되었지요. 와인이 전부 다 발효되어버리면 식초가 되었기 때문에, 와인이 있는 지역이면 식초도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오늘날에는 오히려 고급으로 취급받고 있는 발사믹식초가 바로 와인 식초이죠)
  <메르카>는 양이나 염소젖으로 만든 요구르트였습니다. 즉 젖을 발효시킨거죠. 소화를 돕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건강식품으로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후추나 가름(요구르트에 젓갈을[...])을 뿌리거나, 코리앤더나 소금을 넣어 먹었다고 합니다.
  <우유>는 먹긴 했지만 어린이들이 주로 먹었으며 어른들은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약으로 처방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아침에 한잔정도만 마시는게 일반적이었으며 허브 같은 걸 섞기도 했다고 합니다.

18. 어이 노예, 머리카락좀 내놔 봐 
  당시 로마의 식사방식은 커다란 접시에 담긴 걸 각자 덜어서 먹는 방식이었습니다. 현대 레스토랑처럼 코스요리를 먹었다는 걸 제외하면 중세랑 비슷하지요. 개인마다 음식이 지급되는 러시아식 서빙은 19세기부터 생겨난 방식이니까요. 접시는 은이나 금, 청동 등으로 만들어져 값이 비쌌으며, 유리도 있긴 했지만 매우 귀했습니다. 커다란 접시는 연회를 주최한 자의 지위나 권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때에 따라서는 다른곳에서 빌려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조리한 냄비 채로 가져왔으며, 이 냄비들은 청동이나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덜어먹는 접시는 저렴한 질그릇을 사용했으며 1~2번 사용한 후에 버렸습니다. 뭐 세제 같은게 없을 시절이다보니, 부자들로서는 기름기 있는 음식찌꺼기를 힘들게 제거하기보다는 그냥 싼 질그릇을 교체하는게 더 효율적으로 생각되었겠지요. 중세 유럽처럼 납작한 무발효빵을 개인 접시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포크같은게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로마인들도 맨손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 외에는 국물용 숟가락을 사용하는 정도였지요. 그러나 미식을 추구하게 되면서 요리의 종류가 많아지자 특정 요리에 사용하기 위한 도구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식용달팽이를 껍질에서 빼내는 스푼, 국물요리를 섞기 위한 막대기 등이 있었죠. 고기요리의 접시에는 나이프와 꼬치가 딸려 나왔습니다.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문화다보니 방에는 향수가 들어간 대야가 놓여있었습니다. 만약 일일히 일어나서 손을 씻는게 불편한 경우에는 테이블보나 냅킨으로 손을 닦았죠. 냅킨은 따로 집주인이 준비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각자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손수건처럼요.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노예가 많아지자 노예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닦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위해 일부러 머리를 길게 기른 나이 어린 노예가 만찬테이블 옆에 배치되었다고 하네요. 현대시대였다면 닦으라 해도 남 머리카락은 찝찝해서 안닦을텐데 말이지요. 샴푸도 없던 시절이니 머리에서 냄새나잖아요?
  그리고 당시 식사할 때의 필수품으로는 파리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따뜻한 지역이고 하다보니 파리가 엄청 꼬였겠지요. 위생상태가 더 안좋았을 때니까요. 귀족들이 사용하기 위해서 공작의 깃털로 호화롭게 만들어진 파리채도 있었다고 합니다.

19. 귀족의 식사와 서민의 식사
  당시 로마에서는 아침과 점심을 대충 먹는 대신 저녁은 든든하게 먹었습니다. 서민들은 케나(저녁식사)를 오후 4~5시부터 시작하여 해가 지기전까지 먹고 해가 지면 잠에 들었죠. 등불에 사용되는 기름이 비쌌거든요. 물론 돈많은 귀족들은 그런거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도 케나를 계속했고, 케나가 끝나면 코밋사티오라 하여 파티를 또 열었죠. 당시 귀족들은 연회에 트리클리니움이라는 긴 의자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서민들은 그냥 마루나 의자에 앉아서 평범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빵을 사기도 힘들었던 빈민들은 스펠트 밀가루로 만든 죽인 <폴렌타>나 병아리콩, 완두콩 등을 끓인 수프를 먹었고, 아주 가끔 말린고기를 먹는 정도였습니다.
  1부 4챕터에서 나왔던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인 <파트로누스>는 서민들을 케나에 초대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케나에 초대된 서민들은 모처럼의 기회이고 하다보니 엄청나게 먹어치우고 돌아갔고,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싸가기도 했다고 하네요.

20. 로마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음식쓰레기 모자이크의 정체는?
  고대 로마의 저택에서 식사나 연회에 사용되는 방 바닥을 보면 모자이크가 만들어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예쁜 그림이 아니라 뼈나 조개껍질, 과일의 씨 등 음식쓰레기가 그려진 모자이크죠. 예쁜 장식으로 방바닥을 꾸며도 모자랄 판국에(더군다나 사람들을 초대해서 먹고마시는 장소인데!) 왜 그런 음식쓰레기들로 바닥을 꾸며놨을까요?
  그건 바로 로마인들의 금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자이크 장식을 <아스타로스> 라고 하는데, 옛날 로마에서는 죽은 가족들을 집의 마루 밑 지하에 묻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집의 바닥은 사령으로 변한 자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지요. 후에 매장관습이 변하면서 죽은자의 무덤을 마을 바깥에 만들게되었지만, 그러한 미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매장관습이 변한 후에도 아이들이나 노예가 죽을 경우엔 여전히 집 지하에 묻었거든요. 그렇다보니 음식이 바닥에 떨어지면 매우 부정하게 되며, 그걸 손으로 만지면 악한 유령에게 저주를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음식은 애완동물이나 노예도 집어먹지 못하게 했죠. 식사를 할 때 손을 밀가루반죽으로 닦은 뒤 그걸 땅에 버려 애완동물이 먹게 했던 그리스와는 상반되는 부분인 셈이지요. 땅에 떨어진 음식찌꺼기는 빗자루로 쓸어서 난로에 태웠으며, 이러한 바닥청소도 유령의 원한을 살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죽은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음식찌꺼기 모자이크인 <아스타로스>인 셈입니다.
  참고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 다른 고대문명에서는 이른바 <먹으면 안되는 것>이 정해져 있었지만(돼지나 뱀 등), 로마에서는 그런게 없었고 <모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신, 또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던 합리주의에 의한 영향일 지도 모르겠네요. 

21. 외식산업이 발달했던 로마
  당시에 귀족집안에서 요리는 노예가 맡아서 했습니다. 로마 귀부인들은 아예 요리를 하지 못했죠. 오히려 귀족 남성들은 가끔 취미로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서양에서도 남자 요리사가 더 많지요. 그에비해 가난한 서민들의 집은 수도시설도 가마도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를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외식을 했죠. 굳이 가난한 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 사람들은 집에서 먹기보단 밖에서 사먹는 것을 선호하였고, 따라서 로마시대의 외식산업은 매우 큰 산업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기본적으로 <바르>라고 불리는 경식당과 <포피나>라고 불리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포피나에서는 식사나 술 외에도 매춘이나 도박도 이루어졌죠. 말하자면 판타지세계의 주점이라는 느낌이랄까요? 귀족들을 위한 고급 음식점으로는 <케나티오>가 있는데, 정원과 연못이 있었으며 트리클리니움(누워서 먹을 수 있는 긴 의자)이 갖추어져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급 음식점에서는 음식의 양이 많을수록 품위가 떨어진다고 여겼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로마의 경식당 <바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민들의 대표 식당이라 할 수 있는 <바르>에는 먼저 돌이나 시멘트로 만든 L자 모양의 카운터가 있었습니다. 이 카운터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파여있고 거기에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가 묻혀있었는데, 돌이나 시멘트가 단열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안에 넣어둔 음식들이 보온/보냉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장소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고, 그게 없었다면 서서 먹었죠. <바르>에서 팔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콩이 들어간 밀가루죽인 <프르스>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판매가 금지되었던 시기도 있었지요.
  프르스 외에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삶은 돼지고기 였습니다. 그 외에 돼지고기 꼬치구이, 장어, 올리브, 무화과, 소시지, 생선이나 고기경단, 야채마리네, 오믈렛 등을 팔았습니다. 와인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2. 힘세고 강한 아침, 나는 로마 병사!
  로마, 라고 한다면 로마 제국의 번영을 가져온 강력한 로마 군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로마 하면 로마인들의 모습보다 그 특유의 로마 군인 복장이 떠오를 정도로, 로마 보병은 로마를 대표하는 요소지요. 특히 당시 서양에서는 기병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기병이 제대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부터) 강력한 보병의 존재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군대에 있어서 식사는 사기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용맹한 군대라고 해도 밥을 안준다면 싸우긴 커녕 반란이나 일으키지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렇다면 세계를 제패했던 강력한 로마군대는 어떤식으로 식사를 했을까요?
  일단 로마 군인에게는 하루에 800g에서 1kg 정도의 빵이 배급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빵은 보존성,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물에 적셔서 먹어야하는 단단한 건빵이나 납작한 무발효빵이었습니다. 밀죽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 군대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낭비를 줄이기위해 힘썼다고 합니다. 한 예로 율리아누스 황제는 전장에서 병사들과 같은 식사를 했다고 하지요. 
  병사들에게는 구이용 꼬치와 냄비가 지급되었으며, 아침에는 조리가 안된 식재료를 서서 먹고 점심때는 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거나 냄비에 끓여서 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정해진 조리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먹는건 금지되었다고 하네요. 아마 이것저것 요리한다고 잔뜩 챙기려들거나 지나친 시간을 소비하는것을 막으려고 했던 듯 하지만, 맨날 단순한 방법으로 요리한 고기만 먹어야했던 병사들은 튀기거나 소스를 뿌려 구운 고기가 먹고싶었을 테지요. 그리고 전장에서는 빵집에서 구운 빵, 불을 사용한 음식의 판매가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체벌을 받는 병사의 식사는 대맥(보리)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엔(아마 로마 초기겠지요) 그리스인들이 보리빵이나 보리죽을 주식으로 먹었었는데, 로마인들은 버석버석한 보리빵을 먹는 그리스인들을 업신여겼다고 합니다.
  로마인들 덕분에 유럽 곳곳에 다양한 식재료가 퍼지기도 했습니다. 예를들어 카이사르 황제는 영국에 주둔하는 로마 병사들을 위해 포도나 호두, 무화과, 올리브 등을 옮겨심게 했으며, 당근, 렌즈콩, 샐러리, 배, 복숭아, 코리앤더 등도 영국으로 가져가 심게 했지요. 이러한 작물들 중 기후에 맞는 많은 농작물들이 현지에 정착하여 자라게 됩니다. 만약 로마가 영국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영국의 식재료는 지금보다도 더 별게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