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자 css2526 > 제 생각에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기에 병력도 무기도 장군들도 모두 다 충분했다고 생각돼는데 조선이 일본을 이길수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답변자 chasparkn> 일단 문화의 차이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전쟁은 다이묘대 다이묘, 즉 지배층 인사들과 그들의 병사로 치루어 졌습니다. 그 병사들만 치면 점령지의 거주민들은 싸그리 자신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죠. 이는 내전중에서도 모든 평민들이 일단 명분적으로는 천황의 국민들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즉 다이묘들끼리의 싸움은 결국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지방영주 교체 프로젝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충심을 달리한다는 의미는 없었던 면이 적잖아 있었죠. 하지만 임진왜란은 다릅니다. 왜장들이 어떻게 생각했든, 조선인들에게는 그들은 침략자였고, 자신들의 직접적인 적이었습니다. 양민 천민 할것없이 왜장들의 뻔뻔스런(하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했던) 약탈행위에 질려버렸고, 타국의 병사들을 곱게 볼이유가 없던 그들은 의병이라는 형식으로 점령지 노예가 아닌 당당한 대적으로 양성됩니다. 그러므로 점령한 지역이 앞으로의 공격의 발판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속적인 게릴라전의 전장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당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점령지 주민들의 반응과 달랐으니 왜장들로서는 적지않게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또다른 것은 선조의 도주입니다. 왜군의 진격은 왜군들 스스로도 놀랄정도로 신속했고, 그 신속은 원래 그들의 왕을 전시초에 생포한다는 전략을 실현화할수 있었을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원래 심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준비가 되지 않은 선조는 도망가기 바빴고, 그렇게 신속한 왜군들보다도 한발더 앞서 의주로까지 피난을 가버린 겁니다. 당시 선조는 왕위를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명국으로 피신하려고까지 할정도로 적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볼썽사나운 행동은 결국 왜군의 허점을 찌른 것이 된 거죠. 초기에 왕을 생포하고 지리절멸하게된 나머지 조선땅을 차례차례 점령하겠다는 전략이 무효화된 겁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신속함보다도 더 빠른 선조를 추격하기 위해 함경도까지 진격한 왜군은 후에 미리 대비치 못한 겨울이 닥치자 상당수가 얼어죽을 정도로 고생을 합니다. 또한 너무 빠른 진격은 결국 든든한 보급선의 부재를 불러왔고, 그러면서 지나쳐 버린 호남지역은 권율등의 활약으로 적의 후방을 노릴수 있는 근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왕의 건재는 결국 장수들과 지방관리들이 체계적으로 반격을 할 실마리를 제공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지나친 전장의 확대가 그들의 최대잇점인 압도적인 병사수마저도 분산시켜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되어버린 겁니다. 결정적으로 왜장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바로 이순신장군입니다. 일상적인 성웅만들기가 아닌, 객관적인 분석을 봐도 이순신장군의 전공이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부정할수가 없습니다. 잇따른 승전을 통해 이루어진 조선수군의 남해안 제패는 일본 본국에서의 보급을 불리하게 만듭니다. 당시 조선과 무기와 병사체계가 현저히 달랐던 왜군으로서는 점령한 조선에서 얻을수 있는 보급은 단지 식량뿐이었습니다. 조총이나 그에 쓰이는 탄환, 화약등은 대부분 일본 본국에서 생산 공급해야 했고, 그 때문에 안정적인 해상보급은 필수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으로 인해 일본 본국과의 보급이 위협을 받고, 또 미리 올라간 함경도나 경기도 지방의 왜군들에게도 충분한 공급이 어려웠지요. 당시의 운상수단으로는 수레나 배를 들수 있는데, 육상으로 하는 수레수송은 소나 말등의 살아있는 동력이었으므로 대량 수송이 어려웠습니다(소등의 먹이나 힘의 한계로.). 가장 편한 운송수단은 역시 배였는데, 그중에서도 해상을 통한 보급은 미리 진격한 몇만명 수준의 왜군들에게는 아주 필요한 것이었지요. 그것이 막힌 후 왜군들은 불확실한 전황때문에 아주 필요한 상황이외의 전투를 꺼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또 적은 수의 의병들의 활약 또한 가능케 한 겁니다. 이로 인해 육상수송이 더 어려워지고, 보급은 또 제한되고, 그러한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처음 그들의 편이 되었던 군사의 숫자가 한정된 보급으로 인해 그들의 폐해가 되기 시작한 거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본국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정적들이 조선공격의 불확리성을 지적하고 나선것이지요. 결국 도요토미는 전투외의 방법으로라도 이순신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짜야할 정도로 이순신장군은 왜장들의 목안에 들어온 칼이 되어버린 겁니다. 정유재란이후에도 12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치신 명량해전의 승전으로 이순신장군은 또다시 뒤집혔을수도 있었을 전황을 다시 조선편으로 돌리기도 하지요.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아니라 할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명나라의 지원을 손에 꼽기도 합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필요없었던 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유경의 거짓 화평은 왜군들의 재집결과 전략의 수정을 가능하게 했고, 정유재란 전의 명군의 전공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요. 또 정유재란후에도 조명연합군은 육지에서는 결정적인 공을 세우지 못합니다. 대부분 보급이나 지원이 어려워진 왜군이 후퇴하는, 한마디로 타격을 주기보다는 맞버티기에서 더 버텨낼수 있었을 뿐인 경우가 다수입니다(이런 경우 왜군의 보급과 지원이 어려워진 이유가 대체로 조선수군덕이었다는 것은 지적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명나라 원군의 가담은 사회적으로 원군의 탈을 쓴 또다른 약탈군이라는 문제점을 불러왔고, 원군이라는 빚은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명군의 횡포나 지휘권 남용은 국내장수들과 병졸들의 사기저하를 일으켰고, 전략적으로는 겨우 열세를 면할수 있었을 뿐인,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실책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나마 진린은 지휘권을 이순신장군에게 넘기기라도 해서 전황에 도움은 주었습니다만, 왜군의 퇴각이 패배로 인한 퇴각이 아닌 도요토미의 사망이었다는 것을 볼때 명군의 지원은 결정적 요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후, 후계자 히데요리는 너무 어렸고, 대부분 가신들이나 충성을 바친 장수들이 조선에 나가있는 상황에서 도요토미 일파들에게는 이제 조선공략은 독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상황에서 명군의 존재는 퇴각 결정을 조금 더 쉽게 하는 촉매의 역활도 간신히 행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명군이 없었더라도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계속 등용시키고 의주에서 항쟁을 계속했다면 도요토미의 사망당시 조선은 더욱 유리한 상태로 전란을 마감할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도요토미 사망을 무시하더라도 증가되는 수군을 이용한 해안의 봉쇄와 재정비된 군사들로 압박해 나아갔으면 자력으로도 왜군을 이땅에서 물리칠수 있었겠지요. 결국, 조선의 임진왜란 승리는 일본의 조선사회에 대한 이해부족, 초기의 왕실제압 실패,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등장으로 인해 이루어질 명쾌한 승리가 선조의 명숭배적 태도, 조정의 썩어가는 명에 대한 정보부족, 주변의 시기나 질시로 인한 이순신장군의 압송등으로 흔들리다가 이순신장군의 복귀, 그리고 명군의 가담으로 손쉬운 제압이 어려워진 조선의 저항에 더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이 그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 답변자가 조선이 이길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이유와 명군의 지원이 오히려 전란을 더 어렵게 만든 큰 실책이라고 논리적으로 답변해 주었네요.. 잘 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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