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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베토벤의 돈이야기

by 501™ 2012. 10. 8.

베토벤이 비인으로 남하한 시기가 1792년인데요.
그 전해에 모짜르트가 사망합니다.

하이든이 비인을 떠나 런던으로 향한해도 1792년입니다.

비인을 곽 채운 두인물인 모짜르트와 하이든 둘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셈이 되었지요.

모짜르트는 사망으로 하이든은 고용주인 에스테르 하지 후작가문에서 더이상 고용을 하기 싫다는 이유+새로운 시장 영국 런던을 가보고 싶다는 하이든의 마음이 떨어져서 비인은 무주공산이 되어버립니다.

뭐 당시에 비인에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살리에리를 포함해서요.-하이든이나 모짜르트에 비한다면
커버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하이든이 비인에서 그만둔것도 프랑스 대혁명이 간접적으로 미친 여파입니다.
주로 음악사에서는 원주인 에스테르 하지 후작에 비해서 아들은 인색하다는 말이 있는데
아들의 성격만 주로 집착했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특히나 귀족들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는 비인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의 결과에 엄청 긴장했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세입을 줄이고 일반인이나 부르조아등에 신경쓰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드는 개인 악단을 아버지때 처럼 소유하 수 없었다는게 자명해지죠.

하이든이 악장인 이 악단의 고용인이 몇명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대략 20~30정도였던거 같습니다.
당시 교향곡은 그 정도인원이면 딱 맞는 규모였으니까요.

베토벤의 영융교향곡(3번 교향곡)이전만 해도 30명 정도면 충분히 커버합니다.

교향악단의 단원수를 당시 연주보다 늘린것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기는 했으나 대폭 늘어난 것은
카라얀이 후기에 연주할 무렵에나 그러했으므로

30명 안팍이라고 보면 맞죠.
더군다나 하이든이라면 더더욱 커버하고도 남는 인원입니다.
하이든은 베토벤 처럼 관악 편성이 크지 않았기에
관악에 비례해서 곱절로 증가하는 음향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증가하는 현악기 파트수도 마찬가지로 적었을게 분명하니까요.

문제는 베토벤은 이미 하이든이 런던을 향해 떠나는 것을 보았고,비인에 도착해서 비인 분위기를 알았다는 겁니다.

더이상 귀족과 음악가가 후원자와 고용인이 되는 관계가 이미 끝난것을 알았을테죠.

1792년에 베토벤은 당시 황후의 막내딸(합스부르크 왕가)의 별장에서 초연을 하고,그후 특별한 게약을 하는데
모짜르트나 하이든에게 후원하는 바에 비하여 현저히 낮은 액수였습니다.

대신 그들이 과거에 가졌던 하인중 높은 하인신분 이런식이 아니라(당시에 음악가는 하인중 하나였습니다.하인은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했죠.요리 외교 문서 계산 언어 음악 등등)프리랜서입니다.

베토벤은 자기묵을 집에서 하숙하고
간단한 금액을 귀족이 후원하는 대신
귀족이 듣고싶을때 음악을 언제든지 음악가가 들려주는 게 아니라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으면 베토벤이 귀족에게 통보해주면 귀족들이 가서 듣는다는 식이죠.

최초의 독립적인 음악가가 베토벤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여전히 귀족들이 아니면 베토벤 음악은 탄생도 못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거의 그렇다고 봐야죠.
비인만해도 그의 교향곡 9번 말고는 서민들은 그닥 베토벤 음악에 관심이 없었고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오히려 비인을 점령한 프랑스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 관심이 더 많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베토벤의 작품 번호1~138번중 헌정자가 없는 작품은 극소수이고 헌정한 대부분의 작품은 거의 모두라고 하다시피 귀족들입니다.

그 귀족들중 일부는 개인적 관계로 인한 헌정도 있고,다른 대부분은 자신에게 돈을 주는 자에게 헌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인제 돈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서 몇번이고 돈문제로 빈을 떠나려고 합니다.
후기피아노 소나타와 후기 현악4중주에 대한 빈의 반응이 안좋아서 비인을 떠나려고 했을때도 마찬가지지만
속내를 보면 돈입니다.

아 그렇다고 베토벤이 속물이라고 말하고 싶은것은 아닙니다.
밥을 먹어야 사니까요.
밥만 먹으면 되나요?
품위도 유지해야 합니다.
돈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을 넘어 기본적 자존심이기도 한거죠.

몇가지 사례가 있는데
가장 첫번째가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발표하기 전에 일입니다.
당시 베토벤이 점찍어 둔 여자가 잇었나 봅니다.
베토벤은 이 협주곡을 작곡하기전에 설레발을 치는 편지를 쓴것에서 드러납니다.
또 당시 황제 막내아들 루돌프 대공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드러나죠.

장가가고 싶은데 장가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현재상태로는 결혼할 수가 없다.

당시 비인은 프랑스가 점령한 상태
이상하게도 비인의 사람들 다수보다
프랑스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 자신의 음악을 더 잘 평가하고 높게 봐주는 거죠.
게다가 이미 프랑스에서 베토벤이 와줍사하고 바라는 상태였다죠.
이걸 미끼로 베토벤이 비인을 따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거죠.

그러자 위의 그 루돌프대공이 간절하다시피 매달립니다.

베토벤을 좋아한 귀족들은 대다수 공통점이 총각입니다.
베토벤도 총각이지만
루돌프 대공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이 불가하 상태의 인물
교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남
암튼 루돌프 대공이나 또 그유명한 발트슈타인 백작(피아노 소나타21번의 동일표제의 인물)도 총각입니다.
루돌프 대공은 종교인이라 결혼못하고
발트슈타인 백작은 게르만 기사단 단장이라 결혼 못함(당시 기사단은 독신이 관례)
둘다 여자도 없고 취미가 오로지 음악인 사람들
비인으로 베토벤을 남하시킨 사람이 발트슈타인(본에서 그를 보고 말이죠.게르만 기사단 단장 부임지가 본입니다)
빈에서 베토벤을 먹여살리다시피한 사람은 황제 막내아들 루돌프 대공

암튼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피아노제자이자 절친이자 고민상담에 금전후원에 영혼구원자에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없이 못살고 루돌프 대공또한 베토벤 음악에 중독되어 못하는 상태


그 루돌프 대공이 자기도 프랑스에게 지배를 받고 수입이 뚝 떨어진 실정이라
(막 프랑스 점령에서 벗어난 상태라)
베토벤이 떠난다 하는데 붙잡을 돈이 없어서
3인이 연대 보증을 합니다.

그 3인이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

이3인입니다.

로브코비츠 공작은 과거에 모짜르트를 후원하기도 한 인물

이에 베토벤은 비인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감사의 표시로 
평생연금을 보장한 3인중 하나인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이 걸작중의 걸작인 "황제"피아노 협주곡을 헌정하죠.

뭐 시작은 돈대문에 시작한 음악이라지만
황제의 예술성은 정말..~~이지...1~3악장 다 감동에 젖어서 그냥 훅 갈정도인것은 분명하죠.

그런데 이 연금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귀족들 자신도 먹고 살기 팍팍한 바람에
루돌프 대공 혼자서만 자기 몫을 계속내고 나머지는 약속을 안지킵니다.

그래서 중간에 돈벌러 베토벤도 영국으로 갑니다.
전쟁교향곡이라는 베토벤 작품중 가장 엉망인 작품을 영국에서 발표하고 돈 좀 만지고 오죠

그후 베토벤은 오랫동안 작품도 안만드는 시기가 지속
이 시기에 베토벤은 조카의 부양권을 두고 제수씨인 요한나와 소송을 다투고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 시피
이 시기 10년동안 거의 작품수가 형편없습니다.
작품도 그닥 눈에 띨만한것도 없고

이 시기가 지난것은 대충 재판이 종지부를 향해 갈 무렵
다시 베토벤은 여자를 이시기에 사귄듯 합니다.

추측은 많은데
작품번호 110번 피아노 소나타 31번의 헌정자의 어머니가 아닌가 하고 추측하더군요.
이 여자도 과부인데
암튼 결혼은 성사가  안됩니다.

괴로운 시절이 지속되죠.
작곡은 훗날에 되어서 발표햇다지만
꽤나 둘이 감정은 있는데
여자측에서 결혼은 안하는 상태가 지속된 모양
베토벤은 속이타고
조카문제로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그러던 차에 영국에서
오늘날의 피아노의 조상인
그랜드 피아노(독일어로 함머 클라비어)가 도착합니다.

영국은 당시 아니 하이든 당시만 해도 국제적인 금융의 요충지가 이미 되어서
돈이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음악가는 비인이 우세여도
악기는 영국 런던이 우세인 기막힌 상황이 그래서 생겨납니다.
오늘날에도 최고의 그랜드 피아노는 영국제라 더군요.

이 피아노가 도착하자 베토벤은 막혔던 작곡열이 생겼나 보더군요

이렇게 해서 그의 후기가 시작합니다.
피아노소나타 28~32번으로 이어지는 걸작들이 1년단위로 줄줄이 나옵니다.
물론 그중에는 제29번 소나타 "함머 클라비어"는 피아노소나타의 교향곡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역시 루돌프대공에게 헌정되고..

이 피아노 소나타가 작곡되고 나서는 완전히 베토벤은
그냥 체념상태에 들어간거 같더군요.
결혼에 대해서 말입니다.

더많은 피아노 소나타가 작곡될 수도 잇었을 텐데
갑자기 작곡방향이 현악4중주로 바뀝니다.

이유는 역시 돈
러시아의 갈리찐 후작이
주문을 햇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후기 현악4중주들이 작곡되기 시작합니다.
역시 현악4중주12번에서16번까지입니다.

흔히 베토벤을 3관왕이라 부르는데
피아노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을 말합니다

16개의 현악4중주
32개의 피아노소나타
9개의 교향곡 말입니다.

현악4중주는 아예 돈을 얼마받는 조건으로 작곡합니다.
그러니까 주문제작인 형태죠.

이 시기에도 베토벤을 비인을 또 한번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의 후기 현악4중주 대신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비인에서 대 선풍이었죠.
베토벤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비인을 따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역시 루돌프 대공이 메달리다시피해서 말림

루돌프 대공이 말린 보람이 있어서 인지
그의 최후의 교향곡 "합창"은 탄생합니다.
이전 후기 피아노소타나와 현악4중주에서
연구햇던것들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형식은 후기피아노소나타 함머클라비어와 같은 형식입니다
스케르초가 2악장에 나오고
4악장은 푸가가 등장하는 형태
후기 현악 4중주 대푸가의 악상은 합창의 스케르초와 전체 악상에 그대로 나옵니다.


원본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383422&cpage=1&mbsW=&select=&opt=&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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