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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의자왕 3천궁녀의 진실

by 501™ 2013. 9. 26.




예식진이라고... 옛날 역사스페셜 "충격의 백제 멸망 보고서" 찾아보면 백제가 왜 망했는지 거의 객관적으로 서술함

의자왕이 개망나니였다는 식의 서술은 식민사관 이전에 아마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부터 였을 겁니다.
아무래도 신라 입장에서 서술하다 보니 승자의 입장에선 저새끼 원래 나쁜놈이었다 이렇게 되는거죠.

역사스페셜에서 당시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백제는 정말 뜬금없이 망했더군요;;
아무리 나당연합군 20만에 포위됐다지만
황산벌에서 계백과 5000 결사대가 죽음으로써 상당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게다가 전투 도중에 신라군이 책임졌던 군량미를 상당부분 불태웠고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멸망을 목표로 했기에 지방 거점들을 무시하고 수도로 곧장 진격했고ㅡ지방 병력은 거의 멀쩡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그렇게 끈질기게 일어났던 것이 그 증거라고...
나당연합군은 군량미 조달에 차질이 생기고, 백제의 지방 방어병력은 수도로 집결하는 마당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백제군에 승산이 커질 형국이었는데ㅡ백제 성 내부에서 배신자가 생겨 의자왕을 포박해 항복했다고 함...

의자왕은 그때 자결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죽어야 왕자가 바로 왕위를 이어받고 계속 나당연합군과 싸울 테니까.
그러나 실패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배신자 예식진은 당나라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이상 당나라 측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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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그의 부하 예식에게 배신당해 망한 왕입니다. 말년에 노망이 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구당서와 신당서, 소정방열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종합해 정리해보면, 백제 최후의 순간은 이렇습니다.

의자왕은 친고구려 반신라 노선이었는데, 그당시 신라는 당나라를 앞세워 백제 공략을 합니다. 그당시 전쟁전략은 성을 하나씩 함락시켜 천천히 가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완전히 다른 전략을 펼치는데, 수도인 사비성으로 곧장 진격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목표는 백제의 영토를 뺏는게 아니라 완전한 멸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당군은 13만, 신라군은 5만으로 총 18만이었습니다.

원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군대를 막을땐 공성전을 펼치는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이런 방어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사비성으로 곧장 왔기 때문에, 백제입장에선 시간을 벌기위해 계백에게 5천군사를 줘서 황산벌에서 신라를 막게 하고 기벌포의 수군으로 당군을 막게 합니다. 계백은 10일을 버텼고, 수군은 8일을 버팁니다.

그래도 그들이 벌어준 시간으로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산세가 헙하게 있는 웅진성으로 피신합니다.

원래 백제는 수도인 사비성이외에 5개의 큰 지방군이 5개 지방도시에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인 웅진성은 예식이 성주로 있던곳이었고, 또한나인 임존성(현재 충남 예산) 은 흑치상치가 성주로 있었던 곳입니다. 예식은 대대로 백제의 명문가문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장 높은 벼슬이었던 좌평을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자왕의 계략은 이 다섯곳의 군을 모아 사비성을 포위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이건 상당히 현실적인 전략으로, 나당연합군은 지방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왔기 때문에 군량수송에 큰 문제가 있어서, 사비성에 갇히게 되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한지 5일만에 웅진성주 예식은 의자왕을 포박해 나당군에게 항복합니다. 이 때는 나당군이 웅진성을 공격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예식은 이 공로로 당에서 정3품 좌위위 대장군에 임명되고, 당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나당군이 개전한게 7월 1일. 당군이 백제수군을 물리치고 사비성밖에 진을 친게 7월 10일.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을 물리치고 합류한게 7월 12일. 사비성 함락 7월 13일. 의자왕 항복이 7월 18일 입니다.

이때만해도 백제지방군은 세력이 온전했기 때문에, 흑치상치, 복신, 부여풍을 중심으로 200여개 성이 백제부흥군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들은 상당히 오래 항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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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義慈王, 599년~660년, 재위: 641년~660년)은 백제의 제31대 국왕이며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여(餘)=서(徐), 휘는 의자(義慈)이며 시호는 없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없다.
시호는 없다.

죽은 뒤에 붙은 이름이 의자가 아닙니다.
살아 생전에 쓰던 이름이 의자입니다.


다른건 모르겠는데 의자왕은 시호가 없습니다. 나라가 망해서요. 시호 대신 이름 뒤에 왕을 붙인 거에요. 의자왕의 이름은 부여의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 역시 시호가 없는데. 그의 이름은 고보장입니다. 따라서 의롭고 자애로워서 의자욍이란 말은 잘못 해석한거라고 할 수 있겠죠. 마치 박근혜가 마지막 왕이었다면. 근혜왕이 됐겠죠.


오늘의유머 펌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22814&s_no=122814&kind=member&page=1&member_kind=bestofbest&mn=293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