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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실미도 사건

by 501™ 2012. 12. 28.

실미해수욕장과 실미도

71년 8월 23일 서울이 발칵 뒤집힌다. 군복을 입은 신원을 알수 없는 24명의 무장요원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것이다. 공비침투라는 군당국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은 한바탕 전쟁의 공포에 휘말리게 된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군인과 총격전끝에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수류탄 자폭으로 끔찍한 최후를 마친다. 



그러나 이들은 공비가 아닌 북한 주석궁 침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은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밝혀진다.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진실을 밝힐 기회도 없이 역사속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린다. 



이들은 누구인가? 무엇때문에 김일성 주석궁을 목표로 하던 총부리를 청와대로 돌렸는가? 실종돼 버린 이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수 없는 것인가?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살아남은 자는 소대장 김방일씨와 경비병 5명등 기간요원 6명뿐이다. 



실미도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극상을 일으켜야만 했을까? 김방일씨는 훈련요원들의 피비린내 나는 하극상 이후 상황까지 실미도 난동사건 전모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김방일씨를 만나 당시 사건의 전모와 특수부대의 실체에 대해 들어본다. 그는 먼저 희생된 기간요원과 훈련요원들의 명복을 빌었다. 



기자는 '이제는 말할수 있다' 라는 MBC의 방송을 보고 이사건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서 특수부대 소대장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있다 살아남은 김방일씨를 만나보았다. 실미도에 대해서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김방일씨는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었을까? 



"너무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사건을 가슴에 묻고 죽을때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사건이 왜곡되는 것을 이대로 두고 볼수가 없어서 이제는 밝혀야 할때가 되었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기자를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기자는 김방일씨를 만나 역사속에 묻혀버린 이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를 잘아는 친구를 통해서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건을 알리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3개월간의 집요한 설득끝에 그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회한이 북받쳐 오르는 듯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된다. 침투한 공비 31명중 29명이 사살된다. 한명은 자폭하고 김신조는 생포된다. 



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하극상, 청와대행, 자폭과 함께 훈련원 31명은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이사건은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수 없는 오욕으로 남아있다. 



30년전 실미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71년 8월23일 난동 당시 총알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요원은 모두 6명. 변소간에 숨어있거나 매트리스에 몸을 숨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실미도 최고 실무책임자인 소대장으로는 유일하게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김방일씨는 당시상황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끔찍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해도 이보다 더 처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훈련병들에 의해 피살된 기간요원들의 시신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머리가 으깨져 뇌수가 방안 천장과 벽에 흩어져 있는 현장을 보는 순간 차라리 내가 먼저 죽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들은 왜 기간요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며 청와대로 향하게 했는가? 

"만들어만 놓고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상이나 받으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지적했다.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 받았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없이 버려진 684부대.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이 다가온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하였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 

기간병이었던 김태수씨는 화장실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이틀전에 화장실 청소를 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황석종씨는 매트리스 속에 들어가 오른팔로 머리 모양을 해서 살았다. 훈련병들은 그가 위장한 팔을 머리로 알고 명중시키는 바람에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 



만들어만 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3년 4개월이나 버려진 실미도 특수부대. 결국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전적으로 국가에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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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의 발단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1967. 4 . > 북한, 남파 공작부대 124군부대 창설 

- 총 8기지 2,400명 규모 (1개 기지 병력은 300명씩)

<1968. 1. 5> 북한 124군 제6기지 유격장교 25명, "청와대 습격 모의훈련" 실시

- 6기지는 서울경기 침투 담당 특수부대임 -- 

<1968. 1. 14> 25명을 31명으로 증원하여 2일간 마지막 사격훈련 실시

<1968. 1. 17> "경기도 유격사령부" 견장을 단 우리 국군 복장으로 김신조 등 31명이 남쪽으로 출발함

* 1999년 6월부터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김신조침투로'가 공개되어 안보교육에 활용됨

<1968. 1. 20> 청와대 근방에서 우리 나라 군경과 교전 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많은 수가 사살되었으나 일부는 계속 청와대 방면으로 진출함.

- 밤 10시 서울 세검동 자하문 초소에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함.

- 또 이날 밤 전투에서 민간인 5명 사망하고 경찰 2명 부상함.

<1968. 1. 21> 군경 합동 수색단에서 서울 경기 지방의 무장공비 소탕작전 개시. 

- 청와대 뒷산 등에서 계속 작전 수행.

<1968. 1. 23> 원산 앞 바다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게 끌려가는 사건 발생함.

- 남북한 문제가 연속적으로 며칠간 전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함.

<1968. 1. 31> 무장공비 소탕 작전 종료. 

- 1명(김신조)생포, 27명 사살, 3명(박재경 등) 놓침

<1968. 2>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우리 국군 직할의 북파 공작원 부대 창설 결심

- 미군 관리의 국군 북파 공작원 부대는 있었으나 우리 군 관리는 없었음.

<1968. 4> 실미도에 공군 소속 제 2325전대 209 파견대(일명 684부대) 창설함. -중앙정보부 예산 지원-

- 파견대장 김준웅 상사, 소대장 김방일 중사. 훈련병은 김신조 일당과 같은 수로 31명으로 출발함

※ 영화에서는 전원 범죄자 출신이나, 실제는 절반 정도가 범죄자 아닌 보통의 일반인 또는 공군 출신이었음

※ 영화 속의 훈련 장면은 극기훈련 수준에 불과한 것임. 실제 훈련 강도는 훨씬 더 강했음

※ 훈련기간 중 사망자는 모두 7명. 나중에는 24명으로 줄어 들게 됨 



- 1명은 바다 수영 훈련 중 익사함.

- 1명은 상관에게 대드는 하극상 항명 사건으로 몰매 맞아 죽음

- 2명은 실미도에서 탈출하다가 잡혀서 즉결 처분 처형.

- 3명은 무의도로 넘어 가서 무의분교의 여교사를 집단 강간하다가 잡혀 와서 총살.

※영화에서는 줄타기하다가 떨어져서 1명이 죽고..

※강간하다가 들켜서 2명이 자결하는 것만 보여 줌. 상당히 축소된 것임



<1970. 10>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실미도 684부대 해체 결정. 예산 지원 중단함.

- 그동안 지급되던 훈련병 봉급 중단, 부식은 갈비에서 단무지로, 주식은 쌀밥에서 보리밥으로 변경

- 폭탄으로 고기잡아 구워 먹기도 하고 양귀비 재배하여 부족한 약품을 보충하기도 함

- 서서히 불만감 고조됨

<1971. 8. 22>일요일. 684부대장 김준웅 준위와 소대장 김방일 중사, 육지로 나와 인천의 모 병원 방문함

- 실미도 훈련병의 유탄에 부상 당한 무의도 어민에 대한 병 문안이었음.

연안부두에서 실미도행 배가 막 출발했을 때, 김준웅 부대장이 김방일 중사의 약혼녀가 인천으로 찾아 왔다는 무전 전화를 받음

“야, 허준호! 아니 김 중사! 너 약혼녀 왔단다. 오늘 그냥 인천 있다가 내일 들어 올래?”

김방일 중사, “넷, 감사합니다!” 바로 바다에 다이빙하여 헤엄 쳐서는 약혼녀 만나러 연안부두로 돌아감.

※ 영화에서는 허준호가 높은 사람들 만나러 멋있게 출장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

※김중사의 목숨을 살린 이 때의 다이빙 장면도 "20세기 최고의 다이빙"으로 기록될 만한 멋있는 것이었음



<1971. 8. 23> 실미도 사건 발생

05:00 훈련병들, 일제히 활동 개시

- 부대장 김준웅의 숙소에 침입, 단검과 망치로 때리고 카빈 총으로 무전기를 박살냄 

-※영화에서는 안성기가 멋있게 권총자살함 -

- 기간병 내무반에 들어 가서 카빈으로 난사, 대부분 자다가 죽음,

- 1명은 변소 갔다가 총 소리 듣고 똥통 속으로 들어 가서 살아 났고,

- 1명은 모포 뒤집어쓰고 자는 체질이라, 그 모포 때문에 살아났고,

- 바다 쪽으로 도망 가던 5, 6명 중 대부분은 총에 맞거나 익사하였으나

- 그 중 1명은 실미도 앞 돌섬까지 무사히 헤엄쳐 와서 살아 났음.

- 또 2명은 바닷가 수많은 바위 뒤에 꽁꽁 숨어서 살아남.

- 용감한 기간병 1명은 훈련병 2명을 사살한 뒤에 총 맞아 죽었고..

- 실미도를 점령한 훈련병들.., 아침도 먹고...

- 신나게 노래하며 한바탕 환호하고 놀다가..... 

06:30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총으로 위협하여 세워서는 배를 타고 실미도를 빠져 나감.

외박으로 안 돌아 온 김방일 중사에게 일부 훈련병이 쪽지를 남기고 실미도를 떠남

“소대장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쪽지 내용에서 훈련병들의 착잡한 심경이 보이는 듯함.



기간병 생존자는 이불 속 및 화장실, 바위 뒤와 돌섬에 몸을 숨긴 5명과 간밤에 인천서 안 돌아온 소대장 김방일 중사 등 모두 6명임.



10:00 김재명 대간첩대책본부장 공식 기자회견

- "무장공비 남파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8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휴전선 및 강화도로 침투한 무장공비 14명 중 10명 사살했다.."

- 너무 자주 듣는 소리라 많은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거나 아예 무관심.

- 같은 시간에 북한적십자사가 또 다음 내용을 발표함

- “26일 대한적십자사의 문서를 받을 연락원을 2명 파견할 것이다”--

- 남북관계에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실미도 훈련병들은 불안해 했었다. 실미도를 막 떠난 지금은 신경도 안 쓰지만--

12:10 실미도 훈련병들. 무의도에서 24톤 안강망어선으로 바꿔 타고 송도 초소 앞 500미터 지점 상륙함

- 얼룩무늬 예비군복 차림에 “중앙 유격사령부”라는 견장을 착용

1. 21 사건 때 북한의 김신조 일당의 견장은 "경기도 유격사령부"였다

- 상륙 후 송도 해안에서 일부는 해수욕 온 기분도 내 보고 잠깐 놀다가 “이젠 슬슬 가 보자”며 일어 섰다.

- 그 때만 해도 인천 송도는 엄청 손님이 많은 해수욕장이었다

-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던 김형운 일병이 용감하게 “누구냐”고 했더니

- “어떤 놈은 바다를 기며 훈련하고, 어떤 놈은 바닷바람을 쐬며 초소근무하냐”

-“우리는 특수부대인데 해상침투 훈련 중”이라며 다들 중얼중얼대면서 지나갔다는데...

※ 영화에서는 초소 김일병이 총 맞아 죽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의 김일병은 “21명이 지나갔다”면서 2 번이나 착실하게 보고했다. 



- 민가에서 통일화 신발 하나를 그냥 가지고 가려다가 주인이 뭐라 그러자 500원 주고 감.

- 송도 옥골고개에서 해수욕객 상대 떡장수 할머니(70)에게 떡 1,700원어치 사 먹고 돈 2,000원을 주고 감.

- 그리고 숲 속에 LMG 총 1정과 실탄 1상자(250발) 숨겨 두고 떠나 감

이 상자는 곧 동네 아이 이염호 군(16)에게 13시 30분 경 발견됨

12:53 인천 시내로 가던 항도교통 시내버스에게 총을 들고 서라고 함.

- 경기 영 5-2373 기사 임명오(30), “군인들이 총 들고 장난을 다 치네” 웃으면서 차 세움

- 실미도 군인 중 대위 계급장을 단 사람이 지휘자인 듯 했다고 함.

- 이원희(23) 소위, 병력 24명 인솔하여 즉각 출동. 괴한(?)들 버스에 타는 걸 목격.

- 버스가 500미터 정도 갔는데, 이원희 소위가 버스 뒤에서 주책없이 용감하게(?) 공포탄 2발 발사한다



이것이 육지에서의 첫 총소리였으며 앞으로 전개될 대참극의 시작이었다. 육지에서마저 그 지겨운 총소리를 들은 실미도 군인들, 눈이 확 뒤집혀졌다.

- 그래도 실미도 군인들, 침착하게 우문국 씨(54. 전 인천박물관장) 등 승객 6명과 버스기사, 여차장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하고서는..

- 즉각 버스 밖으로 총을 응사한다. 쌍방 500발의 총알이 오고 갔다.

-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5) 총탄에 사망

- 최성기(23) 하사 복부에 관통상, 전용하(24) 병장 왼쪽 어깨에 찰과상

- 이 때 버스 안에서 실미도 군인도 2명 사망함.

- 버스 기사도 오른팔 부상... 실신

- 실미도 군인 중 공군소위 출신 김종철(29)이 대신 운전함

- 첫 교전 후 버스에서는 “프린스호텔로 가자”“인천한일은행으로 가자” 설왕설래하다가

- 모 중학교 2학년 장 모 군(15)에게 “서울로 가는 길이 어디냐”라고 질문을 하기도 함

- 버스는 학익동- 용현동-숭의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까지 갔는데

- 버스 오른쪽 뒷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자 하차함.

- 이 시내버스에는 군복 입은 사망자 2명과 중상자 2명을 남겼음 

- 약 10분간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울 방면으로 가는 급행시외버스를 정지시킴

- 이 날 제물포고 박정윤 선생(부천 거주),수원여고 양숙자 선생과 함께 이 버스를 타고 가던 안양공고 배대기 선생이 갑자기 "앗, 뭘 놓고 왔다"면서 이 정거장에서 후다닥 일어서서 내렸다는데, 버스에 올라타는 실미도 군인들과 옷깃을 강하게 스침.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난다고 함.(계속 타고 가던 박정윤 선생은 부상 입원, 양숙자 선생은 사망으로 운명이 갈린다)

- 영등포 경유 수원 가는 이 태화여객 경기 영 5-1681(기사 정영소. 38), 드디어 서울 방향으로 출발함

-운전기사가 고의적으로 천천히 운전하자 실미도 군인(김종철로 추정됨)이 핸들을 잡고 같이 운전, 이를 본 어느 여자승객이 "운전은 그냥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야단치는 바람에 운전기사가 혼자 운전해 감.

-실미도 군인들, "몇 년간 휴가도 못 가고 보리밥만 먹었다", "후배 군인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는 등 왁자지껄함.

- “중앙청 가자”“국회 가자”"공군본부 가자"며 자기네들끼리 계속 정처없이 떠들고 있음

이 버스에서도 실미도 군인들은 승객들에게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있으라고 계속 당부했다. 바깥에서 날아오는 만약의 총탄에 대비하여 취한 조치이다. 

- 이 때 어떤 군인이 승객들에게 직업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 제물포고 박정윤 선생이 "나, 제고 선생이요"라 그랬더니 자기 사촌누나가 교사인데 제일 좋아 하는 사람이라면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신경쓰지 말고 머리 숙이고 계세요" 그러길래 머리를 팍 숙이고 있었다.

- 12개의 경찰지서와 검문소를 통과하여 소사까지 15km 가량을 그냥 신나게 달림.

- 운전기사 정영소 씨, ‘우리나라 검문체계 왜 이 따위냐’ 속으로 계속 투덜댐.

- 동인천경찰서 김창원 순경, 사이카로 인천 석바위에서부터 계속 따라 오다가....

- 소사검문소에서 드디어 버스를 앞질러 용감하게 가로막다가 등에 총을 맞고 즉사함.

13:25 신앙촌입구 검문소에서 또 경찰 1명 부상

- 제1, 제2, 서울대교는 바리케이드로 차단

- 군 경 예비군 및 장갑차 1대와 헬리콥터 2대가 동원됨

13:30 "정체불명 무장괴한 20 여명 인천에서 서울로 진입중"이라고 방송에서 보도됨

- 영등포 문래동 방림방적 앞에서 착실하게 교통신호 기다리던 중.... (이 때 큰 트럭 1 대도 버스 옆에서 함께 교통신호 기다렸음 )

- 이 때 실미도 군인들 약간 한눈 파는 사이에 운전기사가 비상구를 열고 도망 가서 인근 파출소에 쏙 들어 감.

- “저를 믿고 버스 탄 승객 분들에게 미안해용” 나중에 기자들에게 사과함. 

- 참, 그 때 버스는 운전기사석 옆에도 비상구 문이 있었음. --

- 실미도 군인 중 김종철(29)이 오른 손에 총 들고 왼 손만으로 버스를 비틀비틀 운전하면서 대방동 로터리 방면으로 계속 주행.

14:10 대방동로터리에서 김종철 전 공군소위가 대방동 공군본부 쪽으로 우회전하려는데 길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 때문에 공군본부 쪽은 포기함.그래서 할수없이 노량진 방면으로 직진하려는데 대방파출소 녹지대에서 대기중이던 저격병이 버스를 향하여 총을 쏘는 것으로 또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짐. 

- 자전거 타고 자나가던 노량진시장상인 1명 사망 영등포경찰 1명 부상

- 운전하던 김종철, 복부 관통상.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계속 운전함,  

- 삼륜차 한 대가 느리게 앞을 가로막는 일이 발생..

- 한 명이 “왜 이리 방해하냐”며 총으로 쏘려 하자...

- 승객 이강인 씨(41. 인천 송림동)가 “길이 좁아 그런데 뭘 그러냐” 하면서 말렸더니

- 화가 난 그가 총부리를 승객으로 들이대어, 이 씨가 다시 “민간인이 무슨 죄가 있냐” 달래자

- “그렇기는 해요” 하면서 총을 돌렸다는데....

- 부상한 김종철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운전을 계속하다가...

14:15 결국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는 정지되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도래함

- 실미도 군인들 중 4명이 수류탄 안전핀을 뽑은 채 손가락으로 꼭 누르고 위급할 때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가로수에 충돌하여 서는 통에 그 중 1명이 수류탄을 떨어트려 폭발됨.

-그러자 수류탄 들고 있던 나머지 3명도 수류탄을 떨어트려 결국은 4개의 수류탄이 모두 폭발되어 버림. 같이 몰려 있던 군인들 대부분 사망함.

아무리 자살여행이라지만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림

- 첫 보도자료에는 모두 "비장하게 자폭한" 것으로 나감. 

- 국방장관이 직접 현장에 나오고, 헬리콥터는 유한양행 옥상에 병력을 내림. 뒤늦게 다들 바쁨.

- 운전석에 있던 김종철(29) 전 공군소위는 아직 살아 있었음. 잠시후 기자들이 김종철을 지휘자로 간주하고 인터뷰를 했으나 정말로 지휘자였는지는 확인 안 됨..“직속상관 이외에는 말 않겠다”고 기자들에게 밝힘

-복부 관통상을 당한 김종철, 시립영등포병원 갔다가 곧 공군병원으로 이송됨.결국 병원에서 사망함.

- 김종철은 1960년 대전고를 졸업하여 1961년에 공군에 입대한 사람임

※ 영화에서는 주인공 설경구로 나옴. 김종철은 영화처럼 월북자 아들도, 깡패도 아님.

※ 참, 그리고 영화에서는 설경구가 운전도 안 하고.. 수류탄 10 여 개로 장렬하게 집단 자폭하는 것으로 나옴.

※ 영화에서는 절규하는 허준호 얼굴이 사건 현장에 보였으나, 

-실제 김방일 중사는 이 시간에 배 타러 인천 연안부두 뱃터에 가는 중이었음. "약혼녀 얼굴도 봤으니 빨리 실미도로 돌아가서 근무에 충실해야지--"



16:05 실미도 군인 이석천(32), 응급치료 후 군수사기관으로 연행됨

“훈련도 고되고 모든 게 말한 것과 달라 중앙청 높은 사람들에게 따지러 가는 중”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함

이 때 살아남은 실미도 군인 6명 중 김종철 등 2 명은 병원에서 죽고 4명은 나중에 군사재판에서 사형집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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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총 부상자 = 17명>

- 민간인(13)

▲박정윤(36-제물포고 교사) ▲조인자(31-송도 탈의장 철시하고 두 딸, 동생과 함께 수원 집으로 가던중) ▲박선아(6-조인자 장녀) ▲김준희(15) ▲박성희(25) ▲신태희(29) ▲이강인(41) <이상 버스 안 7명 시립영등포병원>

▲엄정화(21) <성모병원 입원>

▲임명오(30-항도교통 버스기사) <인천기독병원 입원>

▲주형락(42) ▲김말록(75) ▲김미연(25) ▲염해열(1- 김미연 딸) < 이상 경상자 4명 귀가 조치> 

- 경찰(2)

▲이무부(32-노량진경찰서 순경) ▲유장희(34-신앙촌검문소 순경)

- 군인(2)

▲최성기(23-하사) ▲전용하(24-병장=경상)



<그리고 사망자 = 7명>

- 민간인(6) 

▲김은희(5)<인천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다가 사망>

▲박선주(5-부상 조인자의 딸) ▲양숙자(32-수원여고 교사) ▲여자(23?) ▲여자(20?) <이상 태화버스에서 사망>

▲유진근(31-영등포시장에서 노량진중앙시장 점포로 자전거에 그날 3번째 물건 싣고 지나 가던 중 총탄 맞음)

- 경찰(1)

▲김창원(32-동인천경찰서 기동순찰대원)

- 현장 상황은 이것으로 끝났는데... 다른 곳은 아직도 바쁨..

14:50 비상경계령 발표.. 김포국제공항 폐쇄

15:10 대간첩대책본부에서

- 송도남쪽 조개고개에 상륙한 무장공비 21명의 서울 진입을 저지했다고 발표

- 2-3명은 분산도주중(?)이니 시민 협조를 바란다고 당부도 덧붙임

- 그러나 예상보다 많이 살아 남은 사건 주모자와 피해자 및 목격자들 때문에 정정 발표 불가피, 그리고 인천지역 목격자들 일제히 갸우뚱.. -

16:00 국방부 주변에서 무장공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술렁거림

17:30 김포국제공항 정상화

18:35 정내혁 국방장관이

- 실미도 공군 관리 특수범 23명 격리수용중 불만 난동이라고 정정 발표

- 대간첩대책본부에서는 “진짜 공비일 경우를 대비한 발표였다”고 궁색한 변명 

19:00 정내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사표 제출

- 같은 시간대에 김방일 소대장, 실미도에 귀대하여 연기 나는 사건 현장을 바라 보며 허탈...

<1971. 8. 24> 새 국방장관에 유재흥 임명,

<1971. 8. 25> 12대 공군참모총장에 옥만호 대장 임명

- 사고는 중앙정보부에서 일으키고 책임은 엉뚱한 사람들이 지게 됨

이 사건 이후 국군관리 북파공작원 부대는 자취를 감추었고..한미연합사령부 관리 북파 공작원 부대는 계속 운영된 것 같은데, 그 부대의 구체적인 규모나 임무에 대하여는 공개된 바가 없다. 

- 어쨌든 이 사고 여파로 인천 송도 해수욕객 한 명도 안 보임.

- 해수욕 시즌이 거의 끝나기는 했지만... 상인들은 모두 울상.

<1971. 8. 26>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연락원들이 문서 전달식을 가지고

- 남북관계가 갑자기 좋아질 것 같다는 분위기로 언론이 시끄러움..

<1971. 9. 15> 신민당 국회의원 강근호(당시 37세), 실미도 성격의 특수부대 관련 대 정부 질의

-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각종 선거에서 14차례 낙선, 현재는 전북 군산시장으로 당선되어 근무중임.

<1972. 5.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비밀리에 방북, 김일성과 만나고 옴

<1972. 7. 4> 평화통일 남북 공동성명.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

<1972. 11. 3> 이후락 정보부장,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문제로 김일성과 공식 회담

<1974. 8. 15> 10시 경, 박정희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 북한 지령 받고 온 일본의 조총련 킬러 문세광에게 총 맞음.

-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적인 지하철 개통식을 함

- 그리고 몇 시간 후 육영수 여사는 병원에서 죽고 전국은 애도의 물결로 덮임

- 이후 남북문제. 계속 얼었다가 풀렸다가 반복됨

- "정치꾼들 어떻게 믿냐? 장사꾼이라도 나서야지" 그러면서

- 현대그룹 왕회장 정주영이 직접 나서기도 함.



* 뒷 이야기 *

버스에서 사망한 수원여고 양숙자 선생의 제자 중 한 명이 돌아 가신 선생님의 불쌍한 두 아이를 거의 매일 가서 돌봐 주다가, 몇 년 후 진짜로 그 아이들의 새엄마가 되었음.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실미도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꺼려 하고 있다고 함.

<1990. 10> 실미도 소대장 출신인 감방일 준위, 예편되어 군대를 떠남

<1993. > 김방일 씨,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냉난방설비업체로 사업 입문

<1998. 8 > 김방일 씨, “실미전우회” 만들어 당시 기간병 생존자 6명이 정기적 모임 가지기로 함.

<1999. 2.>그 때 실미도 군인들과 옷깃 스친 안양공고 배대기 선생은 1973년 인일여고로 부임하여 이후 제물포고 등 인천의 학교에서만 근무하다가 교원정년 단축으로 대량 퇴직사태가 일어나자 인천에서 평교사로 명예퇴직하였고, 계속 버스에 타고 있다가 부상 당하여 시립 영등포병원으로 실려 갔던 박정윤 선생은 경기도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단축된 정년으로)

<2000. 9. 11> 김용순 조선로동당 중앙위 비서, 서울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

- 이 때 수행원으로 온 북한 장성 박재경이 송이버섯을 선물로 전달하고 감.

<2002. 5. > 박정희 딸 박근혜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아들 김정일에게 극진한 대우 받음.

- 김정일은 “1. 21 사건은 극단주의자들의 짓이었다. 미안하다. 그들은 그 죄를 받았다”라고 함.

- 언론은 이를 두고 “당시 관련자와 살아서 돌아 온 사람들을 모두 처벌했다는 말”이라고 해석함.

<2003. . > 실미도 영화 개봉 알려지자 북파 공작원 출신자들 집단항의

- "우리를 더이상 비밀로 다루지 말라"면서 연금 지급 등 처우개선 요구

- "그리고 영화 내용처럼 우리는 범죄자 출신이 아니다" "기분 더럽다"

- 이들의 집단 항의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들 궁금증 다소 해소됨 

- "실미도 말고도 북파공작원이 정말로 또 있기는 있었구나" --

<2003. 12> ※ 실미도 영화 전국 개봉관에서 일제히 개봉됨.

- ※ 김방일 씨, 허준호 때문에 갑자기 유명해져 여기저기 불려다님

- 관객들 엄청 몰리자 인천 중구 부구청장이 직위해제됨

- 징계 이유는 "실미도 촬영세트를 무허가건물이라고 철거지시하여 

- 인천지역 관광수입 증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것임

- 그런데 공교롭게도 징계 받은 부구청장은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으로, 실미도 사건 때 그 버스에 타고 있다가 부상 당한 제물포고등학교 박정윤 선생(체육)의 제자임... 우째 이런 일이....

“송이버섯 갖고 왔던 박재경이 사실은 1.21 사건 때 살아서 도망간 사람이었다” 

- 김신조 씨, 모 송년 모임의 초청 강연에서 충격적 증언. --

"박재경 북한 인민군 대장 총정치국 부총국장이 그 때의 남파 동료였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박근혜에게 "죄과를 받았다"고 한 말의 속뜻은?

- 박정희 암살 특공대 대부분이 여기서 총맞아 죽었는데

- 죽은 그 자체만을 두고 '이미 죄과를 받았다'고 한 것인지...

- 정말로 알쏭달쏭하네여 

- 으음. 아무래도 우리가 좀 손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

  

하여튼, 어쨌거나..

<2004. 1. 31> 영화 실미도 한국영화 관객 동원 최고신기록 수립....



<총 정 리> 

○ 남북한 특수공작원 비교분석

- 북한은 2,400명 9개월간 지옥훈련 후 교관급 육군장교 31명을 엄선하여 남파, 27명 사망, 1명 잡히고 3명 생환. 비록 실패했으나 그 용기를 높이 치하하여 돌아온 박재경을 인민군 대장까지 승진시킴.

- 우리는 공군장교 중심 31명 40개월간 지옥훈련 중 오랜 강훈으로 인한 기력쇠진, 인원자연감소,잦은 정책 변경 등 3대 악재로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중도에 용도폐기, 대원들의 우발적인 반란 일으킨 후 수습할 길이 없자 "어차피 죽을 목숨 서울구경 한번 해보고 죽자"면서 정처없이 나왔다가 허무하게 자폭

- 미군 관리 국군 북파공작원 출신자들, 연금 및 보험 혜택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있기는 있었던 것 같으나 구체적인 규모와 업적은 아직 공개된 바 없음

<실미도 영화>

- 북파 공작원의 실체 공개가 과연 시의적절한가의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시도 끝에 드디어 영화화에 성공.

- 실화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인 데다 전쟁문제, 남북문제에 관한 국민감정도 미묘하게 변화가 되어 가는 시점이라 그런지 이 영화가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을 받고 있는 실정임.

그리고...



<실미도 가는 방법 안내>

1. 영종도 남쪽 잠진도에서 배 타고 무의도 가서(승선시간 8분)

- 바닷물 빠졌을 때 실미도로 걸어서 넘어 간다.

- 잠진도는 영종도에 연결되어 있으니 영종도만 가면 갈 수 있고

- 영종도 가는 법은 인천 월미도에서 자동차 탄 채로 배 타는 방법과

- 인천공항 가는 고속도로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

2, 그리고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 타고 바로 무의도 가서(승선시간 30분)

- 무의도 산 정상 능선을 타고 80분간 등산한 뒤에 실미도 입구로 가서

- 바닷물 빠져 있으면 그냥 걸어서 넘어 가면 된다.

- 이 방법이 운동을 겸하는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연안부두에서 배가 많지가 않다.

3. 참, 지난 여름에 실미도 입구에서 주차비인지 입장료인지 약간 돈도 받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4. 그리고 월드컵 4강의 영웅 김남일 선수의 고향이 바로 이 곳 무의도라고 하는군요....

*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



* 추신 : 이 내용은 당시 신문 기사 및 국회 발언 내용, 그리고 김방일 씨 등 여러 생존자들의 회견기사 등을 상호 대조하여 시간별로 재구성한 것임. 교사 관련 부분은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내용을 참고하였음. 그리고 아직도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그러한 주장들의 진실성 여부는 좀더 정확한 확인절차를 거쳐야 밝혀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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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에서의 정의



실미도사건[實尾島事件] 

1971년 8월 23일 인천 중구 실미도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자폭한 사건. 





언제 : 1971년 8월 23일 

어디서 :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누가 : 실미도 북파부대원들(684부대원들) 

무엇을 : 자폭(自爆)을 

어떻게 : 실미도에서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왜 :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부대원들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자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龍游洞)에 딸린 무인도로,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미도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이 섬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이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되었고, 일명 '684부대'로 불린다. 같은 해 1월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목적은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金日成)을 죽이는 것이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나머지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康祐碩) 감독의 동명영화(2003년 12월 개봉)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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