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미스테리

스티브잡스-엔하위키미러

by 501™ 2013. 10. 16.
Stay hungry, Stay foolish.[1]
 - 2005년 스탠포드대학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맨 마지막에 사용한 인용구. 그가 생전에 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이라는 거대 전자기기 및 소프트웨어 회사를 이룬 창업주. 그리고 마케팅의 천재.[2]


생몰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

Contents

1 생애
1.1 유년 시절
1.2 애플의 시작
1.3 애플에서 쫓겨나다
1.4 NeXTStep
1.5 픽사
1.6 애플로 복귀
1.7 아이팟 신화
2 경영 철학
3 인간성 논란
4 여담
5 암투병과 사망
6 그가 남긴 것


1 생애 

1.1 유년 시절 

steve-jobs.jpg
수 많은 애플의 기기로 표현한 잡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정치학부 이민자로 후에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는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다 당시 잡스의 생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잔달리와 헤어진 상태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를 입양보내려 했다. 이에 잡스는 친부모와 헤어져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 불우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사나이.[3] (처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빌 게이츠와는 좀 다르다.) 이름도 양부모가 지어준 것. 폴 잡스 부부는 양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키웠으나[4] 어렸을 때 잡스는 부모 속을 많이 태우는 아이였다고. 아버지(폴 잡스)의 말에 따르면 스티브는 그렇게까지 천재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고아라고 아이들이 놀리는 바람에 아이들과 노는 대신 차고에서 안쓰는 부품을 모아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생부모는 정식으로 결혼, 소설가이기도 한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 을 낳았는데, 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으나, 만난 후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부모라는 작자들은 결혼한 후 몇 년만에 또 이혼.(...)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데, 친모와는 만난적이 있지만 친부와는 끝내 만나지 않았고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만을 진짜 부모로 여기고 있다.

그의 사업가 인생은 고등학교때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별볼일 없고 꿈없이 살던 잡스는 갑자기 전자공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HP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다.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공부해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HP(휴렛 팩커드)에 여름 인턴으로 채용된다. 그 곳에서 애플을 같이 세운 동업자인 워즈니악을 만난다. 인턴이 끝나고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칼리지에 입학해 한 학기만에 전공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려쳤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스탠포드대에서의 연설에 의하면 부모님의 저축이 몽땅 날아가는 것이 더 공포스러웠던 것 같다. 그의 전공은 물리였는데, 대학을 때려치면서 많은 교양 수업을 청강한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나중에 UI용 글씨체를 디자인할 때 서예 강의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동양철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 영향으로 종교는 불교. 결혼할 때도 스님이 주례를 섰다고 한다.

1.2 애플의 시작 

젊었을 적 훈남스티브잡스
그 뒤 1년 정도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있다가, 우연찮은 기회로 아타리(게임회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퐁(Pong)과 같은 초기 비디오 게임에 빠져버린 잡스는 컴퓨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타리에서 또 1년도 못 채우고(...) 사표를 낸다. 그 때 워즈니악은 아직 HP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운영하고 있던 '손수 컴퓨터 만들기 클럽'에 가입한 잡스(20세, 남, 무직)는 컴퓨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 후 워즈니악과 잡스는 의기투합하여 직접 컴퓨터 제작에 착수, 1976년 애플 I이라는 PC역사상에 길이 남을 기종의 첫번째 프로토타입을 롤아웃한다.[5] 비록 나무 케이스에 모니터조차 없는 투박한 플라스틱 기판과 실리콘 칩의 덩어리였지만, 꽤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안겨주었다.[6][7] 이 것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처음 애플I을 개발했을때 당연히 이것을 받아주려는 가게는 없었는데 이때 컴퓨터라는 것은 큰 회사나 대학, 정부기관에서만 쓰는게 일반 적이었고 PC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도 되있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잡스가 이것을 한 가게에 자신의 유창한 말빨(...)으로 팔기로 구두계약을 하고 생산을 했는데...애플 I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모니터고 뭐도 없이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 본체만있는 기기다. 당연히 모니터와 기타 입력장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주인은 당황하지만 대인배 적인 마인드로 그걸 그대로 판다. 그리고 그뒤의 일은 다들 아는바와 같이...말빨 영업의 신 고 잡스옹 참고로 애플 I의 가격은 666.66달러.(...)[8]

사실 애플 I은 거의 '기판만 있는' 수준의 물건이라 케이스 등은 자작 해야 하므로 거의 요즘으로 보면 '기판 키트' 수준의 물건이었다. 대량 생산되지도 않았고 동네 상점에다가 영업망을 뚫어서 판매했다. 구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워즈니악만이 A/S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제대로 상업적으로 출시된 제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플 II, II+ 등 후속 모델들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1.3 애플에서 쫓겨나다 

하지만 애플 II, II+ 이후로 애플은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한다. 일단 애플 II는 코모도어 등의 경쟁을 받기 시작하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들지 않고 스티브 잡스의 개입이 심했던 애플 III는 망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스티브 잡스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리사 프로젝트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원래 스티브 잡스는 자기 딸의 이름까지 붙인 리사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가 쫓겨나서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다. 그 이후 자기를 쫓아낸 리사 프로젝트에 대한 경쟁심이 불타오른 나머지 매킨토시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하며 주 90시간 근무를 시키는 등 공돌이를 갈아넣기 시작한다.

또한 스티브 잡스부터 리사 팀에 경쟁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애플 II 팀, 리사 팀, 매킨토시 팀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매킨토시 팀이 애플 본사에 걸어놓은 해적기를 리사 팀이 뺏어가기도 하고 (...) 매킨토시 팀이 "주 90시간 근무도 행복하다!" 라고 하자 리사 팀은 "주 70시간 근무했는데 매킨토시 팀보다 빨리 출시했다!" 라고 하고. 애플 II 팀은 "주 50시간 근무로 회사를 먹여살린다!" 라며 서로를 디스하기도(……).

당시 막 들어온 존 스컬리는 애플 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잡스의 말마따나 매킨토시에 올인하기 위해 리사 팀을 매킨토시 팀에 병합시키려고 했으나, 잡스는 "리사 팀 너희들은 정말 형편없어." 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기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고 리사 팀과의 병합이 거론되자 이번엔 연봉 문제가 터지는데, 당시 리사팀은 5만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었으나 잡스의 의해 반강제로 주 90시간 노동을 하던 매킨토시 팀은 고작 1 ~ 2만 달러를 받고 있었고, 이에 다시 매킨토시 팀의 분노가 치솟아오르자 잡스는 매킨토시 팀에게 보너스 제공을 약속하면서 잠재우는데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그동안 조용했던 애플 팀이 들고 일어났다.

이 잡스가 몰고온 대량 폭풍은 잡스의 애플 내에서의 위치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이사진은 물론 갓 들어온 존 스컬리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존 스컬리를 쫓아내기로 결심한 잡스는 과감하게 이사회에서 투표를 걸었는데, 이미 위의 사건사고들로 인망도 잃을 대로 잃었고 실적도 부진했고 그러면서 친목질도 심각했기 때문에 때문에 그냥 졌다.(……) 이리하여 1985년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중에 이 조치를 회사가 악의적으로 선량한 잡스를 내쫓은 것처럼 설명하는 곳이 많은데, 잡스 자신이 자초한 거다. 당시의 잡스는 정말 뭔가…심했다.(…)

참고로 이때에 투자처를 찾던 그는 그의 모교인 Homestead High School의 선생을 찾아 투자해주지 않겠냐는 질문을 했고, 당시 그의 성공 가능성을 그리 좋게 보지 않은 선생은 그러겠노라고 해 놓고 정작 입금은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생은 후에 스티브 잡스가 성공한 사실에 땅을 치며 후회하며 아직도 선생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도 애정이 남아 있는지 애플사의 컴퓨터를 종종 보냈다고...카더라

1.4 NeXTStep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와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NeXTStep이라는 이름의 차세대(그때 당시) 컴퓨터 개발에 매진했다. 이 때도 여러가지 기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완전 자동화 된 공장, 화장실이 하나만 있는 회사 빌딩 같은 것들.

그것의 일환으로 1986년에는 루카스필름에서 CG를 담당하고있던 픽사를 인수했는데, 이때는 NeXT프로젝트의 일환으로써 인수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잡스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아버렸다.

잡스가 온갖 열정을 쏟았던 NeXT는 기술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장에서 참패한 반면(무엇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픽사는 틴토이라는 토이스토리의 원조격되는 단편 애니를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어떻게 보면 안습.

결국 잡스는 결단을 내려 NeXT의 생산을 1993년 완전 중단했다. 하지만 NeXT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NeXT의 OS인 NeXTStep은 뒷날 애플에서 맥 OS X과 결국 iOS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상 지금의 맥은 매킨토시 클래식보다는 NeXT의 후계에 더 가깝다.

1.5 픽사 

위에서 이야기 한데로 픽사는 최초에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구입한 회사였다. 그런데 픽사에서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겠다고 하자 특유의 싸이코끼가 발동하여(...) 픽사 창업자들이 있는 회의실에서 물건을 집어던지며 광포화 했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픽사의 창업자 한 명을 아예 회사 연혁에서 삭제해 버리며 흑역사로 만들기까지 했다.

픽사는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팀과 그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기술데모와 3D애니메이션 외주를 맡던 창작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애초 잡스가 픽사를 인수한 이유는 오로지 자사 컴퓨터에 킬러 소프트로 탑재할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서였다. 존 라세터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창작팀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뒤, "누구 작품이냐?"고 묻고 대답을 듣자. 그 이후로 창작팀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한다. 나중에 픽사는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는데 당시 스트브 잡스의 다른 회사도 적자행진 중이었고 애플은 넥스트에 특허소송을 걸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의 잡스를 "보기 드물게 관대한 투자자"로 묘사한다. 창작팀은 스티브 잡스가 전혀 간섭하지 않아서 아직도 이 때 근무했던 픽사 창작팀 직원들은 스티브 잡스를 사장이라기 보다는 투자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회상한다.

이후 픽사가 3D 애니메이션 틴 토이를 발표하면서 영화제에서 시상을 하고 호평을 받게 되자 어쩌면 이게 돈이 될지 모르겠다라고 느껴 그제서야 자기 욕심을 버리고 3D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해주게 되었다. 잡스는 월트 디즈니 주식을 다량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디즈니에서 픽사 애니메이션을 스폰서 하고 마케팅을 담당하도록 로비를 했고, 덕분에 1995년 개봉한 토이스토리는 대 히트를 기록한다. 그리고 토이스토리의 성공과 픽사 덕분에 잡스는 실패한 CEO의 대 명사에서 차세대 전자산업의 리더로 다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잡스가 픽사의 상업적인 성공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기가 직접 경영방향을 정하고 컨트롤 하려 한 때는 픽사의 흑역사에 가까웠고 잡스에게도 큰 이익이 없었다. 도리어 프로젝트에서 한 발 빼고 자금과 스폰서줄을 잡아준 뒤 알아서 일하게 시켜놓자 대박을 거둔것. 이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겠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잡스가 꽤 많이 바뀐것도 사실이다.

2012년 픽사는 헤드쿼터 빌딩을 새로 단장하면서 건물 이름을 "스티브 잡스 빌딩"으로 명명했다.

1.6 애플로 복귀 

한편, 잡스도 없고 워즈니악도 없던 애플사는 잡스시절 부터 계속되던 부진으로 인해 겨우겨우 연명만 하는 수준이었다가, 결국 1996년 Nextstep사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경영컨설턴트로 불러들이는 쪽팔린 짓을 하고 만다.(...)

잡스가 애플사에 돌아왔을 당시(1997) 애플은 무려 1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CEO인 길 아멜리오는 온갖 삽질을 반복하며 직원들과 이사회의 신뢰마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아멜리오가 잡스를 복귀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빌 게이츠는 당장 애플로 달려가 아멜리오에게 스티브 잡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실수이며 결국 당신은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9]. 이러한 상황에서 잡스는 어렵지 않게 경영권을 장악하고 아멜리오를 쫒아낼 수 있었다.

잡스는 복귀하고 빌 게이츠와 쌍방간의 소송 취하 합의를 이끌어 내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소송을 합의로 마무리시킨다. 또, 애플은 잡스가 경영권을 잡은지 1년만에 4억달러 흑자로 돌아서는 기적을 연출해낸다. 사실 기적이라고 하기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한데 아멜리오는 최대한 많은 제품을 개발하고 많은 사업에 손을 대는 방식의 경영을 하고 있었고, 이와 반대로 경영권을 잡은 잡스는 제품의 종류를 줄이고 꼭 필요한 사업을 제외한 기타 사업에서 손을 때며 동시에 직원 3000명을 해고했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애플의 수익성을 회복시키며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애플을 간신히 살려놓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의 애플의 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제품은 1998년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반투명케이스의 일체형 컴퓨터인 iMac G3이었고, 그 디자인을 책임졌던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는 이후 애플의 디자인 부문을 이끌면서 뒤에 부사장의 지위까지 승진한다.

이후 애플의 호전된 경영 성과에 더해 픽사의 두번째 작품 벅스라이프까지 대박을 터트리면서 잡스는 완전히 정상에 올라선다.

1.7 아이팟 신화 

아이팟 나노 1세대를 소개하는 잡스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01년 그는 아이팟을 세계시장에 선보였는데, 이 MP3플레이어는 아이튠즈와의 연동작전이 성공하면서 아이리버등의 제품들을 제치고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대히트를 치게 된다.[10]
그리고 아이팟은 무려 1억대나 넘는 물량을 팔아치웠다. 아이튠즈는 아이팟에 넣을 수 있는 MP3음원을 판매하고 있으며, 1억 5000만곡 이상의 노래를 매년 팔아치우고 있다.

그리고 2004년 애플의 CEO로 완전히 복귀했다. 2004년 제품 설명회에서의 CEO취임 선언은 가히 충공깽[11]

이런 전성가도를 달리던 도중 잡스는 2004년 8월에 췌장암 시한부 선고라는 청천벽력을 맞게 된다. 온갖 역경을 넘어 다시 우뚝 섰다 싶었던 잡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특히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암으로 애초부터 발생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발견시기도 보통 늦기 마련이어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잡스의 췌장암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췌장암 중에서도 희귀한(약 1%) 섬세포암이었다. 잡스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동안 잘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후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문서를 조금만 더 읽어보자.

스탠포드 대학 졸업축사 중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진단을 받은 바로 그 날) "나는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와 창자를 거쳐 췌장의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약으로 잠든 상태였는데, 같이 있던 아내가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암은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췌장암이었기 때문입니자. 나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iMac등의 출시로 데스크탑 시장에서도 착실하게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Mac OS X도 이번에 레오파드가 새로 출시되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매킨토시에 인텔의 CPU를 쓰고, 부트캠프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윈도우와의 호환성을 확보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2 경영 철학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방식을 쓰면서 많은 발표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너무 단적이라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의 경영철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

1.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2.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3.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4.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 높이에 맞춰라

3 인간성 논란 

스티브 잡스가 따분한 IT계의 인물인데다가 일반인들이 그다지 존경하기 쉽지 않은 기업가라는 측면에서 잡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독특한 일이다. 이것은 "명문가 출생 - 가난한 어린시절 - 기연으로 신분상승 - 성격과 개인의 결함으로 나락으로 추락 - 전과 다른 면모로 화려하게 부활"이라는 통속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삶을 실제로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잡스의 인간성은 인생의 굴곡만큼이나 변화가 많았다.

어린 시절 잡스는 누구의 눈에나 띄일 정도로 대단한 아이는 아니었고, 성격도 어른이 안된 사춘기 소년같았다. 예를 들어 잡스는 실용학과 쪽으로 지원하면 스탠포드 대학에 장학금을 얼마간 받으며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풍족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내심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려고, 서부에서 등록금이 비싸기로는 탑을 다투는 리드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경제적 부담을 이용해서 부모를 포기시키려한 것이다. 그래도 부모가 희생해서 학비를 마련해 준다고 하자. 실용성하고는 담을 쌓은 철학쪽 학과를 선택한다. 그래도 부모는 그를 대학에 보냈다. 자신의 의도가 좌절된 것이 너무 화가나서 잡스는 대학으로 떠나올 때 인사는 커녕 부모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12] 스티브 잡스 전기에 따르면 인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한다. 또, 리드 대학 중퇴의 주 이유는 부모에게 가해질 경제적 압박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애플로 인해 갑부가 된 이후 잡스는 말그대로 돈많은 자아도취형 돌아이였다. 예를 들면 애플에서 나올 당시, 옛 동거녀였던 크리스 앤이 딸 리사를 데려오자 잡스는 그 딸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무정자증이다." 라면서 변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 일은 까들에게 두고두고 까인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자기도 무지 쪽팔려하는 거 같다. 딸을 버려놓고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더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데 정작 당시 개발하고 있던 PC는 '리사'로 지었다[13]. '리사' 컴퓨터는 말아먹었지만(...) 이름을 딸 이름으로 지어준 걸로 봐서는 나름대로 멋진(?) 아버지라 할 수 있을지도...혹은 지능적인 딸 모욕이거나

잡스는 실패를 경험하고 많은 세상의 이치를 알게되면서 안드로메다에 보냈던 개념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딸에게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잡스가 리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1991년에 로렌과 결혼한 이후(리사 10대 이후)였고, 리사를 받게 된 것도 리사의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키울 처지가 안 되자 딸(리사)만 잡스의 회사에 남기고 떠나서 그런 것이다. 비록 나중엔 딸을 키웠다고 할지라도 이런 잡스를 나쁘다면 나쁘지 좋은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다.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는 책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는 같이 일하기에는 괴로운 상사였다고 이야기된다.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확실히 일은 굉장하게 해내지만 부하직원들한테 자신의 뜻이 잘 전달이 안 되거나 자신의 뜻대로 일처리를 하지 못했을 때 심하게 화를 내는 부류의 상사라고 한다. 일례로 애플사에서 배달 운반용 차를 대량 구입했는데 이 차의 색깔이 애플사 건물의 색깔과 잘 매치되는 흰색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가 떼를 쓰는 바람에 회사가 상당한 금액을 다시 들여 차의 색깔을 모조리 그가 원하는 대로 바꿔 주었다고 한다.

이런 스티브 잡스의 막장행보에 관해서는 윌리엄 사이먼 저 'iCon'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워낙 신랄하게 비판한 터라, 기껏 MS와 대립각을 세워 정의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잡스로서는 대단히 화가 나는 일이었는지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잡지를 맥스토어에서 다 치워버렸다고.

스티브 워즈니악과도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아직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오기 전 워즈니악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잡스에 대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잡스는 워즈니악이 애플의 주식을 부인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 극구 말렸다고 한다. 애플은 창업자의 것이 아니고 주주의 것이고, 주식이 없으면 애플에게 워즈니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연히 물욕이 별로 없고[14] 베풀어주기 좋아하는 워즈니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식 대부분을 나눠주었고, 애플의 주식을 받은 사람들은 무두 그것을 팔아 써버렸다. 워즈니악과 잡스의 관계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 폰의 성장세가 두드러지자 그 선봉에 서 있는 HTC에게 멀티터치 지적재산권 분쟁도 걸었다. HTC의 뒤에 있는 구글과 한판 크게 붙을 기세.[15]

예전에는 유닉스의 그래픽 UI등에도 지적재산권으로 분쟁을 걸려 했지만  측에서 '님들 MAC OS 기본은 우리 유닉스에서 따왔심 ㅋㅋ'라는 한마디에 버로우를 탄적도 있다고 한다.(여담으로 빌게이츠도 오픈 오피스에 대해 재산권 분쟁을 걸려다가 윈도우 Java의 관련 기술에 대해 언급하자 버로우 탔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FBI가 그를 조사한 보고서를 정보공개법[16]에 따라서 공개했는데 그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끝내주게 괴팍하고, 소심한 구석이 있는데다가 독불장군 기질 등등. 능력만 좋지 않았으면 딱 상대하기 싫은 사람의 유형(...)

쉽게 말하자면 인간 쓰레기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이다. 외국 사이트 등을 둘러보면 소시오패스가 성공한 훌륭한 예라고 써있기도 한데 이사람은 행동양식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긴했지만 정확한 진단은 받지 않았기때문에 함부로 취급하긴 그렇다. 참고로 아직 소시오패스라는 병명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잡스의 뒤통수 치기의 행각에 대해서 정리해놓은 글이다. 극단적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만 담아놓은이야기 잡스의 행각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본래 능력있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탁월했지만 그 멋같은 성격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넥스트의 1992년에서 93년간의 1년 동안 부사장급 9명 중 7명이 떠났을 정도. 하지만 이 시기에 인생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스티브 잡스의 성격은 변화를 겪는다. 이 때의 변화에 대해서는 뉴욕 타임즈의 "스티브 잡스가 향야에서 배운 것"#이라는 기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전 잡스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자신이 지시하고 부하가 뭐라든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잡스는 드디어 부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이전 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오로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잡스를 띄우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고 오로지 잡스를 위한 쇼였다. 하지만 복귀 이후 이런 모습은 없어지고 각 부분의 담당자들이 파트에서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애플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디자인의 조너선 아이브, 관리의 팀 쿡, 소프트웨어의 스캇 포스톨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고,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협상의 에디 큐, 마케팅의 필 쉴러, 하드웨어의 밥 맨스필드라는 애플의 분야별 전문가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의 잡스라면 이런 인물들의 건의는 다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아주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고, 잘된 모든 공은 자기가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스티브 잡스의 독차지 때문에 사람들은 실무진들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인간성의 결함이 다듬어진 스티브 잡스에게 드디어 능력있는 인물들을 붙잡아 두고 조화시키는 능력이 생긴것이다. 결국 이러한 스티브 잡스가 죽자 스캇 포스톨은 제어가 안되기 시작해 축출되었고 밥 맨스필드는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던 것이다.

4 여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업가'이지 절대 '개발자'가 아니다.
물론 IT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는 (얼마 안되는)경영자임은 사실인데 위의 FBI 보고서에는 '그런데 기술 부분에서는 좀 거시기...' 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스티브 잡스 코스프레를 하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 리바이스 501, 검은 쭉티[17], 그리고 one more thing[18].

스탠포드 대학에서의 연설 중에 들어간 한 문구,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만약 하루 하루를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 생각이 옳은 날이 올 것이다.)
당연하지 누구나 언젠간 죽으니까...

그도 구글처럼 연봉은 적게 받는 인물로 유명하다.(연봉 1달러) 대신 주식(애플, 그리고 디즈니)이 있으니까...애플, 디즈니 주식을 반 정도 매각해 약 5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게다가 추가적인 옵션까지...

2008년 건강 악화설이 돌자 애플 주가가 충격을 받을 정도로 비중이 큰 애플의 중심인물. 사실 애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스티브 잡스 은퇴후 애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2011년 초에 잡스가 병가를 낸 사실이 확인되자 애플의 주가가 춤추었고(...) 많은 사람들이 잡스 이후의 애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1#2

아이폰 4의 수신률 불량 문제(왼쪽 하단을 잡으면 수신율이 현저히 떨어짐)에 대해, 개인 이메일로 "그렇게 잡지 않으면 될 거 아니냐"라고 대답한게 밝혀졌다. 개인 이메일이라면 시니컬한 성격의 잡스니 봐줄 만하겠지만, 문제는 저게 아이폰 문제에 대한 애플의 공식 입장임이 드러났다. 제안한 해결책이 그렇게 잡지 말든가, 범퍼 악세서리 사세요. 덕분에 여러 군데에서 신나게 까이고 있다. 그리고 모두의 우려대로 범퍼 무료제공으로 대충 때웠다.[19][20]

젊었을 때는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가서는 은행장의 넥타이가 촌스럽다고 솔직히(...) 말한다든가, 프랑스 대통령 주최의 오찬에 참석해서는 느끼한 프랑스 요리 말고 이탈리아 요리는 없습니까. 지난 주에 이탈리아에 가서 먹었더니 참 맛있던데하고 미테랑 대통령께 직접 요청하거나 하는 용자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1]

사실 대학시절부터 이미 공짜로 장거리 전화를 거는 기계장치[22]인 블루박스를 제조해서 팔아먹었고[23], 심지어는 그걸 가지고 로마 교황한테 공짜 장난전화를 거는 용자짓도 한 바 있다. 국내 단위로 해도 코렁탕 먹을 짓을 국제 레벨로 벌이다니 하지만 정확히는 스티브 워즈니악의 작품이다. 심지어 교황한테 장난 전화 에피소드도 스티브 워즈니악의 유쾌한 장난 가운데 하나였다. 교황한테 전화는 걸었으나 시차로 인해 세벽 5시이기 때문에 교황이 잠자고있다고 대답이 왔다고. 모스크바 국제회담을 들먹거리며 목소리를 흉내내 가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ㅎㄷㄷ. 당시 둘은 그때까진 절친이었고 파트너였고 블루박스를 파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벌인 것은 스티브 잡스이니 공범이라고 할 만하지만, 의도했든 안했든 잡스가 워즈니악의 공을 가로챈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편, 존 스컬리에 의하면 잡스는 현실 왜곡장 뿐만 아니라 눈에서 레이저도 쏜다고 한다.[24]

그 역시 모에선을 피해갈 수 없었다.
평소 자가용 벤츠에 번호판이 없는 채로 다녔다. 국내에서는 이 이야기에 불법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지만 사실은 캘리포니아 교통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라는 워즈니악의 증언이 있다. # 이에 캘리포니아 교통당국은 따로 특혜를 주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방법은 전기에서 밝혀졌는데, 새 차를 인도받고 6개월이 지나기 전에만 번호판을 달면 되는 캘리포니아법에 따라 6개월마다 새 차를 리스했다고 한다.

또 애플의 주차장 중에서 장애인 구역에 차를 대곤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워즈니악에 의하면 애플 주차장에 세워둔 잡스의 벤츠가 털린 적이 있어서(…) 사무실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대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 이에 애플 직원들은 차에 Park Different라 써진 쪽지를 붙여놓는걸로 대응(...)[25]

문명 5 확장팩에서는 위대한 상인으로 추가되었다. 등장하는 위인 계열 유닛 인물 중에서는 가장 최근에 사망한 사람일 듯.

5 암투병과 사망 

2010년 말에는 스위스로 병가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그의 건강이 우려되고 있다. 거기에다가 희귀암에 걸려(...) 애플의 주가가 폭락(...)해버렸다. 나쁘게 말하자면 잡스의 건강에 따라 애플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26]

병가에 대해서, 2011년 2월 17일 현재 병이 더 악화되어, 의사한테서 6주 시한부를 판정 받게 되었다는 루머가 올라왔다. 현재 인터넷에 기사가 퍼질대로 퍼지고 누리꾼들이 여러곳에서 술렁이고 있는 상황. 애플 측에서는 '노 코멘트'. 문제는 이 루머의 출처가 인콰이어러로 밝혀져 있었다는 것. 당연히 해외 언론에서는 이런 것은 출처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했다. 얼마 후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실리콘밸리 오찬에 참석하기로 하여 루머를 불식시켰다. 오바마 대통령과 미팅 예정 - ABC발 뉴스[27] 게다가 같은 달에 캘리포니아에 자택 재개발을 신청했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6주 시한부인 사람이 집을 새로 지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한국언론에서는 시한부설을 계속해서 반복 보도하더니 급기야 SBS와 MBC가 간판 뉴스시간대에 이걸 방송해버렸다. 나중에 SBS는 스스로도 쪽팔렸던지 "미국은 스티브 잡스가 영웅이기 때문에 보도 안 했던 것"이라는 개드립을 쳤다. 힐러리의 입양은 언제 보도할 거냐[28]

그리고 2011년 3월 3일 아이패드2 발표회장에 강림하여 "나 아직 안죽었다"고 전세계에 선포하였고, 잡스 시한부설로 위태위태하던 애플의 주가는 폭등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된다.

다만 후에 iOS 발표때 다시 등장했을땐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와 주가가 다시 폭락해 버렸다...(정녕 애플주식자체인 잡스)

WWDC 2011 첫날, 오전 10시의 발표회에도 재등장. 더욱 수척해졌다.

2011년 8월 25일, 결국 CEO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히고, 대신 애플 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CEO 사임 이후 최초로 언론에 공개됐다는 사진이 있다. # 다만 옷차림과 생김새, 출처를 생각할 때, 인콰이어러 6주 드립처럼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실제 사후에 공개된 잡스의 모습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

2011년 10월 5일,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날 사람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인이 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 다음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 세계의 인사들이 남긴 추모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 "가장 위대한 미국의 혁신가 중 하나였다. 다른 생각을 할 만큼 충분히 용감했고, 자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충분히 대담했으며, 실제로 해낼 만큼 재능이 있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잡스가 발명한 기기로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는 것만큼 그에게 큰 찬사는 없을 것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 "스티브와 30여년 전에 처음 만나 서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동료이자 경쟁자, 친구로서 지내왔다. 나는 스티브와 일할 기회가 있었던 행운아였다. 스티브가 매우 그리울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 "스티브, 멘토가 돼 주셔서, 친구가 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 "래리 페이지와 나는 비전과 리더십에 대한 영감을 찾기 위해 쿠퍼티노를 바라봤다." "스티브, 최고를 위한 당신의 열정은 내가 지금 이 메시지를 쓰고 있는 '맥북'을 포함해 애플의 제품을 만져 본 누구에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래리 페이지. 구글 공동창업자 = "내가 구글의 CEO가 됐을 때 잡스는 매우 친절히 대해줬고 건강이 안좋을 때도 그의 지식과 조언을 들려주느라 시간을 냈다. 구글 직원들과 내 심정은 잡스의 가족과 애플 직원들과 같을 것이다."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공동창업자 = "전화를 걸어온 기자를 통해 부고를 접했을 때 존 레논이나 케네디의 피격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뇌리에서 가시지 않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특출한 경영 사상가였으며 높이 올라온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그가 기존의 발상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생각해 내는 데에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 "우리가 젊은 개발자였던 시절부터 그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던 기술들을 시험 도입해보고 미래의 발전형은 어떤 모습일지를 탐구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당시 우리는 자본도, 경영을 해본 경험도 없이 부직업으로 돈벌이해가며 집에서 일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미래를 뒤바꿀 만한 아이디어만으로 전전긍긍하며 승부하는 다른 수백만의 젊은이들과 같았다." … "우리의 협력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초창기에 그는 나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었고, 나에게 있어서 그를 동업자로 얻은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경영인으로서 엄격하고 가차없었다지만 나에게는 항상 대단히 친절했고 좋은 친구였다. 나는 그를 그리워 할 것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들은 세계를 변화시킨다. 유족들을 비롯해 그의 지성과 재능을 존경했던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폴 앨런.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 "스티브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우리는 뛰어난 걸작들을 탄생시킨 기술계의 개척자를 잃었습니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 "그는 지난 50년동안 미국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CEO였습니다.애플을 창업한 데 그치지 않고 첫 10년동안 회사를 성공기로 이끌기도 했을 뿐 아니라 이후에는 쓰러져가던 애플을 재건하는데 일조했죠. 그 위기를 이겨내고 오늘날 같이 큰 규모의 회사로 성장시킨 건 역사상 그 어떤 미국 기업 내에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일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스티브는 공돌이들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기술자인 동시에 예술가였던 스티브는 그 예술적인 부분들이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름답고 간단한 상품이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했죠. "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최고경영자 = "그는 믿을 만한 조언자일 뿐 아니라 좋은 친구였다. 잡스가 남긴 유산은 그가 만든 제품이나 구축한 비즈니스를 초월해 그에게 영감을 받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그가 변화시킨 삶, 그가 정의한 문화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한 시대를 정의하는 '오리지널'이었다. 디즈니는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잃었다."

루퍼드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 "오늘 우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자 창조가, 기업가를 잃었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최고경영자였다. 그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그동안 잡스 덕분에 받았던 엄청난 충격을 떠올려 본다. 그는 사람들이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를 접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주인공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 = "평소 존경했던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의 별세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 고인은 세계 IT산업에 비전을 제시하고 혁신을 이끈 천재적 기업가였으며, 그의 창조적 정신과 뛰어난 업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가족과 동료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의장 ="스마트폰이야말로 융합 기술의 아이콘이다. 우리가 지금도 토머스 에디슨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100년 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이름은 모를지라도 스티브 잡스의 이름은 기억할 것이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 = "어릴적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사람과 동시대에 살았기를 바랐던적이 있었다. 우리는 지구위에서 스티브잡스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축복받았던 삶이다. 그를 기린다. 우리의 영웅이여, 우리의 영원한 맨토여"

리처드 스톨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설립자 = "죽어서 기쁜건 아니지만, 사라져서 기쁘다."

이 외에 각종 IT 관련 업체들도 줄줄이 잡스의 부고에 대한 애도의 표시를 내걸고 있다.

하지만 삼성은 고인드립을 시전했다. 사실은 아이폰 4s관련 정보를 입수한 삼성이 애플을 비웃었는데 하필이면 묘하게 스티브 잡스 사망일자와 겹친 것 뿐(…). 그리고 삼성도 최지성 부회장(CEO) 명의로 조의문을 발표하고 스티브 잡스의 장례기간 동안 기존 진행되던 소송에 대하여 함구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정말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에서 레알 고인드립을 시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했다.이래서 예수쟁이라는 말이 나온거지. 그리고 리처드 스톨먼도 고인드립을 시전했다(...)[29] 해가 바뀌어도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잡스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삼성전자 주식이 급등했는데 이는 일본 대지진 이후 한국 주식이 오른 것과 함께 '시장에 눈물은 없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예시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덤으로 생전의 호적수였던 빌 게이츠가 각종 포털 사이트들의 검색어 목록에 올라갔다(……).

불쌍하게도, 여러가지 의미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보니 고인드립이 범세계적으로 마구마구 생산되었고, 또한 그의 죽음을 이용해서 악성코드를 퍼뜨리는 인간들도 있등장하였다. 'Steve jobs alive'같은 제목의 메일을 보내고 메일 안의 링크를 클릭하면 악성코드에 컴퓨터가 감염되는 식으로.

사망 직후 전세계에서 목빠지게 기다리던 스티브 잡스의 공식[30] 전기가 출간되었다. 책 자체는 2011년 11월 21일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스티브 잡스 본인의 사망으로 인하여 집필 속도에 불이 붙음에 따라 한달이나 이른 2011년 10월 25일 전세계에 동시에 출간됐다.[31] 제목은 Steve Jobs.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 잡스 자신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모든 접근 권한을 얻었다고. 출판도 안 된 상황에서 국내외 베스트 셀러에 올랐었다. 결국 출간 하루만에 가뿐히 1만부 돌파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어판 번역이 구리다는 말이 제기되었다. 단 10쪽 분량에서도 오역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보러가기 번역가 안진환씨가 촉박한 시간 때문에 자신이 운영하는 번역회사 직원들에게 대신 나눠서 번역을 시키고 자기 이름만 올려놓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출판사인 민음사가 카페를 통해 오역을 접수받고 재판때 수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번역서에 비해 이 책이 그렇게 번역이 나쁜 편만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번역가들 모임에서는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몇몇 오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큰 문제는 아니라는 정도로 의견이 모여졌다고 한다. 이보다 번역 엉망인 책은 수없이 많다. 이 정도면 너그럽게 넘어가자.

월터 아이직슨에 의하면, 아직 미공개 신제품에 대한 이야기 등 애플의 전략 사정으로 올리지 못한 내용이 많으며, 이는 나중에 재발간으로 보태겠다고 밝혔다.[32] 이 내용중에 계속 떡밥이 나오는 새로운 TV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은근 많다.

사후에 그가 대체의학에 의존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잡스는 2003년 10월 이미 췌장암 판정을 받았으나, 이듬해 3월까지 수술을 거부하고 정신수행, 식이요법과 침술 등으로 암을 고치려 했다. 잡스는 몸에 칼을 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부인이 설득하고 난 뒤에야 겨우 수술을 받아들였다. 수술을 받아들은 뒤에도 자신의 병에 대해 치밀하게 공부한 뒤 치료법까지 지시하는 등 전문가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발견 당시에 췌장의 5%만 퍼져 있었던 암은 9개월 뒤에는 췌장 전체로 퍼졌고 수술을 한 뒤에도 전이가 계속 되어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 "Oh wow. Oh wow. Oh wow" 였다는 사실이 그의 여동생 Mona Simpson에 의해 확인되었다. #

사후 1주기인 2012년 10월 5일애플의 홈페이지 메인에 추모 동영상과 CEO 팀 쿡의 메세지가 게재되었다.

현재 스티브 잡스의 영화는 두편이 제작되거나 제작중에 있는데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Jobs"는 조슈아 마이클 슈턴이라는 주로 인디영화를 찍었던 경력의 감독이 찍는 영화이며 전기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2002년까지의 이야기만을 다룬다. 처음에는 독립영화였으나 애쉬튼 커쳐의 미칠듯한 싱크로율 덕분인지 애플사에서도 간간히 도움을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 "Jobs"가 공개되는것이 확정되었다. 잡스역을 맡은 배우는 애시튼 커처. 얼굴 골격이 비슷한지 생전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Cj2T&imgurl=https://t1.daumcdn.net/cfile/blog/03606B4F50BED7E027
Jobs의 한국개봉은 8월 29일로 확정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헐리우드의 명망있는 각본가인 아론소킨이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맡게된 소니 픽처스의 스티브 잡스라는 영화가 준비중인데 아직 각본 작업 중이고 주연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 영화야말로 스티브 잡스 전기에 기반한 영화이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자문을 맡고 있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스티브 잡스 전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 그가 남긴 것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능력있는 CEO를 넘어 IT계를 주도한 인물이었고 또한 실적이 부진하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회사들을 뛰어난 창의력과 적극성으로 기업가치를 크게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곤경과 실패, 그리고 몰락 역시 경험했으나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화려하게 재기했다는 점에 있어서 본보기가 될 만한 케이스. 암이 아니었다면 그의 열정과 성취욕으로 볼 때 노년까지 일선에서 왕성히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렌드를 창조하고 자사 제품을 새로운 메인스트림의 정점에 올려 놓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그의 탁월한 안목을 여러 번 증명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마우스, GUI, 컴퓨터 그래픽스, mp3 플레이어와 스토어, 터치 스크린 핸드폰, 앱 스토어, 태블릿 PC 등은 물론 그만의 발명품이나 유물은 아니나 이들의 상용화와 보편화를 가속화시키고 인지도를 대폭 높이는 데에 잡스가 크고 작은 기여를 했다는 점은 괄목할 만하다.

한편 그는 새로운 기기들의 단순함과 조작의 편리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적이고 참신한 디자인을 선보여, 출시된 제품들을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하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또한 이미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서 단시간 내에 강한 입지를 구축하고 선구적인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사업 능력이 상당히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애플이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 관리와 활용에도 능숙했으며, 20세기와 21세기의 IT시장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선 많은 아쉬움과 실망감이 있으나 그의 존재감과 안목, 기획력과 실행력은 독보적이었던 만큼 잡스를 역사의 저 너머로 보낸 애플이 어떤 행보를 보일 지가 주목된다.

  • 애플 측 공식 반응

    Apple has lost a visionary and creative genius, and the world has lost an amazing human being. Those of us who have been fortunate enough to know and work with Steve have lost a dear friend and an inspiring mentor. Steve leaves behind a company that only he could have built, and his spirit will forever be the foundation of Apple

애플은 한 명의 비전과 창의성을 함께 지녔던 천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정말 놀라웠던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던 저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그를 잃었습니다. 이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회사를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

  • 애플 이사회 공식 반응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스티브 잡스가 5일 타계한 것을 전하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스티브의 명석함과 열정, 에너지는 우리 세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끝없는 혁신의 근원이었다. 세계는 스티브의 덕분에 진보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로렌과 그의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놀라운 유산에 감사를 보낸다.
----
  • [1] 이 말은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http://www.eastasia.co.kr/331 참조. 그런데 말하는 주체가 달라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
  • [2] 다만 잡스의 마케팅이 굉장히 특별한 것은 아니며, 사실 다른 회사들도 비슷한 마케팅 전략을 취할 때가 많다. 잡스만의 스타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3] 대학원생이었던 잡스의 친모는 잡스 부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입양을 거부하려 했으나 잡스부부가 무슨일이 있어도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양에 동의했다.
  • [4] 스티브가 어렸을 때 양어머니는 잡스를 수영교실에 보내기 위해 가정부 일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열심히 키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잡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는 식으로 지극정성으로 키운 나머지 조금 버릇이 엉망이 되어버린 듯...인데 이처럼 대성한 것을 보면 아예 '버릇을 들일 것'이 아니라 그냥 원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듯 하기도 하고...
  • [5] 근데 워즈니악은 자서전에 Apple I, Apple II 할 것 없이 스티브(잡스)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혼자 만들었다라고 적어뒀다. (그리고 사실이다.)
  • [6]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왜 그 놀고먹는 백수(잡스)와 45:45로 나누느냐?!" 라고 했다고 한다.
  • [7] 그런데 아것은 잡스가 영업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업직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쪽 일이 원래 사람만나서 밥먹고 커피먹고 하는것이 일이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그만큼 인간관계가 영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 [8] 혹자는 잡스와 워즈니악이 악마의 숫자 666을 좋아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숫자가 반복되는 게 멋져서 그랬다고 (...)
  • [9] 빌게이츠가 질투에 눈이 어두워 그랬다기 보단, 이미 잡스 본인또한 경역악화로 애플에서 쫒겨난 위인인지라 실패한 전 경영자를 다시 불러 들이는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 [10] 노하우와 함께 경험도 경험이니 만큼 전반적인 기술력 자체는 아이리버가 뛰어났으나, 터치와 함께 디자인등의 새로움으로 승리했다.
  • [11] 사실 잡스는 설립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애플의 CEO 직함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젊은 잡스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사회에서 그에게 CEO 자리를 맡기지 않았고, 자신도 CEO를 맡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고 한다. 이때서야 처음으로 애플의 CEO가 된 것이다.
  • [12] 미국에서는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동등한 관계에서도 모욕으로 간주될 수 있다.
  • [13] 리사는 1978년생. 그리고 리사 컴퓨터는 1978년에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추가적으로 나온 거에 따르면 "Local Integrated Software Architecture"의 약자는 Lisa에 끼워맞췄다고 한다.
  • [14] 어느 정도냐 하면 워즈니악은 초반에 잡스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잡스가 그걸 개인적으로 써버리지 않고 다시 회사에 썼기 때문에 그냥 넘겼다고 한다.
  • [15] 2011년 7월 판결에서는 HTC의 손을 들어주어 역관광#(알겠지만, S3은 HTC계열사)이 되나 싶었으나 동년 11월 22일 판결에서는 다시 뒤집혀서 애플의 완승
  • [16] 미국 정부기관이 보유한 문서를 일반 사회에 공개하는 법령. 연방대법원이 명령하면 해당 기관은 거의 무조건 해당 정보를 공개할 의무가 있다.
  • [17] 이 제품은 잇세이 미야케의 제품이다.미국의 세인트 크로의 제품이라는 것은 그 회사의 언플로 밝혀졌다
  • [18] 스티브 잡스가 프레젠테이션 때 자주 써먹는 문구이다.
  • [19] 그런데 이것도 소비자들의 소송으로 얻은 결과다. 거기에 '소송에 참여한 사람'들만 보상 받았다.
  • [20]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나오는 내용으로는 이런 성의없는 대응이 아이폰4의 결함이 언론에서 과장된 바와 다르게 큰 문제가 아닌듯 보이기 위한 '계획된 대응'이었고, 결과적으로 아이폰4는 전작의 절반에 불과한 환불률을 보였다. 개객기
  • [21] 이러한 점 때문에 애플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를 위험요소로 여기고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잡스가 스스로 존 스컬리를 데려와주시는 바람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2] 미국은 시내 전화는 기본료에 포함으로 공짜이다.
  • [23] 정확히 애플1과 마찬가지로 스티브 워즈니악이 모두 만들었고 잡스는 팔아먹기만 하였다.
  • [24] 정확히는 레이저를 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고 함.
  • [25] 애플의 광고 슬로건인 Think Different의 패러디
  • [26] 2011년 1월 17일 현재 병가를 낸 상태. 스티브 잡스 또 병가, 이번에도… 상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췌장암 혹은 이의 후유증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병가가 알려지자 마자 애플 주가가 6.6% 급락, 시가총액 220억달러 증발...ㅎㄷㄷ
  • [27] 근데 또 언론에서는 "등만 보인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배려해주고 있는 거라는 개드립을 쳤다. 마크 주커버그도 시한부다. 역시 한국 언론은 까야 제맛
  • [28] 사망후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인콰이어러의 6주 시한부는 루머였지만, 실제로 2월에 자신이 오래 살수 없음을 알게되었고 그때부터 지인들을 만나며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29] 완전 고인드립은 아닌 듯 싶은게 일단 그를 추모하면서도 비판을 가한 것으로 미뤄봐서는 완전 고인드립은 아닌 듯 싶다. 하긴, 애플의 그 뭣한 독자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 [30] 이미 잡스에 대한 전기는 꽤 있었으나, 그동안은 잡스가 공인을 하지 않은 것들.
  • [31] 처음에는 자서전이라고 써있었지만 전기가 맞다. 번역본 광고도 '전기 출간'이고.
  • [32] 실제로 전기에는 출간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아이패드 교과서에 관한 언급이 한 문단 정도 넌지시 있었다.

원본 http://mirror.enha.kr/wiki/%EC%8A%A4%ED%8B%B0%EB%B8%8C%20%EC%9E%A1%EC%8A%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