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미스테리

도올이 본 기독교

by 501™ 2014. 3. 14.

도올의 비판-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해도 그것은 분명 인간의 말(언어)을 빌린 것입니다.

인간의 말인 이상, 그것은 인간의 말의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기독교성서의 원본(지구상의 최초의 기록)은 희랍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랍어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희랍어 원본이야말로 예수님말씀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

이것은 매우 무식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수는 희랍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는 지금은 死語가 되어 버린 아람어라는 토착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원본도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단지 예수님 말씀일 것이라고 떠도는 말들을 예수님이 죽은지 4∼50년 경 후에, 그것도 아람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하여 적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몰랐던 희랍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성서는 이러한 최초의 기록에서 수십차의 개정(가감)과 번역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엉터리 번역이 빚어낸 성서의 문제들은 싸구려 엉터리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의 번역판들이 빚어내는 문제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있는 성서에도 보통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글개역판이고 하나는 공동번역판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판의 성경이 똑같은 장 똑같은 절의 기술에 있어서, 문장의 표현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게 맞습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 하나님 말씀입니까?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한 자 한 획도 어김없이 모두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라면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성경에는 예수의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도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러나라 말 번역이 있을 뿐입니다.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니까요

 

 

도올의 비판-야훼참배는 신사참배와 동일

기독교인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이지 유대교인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인이 유대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유대교라는 것은 반드시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혈통성(the Jews) 위에서 성립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기독교인일 수 있고 유대교인일 수 없는 것은, 기독교가 유대교가 갖는 혈통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상대성을 보편화시킨데서 기독교는 성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종교적 의미는 철저히 보편적이고 철저히 추상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이라 함은 유대민족이 갖는 민족 문화적 성격이 역사적 이해의 방편으로는 고려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곧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는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는 유대인의 테두리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곧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 민족의 신도(shintoism)의 테두리에 머물러야 하는 것과 같다. 신사참배(神社參拜)에 굴욕을 느꼈던 사람들이 왜 야훼참배에는 그렇게 일고의 반성도 없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보는 눈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야훼는 어디까지나 유대민족의 신(神)이다. 야훼는 분명히 기독교의 신과는 동일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은 야훼에게 객관적 종교사적 의미를 먼저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난 후에 기껏해야 그 물음이 나에게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 이상을 취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한국기독교인들이 막연하게 구약에 대해 갖고 있는 경학관(經學觀)을 살펴볼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유대인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기독교 경학관은 전통적 유교 경학관의 오류의 답습이라는 연속성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한국의 기독교신학이 하여야 할 첫 사명은 기독교의 이해 자체에서 야훼 존재상의 문화적 성격을 철저히 탈색해 내버리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나 생활규범 속에서 구약의 명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절대적 진리로서 강요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암암리 자신을 유대인, 그것도 맹목적 유대인으로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조선왕조실록』은 한 장도 거들떠보지 않은 사람들이 남의 민족의 역사책은 왜 무오류적(無誤謬的)으로 맹신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유대민족의 역사기록이다. 단지 그 역사의 성격이 야훼의 구속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구약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도올<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유대민족은 자기들의 문화를 우리 조선민족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나라 지성인들이 자기네들의 『이조실록』(즉 여기서는 『구약』을 가리킴)을 가지고 운운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유대 문명론은 유대인 자신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유대인들의 멘탈리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유대인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아닌 바로 서구문명의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다! 이 기독교라는 문화제국주의는 럿셀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로마제국의 환영의 잔재일 뿐이다. 정치적 제국주의는 현실적으로 사라져도 문화적 제국주의는 오래 살아 남는다."

 

 

[도올 김용옥교수의 예수탄생신화에 대한 분석]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갈릴레아)의 나자렛 사람입니다.. 
예수는 나자렛에서 성장했습니다.

루가복음 2장에 보면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조사를 명했답니다. 
호구조사는 자기의 본고장(본적지)에 
가서 하라는 것 이였습니다.

호구조사는 로마정부에서 세금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인구조사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나자렛에 
살던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여 배가 남산 만한데 
베들레헴까지의 
수 백리 먼길을 
로마에 세금을 내기 위한 
호구조사를 받으러 갔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쓰던 사람들이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므로 
예수가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의 적통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갈릴리의 나자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출생지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출생지를 속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성경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호구조사를 명령하여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갈릴레아의 나자렛마을을 떠나서 
호구조사를 받으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방이 없어서 말구유에서 예수를 낳았다고 하는 
예수가 출생하던 A.D. 0(제로)년에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토가가 
호구조사를 명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갈릴레아)의 나자렛 사람입니다.. 
예수는 나자렛에서 성장했습니다.

루가복음 2장에 보면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조사를 명했답니다. 
호구조사는 자기의 본고장(본적지)에 
가서 하라는 것 이였습니다.

호구조사는 로마정부에서 세금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인구조사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나자렛에 
살던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여 배가 남산 만한데 
베들레헴까지의 
수 백리 먼길을 
로마에 세금을 내기 위한 
호구조사를 받으러 갔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쓰던 사람들이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므로 
예수가 유태민족의 영웅인 
다윗왕의 적통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갈릴리의 나자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출생지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출생지를 속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성경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호구조사를 명령하여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갈릴레아의 나자렛마을을 떠나서 
호구조사를 받으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방이 없어서 말구유에서 예수를 낳았다고 하는 
예수가 출생하던 A.D. 0(제로)년에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토가가 
호구조사를 명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토가 호구조사를 명령한 것은 
예수가 태어나고도 6년이 지난 A.D.6년 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를 받으러 갈 때에 
시라아 총독이 퀴리노라고 루가복음에 나와 있는데 
헤로데왕 시대에는 
시리아 총독으로 퀴리노라는 사람이 
존재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태어날 때에 
유태인의 왕이였던 헤로데(헤롯)왕이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두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조리 죽였다는 헤로데왕은 
예수가 태어나기 4~5년 전인 
B.C. 4년까지만 왕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의 탄생을 거짓말로 꾸몄느냐?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라고 
선포하고 그를 믿으라고 하는 
케리그마에 의한 양식(From)에 의하여 성경이 씌여 졌다는 것입니다.

즉 전지전능한 신 야훼(여호와)의 
독생자 예수를 믿어야 천당에 간다.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즉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예수의 탄생을 신화적으로 꾸민 것 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과거의 고전 성서 등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해석하면 않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행위로 일관되는 
예수의 전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도올 김용옥교수는 위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교인들은 김용옥교수가 지적한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고 
그래서 김용옥 죽이기 일환으로 김용옥교수의 
비도덕성(?)을 물고늘어지는 융단폭격을 퍼붓는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욱교수가 노인을 모욕한 것이 사실이라면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 도올 김용욱교수의 죄가 
자기조상인 단군과 그 역사를 부정하고 
자기조상인 단군왕검의 동상의 목을 베고 부시고 
단군왕검을 곰새끼 개새끼라고 욕하는 
불충불효의 예수교 신도들의 죄에 비교 하겠습니까?

따라서 예수교신도들은 김용옥교수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김용욱교수를 욕하려면 
모든 예수교교단에서 
단군동상을 목베고 부수고 욕하고 부정한 
불충불효의 죄를 국민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단군동상을 다시 복원시키고 나서 비난하여야 할 것입니다

도올의 비판-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김용옥 교수 vs 차범근 감독)

[발언대]차범근 감독에게 (중앙일보 1997년10월23일)

나는 사실 조용히 개인적으로 만나 오손도손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는 지금 바쁜 사람, 나같은 서생을 만나줄 것 같지도 않고, 또 만나 이야기를 해도 실마리가 풀릴 것 같질 않았다.

허나 꼭 이야기를 해야겠기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지성의 양심이라는 부담 때문에, 남들이 다 지나치고 있건만, 결코 후련할 것만 같지않은 붓을 들었다.

나는 평소 텔레비젼을 즐겨보진 않지만 우연히 보게된 장면. 후반 17분을 남겨놓고 한꼴을 먹은 절박한 상황에서 당당히 2:1의 역전! 그것도 우리에게 모든 굴욕과 희한의 역사를 안겨준 히노마루의 심장에! 그것도 너무 멋있게! 너무도 통쾌하게! 분명 그것은 실력이었다.

한국남아의 기상이요 우리민족의 저력이었다. 그대 바로 그대가 이러한 저력을 표출시켜주었다.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엊그제 우즈벡, 천년쌓인 회한이 다 씻겨내리는듯한 통쾌함, 요즘같이 정치가 혼란된 리더쉽 부재의 소용돌이 속에선 그대가 이끄는 대표팀의 쾌거야말로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우리역사와 민족의 스트레스 해소였다.

 

우리는 기억한다. 말레지아와의 경기에서 5분남겨 놓고 역승의 꼴을 세개나 터트렸던 그대의 우람찬 다리, 아마도 지금같이 텔레비젼위성 중계가 가능했더라면 그대의 분데스리가 활약상은 박찬호의 메이져리그 그것보다 더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쌓은 실력을 이젠 또 후학을 통하여 발휘하고 있다.

그대야말로 지금 이 순간 우리민족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나 도올, 그대를 사랑하는 대학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사랑을 권력으로 표출해서는 아니된다고.

텔레비젼 마이크가 차감독에게 갔다. 첫소감은? "하나님의 은혜로. .." 첫소감은? "주님의 은총으로. .." 첫소감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 .신나는 꼴이 터질 때마다 카메라는 열렬히 기도하는 그대의 모습을 비춘다.

 

이제 그대는 빌리 그래엄을 능가하는 세기적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대는 전도사가 아니라 축구감독이다. 그대가 이끄는 축구팀은 어느 교회의 사설팀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다. 그대는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할 공인이다.

분명 그대는 개인으로 TV화면 앞에 선 것이 아니라 대표팀을 이끄는 공인으로 선 것이다. 공인의 공적마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적행위는 공적모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의 후계감독이 불교교도였다고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공덕으로. .." 이슬람교 였다면 "알라신의 가호로. .." , 우리나라는 곧 종교분쟁국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여호와의 율법적 약속 (구약) 을 깨트린 새로운 약속 (신약) , 즉 사랑의 복음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이긴자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는 자에게도 가는 것이요, 우리 민족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마디는 무엇이었던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야말로 복이있도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팀이 주님의 은총으로 이겼다면 일본팀은, 아랍에미리트팀은, 우즈벡팀은 주님의 저주때문에 졌나? 그것이 그대의 기도의 본질인가?

예수는 무어라 말했던가? 너희가 기도할 때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말끝마다 매 행동마다 주님의 은총을 들먹이는 그대의 행태는 기독교신앙의 실천이 아니요, 한국기독교의 병페적 현상의 말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대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라면, 그대를 사랑하는 독실한 아내라면 차범근! 그대의 기도하는 소맷자락에 매달려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주님의 은총" 때문에 소외당하는 이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 큰 은총을 베풀 수 있도록 차범근 그대 마음이 더 큰 사랑으로 충만케 되기만을…

도올 김용옥 <철학자, 한의사, 용인대학교 교수> 
...................................................

 

[발언대]김용옥교수에 답한다

그러잖아도 월드컵 최종예선이 끝나면 한가한 시간에 한번쯤 나의 신앙문제를 설명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김용옥 교수의 글을 읽고 바로 이 글을 쓰게 됐다.

국가대표팀 감독 - . 무조건 잘 싸워서 무조건 이겨주기를 바라는게 모든 국민의 바람이다. 그 기대와 희망을 고스란히 해결하고 충족시켜줘야 하는게 바로 이 자리다. 국가대표 감독은 김교수나 나 자신이 그동안 막연하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힘든 자리다. 때로는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고독하고 힘들어 자다 말고 일어나 아내에게 전화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나는 대범하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그릇이다. 그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을 더 꼭 쥐는 것처럼 지금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을 꼭 쥐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

그러나 경기 전 벤치에 앉아 기도할 때나 경기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할 때나 한번도 김교수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이기 위해 그래본 적은 없다. 내가 인터뷰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기 전 나는 우리 선수들을 감동시켜 90분 내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90분간 진두지휘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오차도 없이 매순간 정확히 판단하고 지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경기가 무사히 끝나면 나는 바로 이런 나의 기도가 이뤄졌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고 이기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는게 아니다.

나는 두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 스님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부.수녀님들을 볼 때면 그분들의 기도 모습이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코끝이 찡해옴을 느낀다. 나에겐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사도 아니고 종교 편싸움 선봉에 선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생기는 우둔한 사람이다.

얼마전 KBS - TV가 우즈베키스탄전이 끝난 후 현장 인터뷰를 옮기는 과정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는 인터뷰 첫머리가 잘린 모양이었다. 기독교인들이 KBS에 전화를 해서 "일부러 그랬다" 며 항의를 수도 없이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종교를 가진 열성 신앙인들이 마음에 평화는 없고 편견과 피해의식으로 모든 것을 내 입맛에 맞추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아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비록 공부를 많이 한 종교학자가 아니지만 어느 종교든 투쟁만 있고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교수의 말대로 후임 감독이 부처님을 믿든, 알라를 믿든 그것은 나에게 묻고 따질 일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스스로 의지하는 신으로부터 용기와 힘, 그리고 평화를 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가 아무리 공인이라 해도 그것은 지탄받아야 하는 나쁜 짓 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범근이가 기도하고, 차범근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차범근이가 자꾸 이긴다고 해서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합리화되는 것도, 다른 종교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 자신이 공인의 룰을 어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지나친 종교논리로 비약하려는 것은 나로서도 유감스럽다.

이전의 어느 감독은 월드컵을 앞둔 중압감에 입이 돌아가고 말았다. 또 유럽의 많은 감독들이 알콜에 빠져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지금처럼 숨막히는 때에 나 역시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지금은 한 발짝 떨어져서 기도하는 형식이나 모습보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차범근 축구국가대표 감독 > 
.......................

홈지기 의견: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천을 하지 않는다. 
" 너희가 기도할 때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무리 마음의 평안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성서에 "하지 말라"고 되어 있으면 안해야 할 것이 아닌가? 출처[바이블의 진실]

       
 

도올의 비판-노자의 하느님과 기독교의 하나님 비교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하다. 인간의 믿음과 소망에 답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생각해 보라 올 여름, 임진강 둑이 터질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뻥뚫린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던 문산,파주,연천의 사람들을! 천지는 잔인하다! 노자의 사상에는 가벼운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천지는 잔인하기에 위대한 것이다. 잔인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그래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만물은 스스로 서로 다스리며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자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인자하게 되면 반드시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고(造立施化) 하는 따위의 장난이 개입된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다 함이 생기고 함이 있게 된다.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면(造立施化), 사물은 그 본래의 진실한 모습을 잃어버린다. 은혜를 베풀고 함이 있게 되면, 사물은 온전하게 존속될 수가 없다. 사물이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온전하게 생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한다. 그래서 애굽인들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킨다. 야훼는 은총을 베푼다. 은혜를 베푼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우리를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빼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당신만을 섬기겠나이다! 옳다! 그렇다! 너희들이 그 약속을 어길 때 나는 너희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리라!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굽기34:14]

노자의 하나님은 이러한 계약을 거부한다. 인간적인 "조립시화"(造立施化)의 투영을 거부한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기만을 섬기라는 요구도 없다. 노자의 하나님은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그들에게 요구함이 없다. 공을 이루면서도 그 속에 거함이 없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말할 뿐이다. 만물이여! 그대들은 나없이 스스로 그러할지니!

 

조선의 백성들이여! 21세기의 개화된 민주의 백성들, 과학의 백성들이여!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을 믿겠는가? 소리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을 믿겠는가? 
노자는 또 말한다. 천지가 불인(不仁)한 것처럼 성인(聖人) 또한 불인(不仁)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政敵)이라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치 않고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天地不仁! 聖人不仁!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반어(反語)인가!

--- 김용옥 <노자와 21세기(상)> 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예수는 무당이다

한국의 교회는 우리 민족문화적 입장에서 볼 때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본다. ........ 기독교가 이 지구상의 선교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짧은 시간의 가장 큰 양적 팽창을 한 기적적 케이스 중의 하나가 한국기독교라고 한다면(일본에서만 해도 신구기독교인이 함께 인구의 1%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하라), 그러한 기적이 외재적 물리적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역사의 내재적 이유에서밖에는 찾아질 수 없다는 시각의 방향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곧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한국인의 전통적 종교의식과의 사이에 특수한 친화감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오늘 한국기독교의 샤마니즘적 현상을 한국기독교인의 타락이라고 한국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책임을 지고 그 문제를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불트만이 말한 대로 예수의 자기 이해가 신화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예수는 무당이다. ................ 나의 무당이라는 용어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대체로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이분법에 틀을 박고 있다고 생각된다. 허나 이따위 또 하나의 신화는 인류학, 언어학, 비교종교학, 문화철학의 발달로 이미 옛날에 깨졌다.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구분은 신관(유일신-다신)으로도, 세계관, 우주관, 윤리관 등의 어떤 기준으로도 불가능하다. 즉 그 하나의 논리를 지속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저등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이미 그는 저등이라고 한 현상에 대한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이것은 근대화 개념과 함께 인류사에서 불식되어야 할 거대한 편견이며 기독교문명의 우월의식이 낳은 독단이다. 이런 종교사학적 운동은 시카고대학에서 계간되고 있는 『종교사학잡지』(History of Religions)라는 격조 높은 학술지에 의하여 영도되고 있다.

 

나는 모든 종교현상의 원초적 충동은 고등이라고 하든 저등이라고 하든 모두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어떤 인간의 의식형태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원시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비샤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道家(老莊哲學)의 자연주의 철학도 샤마니즘과의 관계를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도가 계통의 사상가들이 대개 巫에서 나왔다는 것은 쓰마치엔(司馬遷)이 이미 밝히고 있다. ........... 중국에서 BC 3세기경에 漢醫學이 엄청난 규모와 체계를 갖추고 등장하게 되는 경로도 이 巫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의(醫)라는 글자의 윗대가리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巫의 추한 모습을 묘사하는 象形이다. 그리고 밑변은 술(酒)이다. 醫는 곧 술먹고 춤추며 병을 고치는 무당의 모습이다. 침을 탁탁 뱉아 흙을 이겨서 소경 눈에 발러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는 예수(요한 9:6∼7)의 모습은 바로 이 무의(巫醫)의 모습이다. 이러한 무치(巫治, faith-healling)는 예수시대의 팔레스틴의 예수류의 무의에게서나 중국의 상고(尙古)시대의 무속이나 오늘날 말썽을 빚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도원이나 보스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미쎄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크리스챤 싸이언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문화의 주요 패턴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엘리아데의 비교종교사적 공헌에 의하여 더 이상 샤마니즘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견된 소수민족의 특수종교현상으로만 국한해서 보지 않고 전인류의 보편적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찰모시스:스러져가는 하나님』(Zalmoxis:The Vanishing God)이라는 역저 속에서 카스피해 연안의 동구라파 민속종교, 희랍세계, 인도-아리안, 휘노-우그리안, 알타이안, 몽고, 스라브, 북아메리카 인디안 등등의 모든 종교의식과 형태가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의 틀 속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철학사에서 알고 있는 파르메니테스나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가 바로 무당이라는 점 또한 희랍철학의 대가인 구트리(W.K Guthrie)를 위시하여 모리슨, 버케트 등등이 밝히고 있다.

--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출처: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예수는 무당이다 2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지배하고 있는 희랍사상이나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예수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이스라엘(헤브라이)사상이나, 그리고 또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을 지배하고 있는 무교(무당종교)사상이나,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인간의 종교적 상황을 좀 다른 언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플라톤의 동굴비유는 올페이즘에 근원을, 예수생애의 죽음과 부활의 비유는 영지주의(그노스티시즘)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 양자는 모두 지중해 연안의 토착적인 민속신앙의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동일성을 이해 못하면, 왜 어떻게 해서 중세기에 희랍사상과 기독교가 결합이 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합이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아퀴나스의 사상을 잉태시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서양문명의 성격을 규정짓는 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헬레니즘(희랍사상)과 헤브라이즘(유대사상)에 대해서도 서양사람들은 너무 양문화의 차이만을 확대해석했지 그 근원적 동일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올페이즘이나 영지주의나 우리말로 하면 동일한 굿놀이 종교입니다. 이 굿놀이는 모든 인류사회에 공통된 것이며 인류의 원시적 상황에 매우 근원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동굴의 비유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사슬풀린 죄수가 암흑에서 빛으로 나갈 때 눈이 부셔서 상당기간을 고생하여 적응하게 되고, 또 빛에서 어둠으로 들어갈 때도 갑자기 컴컴해져 동굴 속의 상황에 눈이 다시 적응하느라고 곤욕을 치르는 장면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암흑에서 빛으로, 빛에서 암흑으로 전이(바꿔짐)되는 고통을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무병(巫病)이라고 하고, 민속종교학에서는 넓은 의미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을 마귀에게 시험받으며 고통당하는 것도 일종의 무병입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어둠의 동굴 속에서 백일간 고통을 당하는 것도 동일한 유형의 무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병이 끝나면 신어미가 신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내림굿이라고 하는데, 내림굿은 바로 이 이니시에이션의 의식의 전형입니다. 예수가 세례요한한테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에 고유한 내림굿의 이스라엘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내림굿을 통하여 만신에게 신의 계승자임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경우에도 세례요한이 세례를 행할 때, 하늘이 갈라지며 신(성스러운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마가」1장 10절). 우리나라 내림굿에서도 이러한 장면의 묘사는 보통 있는 일입니다. 신이 내려온다고 해서 보통 강신(降神)이라고 말하지요.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복음」이며,............ 플라톤의 동굴비유 곧 그의 이데아론은 사실 알고 보면 우리나라 무속신앙과 동일한 토착신앙(샤머니즘)의 기하학적 표현입니다. 희랍에는 피타고라스라는 무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기하학주의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하학주의는 파르메니데스라는 무당의 철학에서 매우 강화되었고 플라톤은 바로 이 무당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계승하였습니다(피타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무당[샤만]이었다는 사실은 민속학자 엘리아데의 고증에 의함). ............. 예수생애에 관한 신화적 기록도 알고보면 이러한 샤마니즘의 예언자적 표현입니다. 유대민족에게는 예언자를 통한 신권정치의 전통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무당신앙은 이러한 샤마니증의 자연주의적 표현입니다. 빛과 암흑의 세계가 이원성을 가지면서도 우주 전체 속에서 용해되고 있는 좀 특수한 종류의 샤마니즘입니다

-- 김용옥<고교생을 위한 철학강의>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하느님개념

하늘은 항상 무제한적이며 광막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은 어디서 보든지 그 모습이 같다. 서울에서 보는 땅과 목포에서 보는 땅과 부산에서 보는 땅은 모든 다른 땅들(many)이지만, 하늘은 서울에서 보든지 목포에서 보든지 부산에서 보든지 다 동일한 것(one)이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하늘은 일(一)을 상징하고 땅은 다(多)를 상징한다. 하늘은 추상성·보편성·절대성의 상징이고 땅은 구체성·국부성·상대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하늘의 숭배는 유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universalization) 반하여, 땅의 숭배는 그 숭배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국부화될(localization) 수밖에 없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는 땅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항상 이동을 하기 때문에 정착된 땅에 자기들의 존재의 근원을 삼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막에 있어서는 이동을 할 때에도 여행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하늘이지 땅이 아니다.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들 삶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는 자연대상은 동물(양떼)이고,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대상은 주로 식물(벼·보리·감자·채소 등)이 된다. 유목의 대상이 되는 양떼는 항상 일정한 곳에 있지 않으며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牧者, shepherd)의 명령이다. 경험있고 현명한 한 사람에게의 다수의 무조건의 복종이 그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에라가 적은 것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심리를 소위 명령심리(command-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러한 심리는 유목과 유사한 이동집단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산악등반대의 캡틴이나 배의 선장에게도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된다. 매우 비민주적이고 종적인 상하굴종관계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캡틴이 실수하면 최악의 경우 다같이 죽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에라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하나님이나 주예수는 이러한 유목민족의 매우 비민주적 명령심리를 투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목사(paster)라는 말자체가 "양떼지기"라는 뜻이다. 영어의 패스터(paster)는 원래 "초원에서 먹이는 자"란 어원을 갖고 있다. 목사(牧師)의 師는 스승사 자가 아니다. 師는 지금 우리가 군대용어로 사단(師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문의 원뜻은 군대의 단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민족의 농부와 식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심리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식물은 자기가 뿌리박고 있는 땅의 自然(스스로 그러함)의 논리에 의하여 성장할 뿐이며, 간섭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휘모는 논리를 거부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은 항상 늑대나 이리, 그리고 가뭄의 사망의 골짜기에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의 행태와는 다른 행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처럼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부정의 논리(logic of negation)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발달되어 있는 것은 화해의 논리이며 공존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적""원수""죄악""사망" 등의 『성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러한 극렬한 어휘가 우리 고전(古典)에는 매우 적다. 농사를 짓는 지혜는 대부분의 농부들이 골고루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한명의 장로(長老)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민주적 협동이며, 지혜로운 한사람에게로의 다수의 복속이 아니다. 
목동은 양떼를 간섭하고 명령하고 인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시로 이리떼들로부터 막아야 하고 항상 그들이 길잃은 양이 되지 않도록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농부와 식물의 관계는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되고 간섭하지 말아야 되고 인도하지 말아야 한다. 식물이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기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양떼도 없고 따라서 양떼를 지켜주는 목자도 필요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둘이 있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은 이미 야훼자신이 자기의 유일성(하나인 님)을 거부하고 있다. 즉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이미 존재론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일성이란 남을 윽박지르고 후두려 패는 배타성일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같이, 노경이 간신히 얻은 아들 하나를 태워 죽여 피를 보기까지 해서 그 복종을 시험하고 강요하는(아브라함-이삭의 경우) 그러한 야훼하나님,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을 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협박의 하나님"[God of intimidation]은 내 말이 아닌 신학용어임) 그러한 하나님은,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깡패하나님"은 이스라엘인에게 너무도 정답고 친숙하고 또 든든하게 느껴지는, 즉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유목기질(nomadic temperament)에 너무도 적합한 신앙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고요한 새벽의 나라 조선에 조용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다.

-- 김용옥<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 여성차별

(도올 김용옥)

『신약성서』에서 바울이 한 다음의 말은 남성중심의 세계관을 너무나 잘 대변해 준다.

+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고,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란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고린도전서 11:7∼9]

 

우리는 수녀의 면포를 뒤집어 쓴 모습을 아름답고 깨끗하게만 볼 수는 없다. 신부는 머리를 가리지 않고 신의 영광을 직접 나타낼 수 있지만 여자는 신의 영광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머리를 가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에 어떠한 미화된 의미를 부여하든지간에 그대들의 『성서』가 말해주는 원래의 의미를 내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만은 정확한 사실이다. 명동성당에 들어가는 여신도들도 면사포를 가지고 다닌다. 남신도는 물론 아무 것도 쓰지 않는다. 신교(新敎)는 그러한 의식을 폐지해 버렸다. 이러한 불평등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탄생시킨 문화의 심층구조에서 기인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당에 들어가서 면사포 쓰고 앉아서 기도하시며, 무당집에 들어가서 신령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더 선진되었고 평등한 위대한 문화종교에 참여하고 계시다는 우월감을 느끼실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모습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의 원초적 형태는 동서를 불문하고 조상숭배(ancestor worship)에 있다는 것은 이미 에른스트 카씨러(Ernst Cassirer)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rncer)의 말을 빌어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모세의 5경이 모두 이스라엘 족속들의 종법질서에서 성립하는 조상숭배와 관련된 것임은 나의 부연설명이 필요없다. 우리는(기독교인들) 하나님을 부를 때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라고 부르지 "하나님 어머니"(God the Mother)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기 위해서는 분명히 성적 구별이 없어야 진짜 전지전능하고 공평무사한 하나님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은 성이 있고 그 성은 여성 아닌 남성에게서만 주어지고 있다. 예수도 남자고 하나님도 남자고 아브라함도 남자고 모세도 남자라면 과연 신·구약 어느 구석에서 여자가 당당히 설 곳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예수를 부를 때고, 또 그 예수의 어머니 아닌 "아버지"를 부를 때고 모두 항상 "주여"(Oh, my Lord)라는 호칭을 쓴다. 그리고 자진해서 자기를 "오 나는 그대의 종이로소이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겸손이라고, 위대한 종교성의 극치라고 그대들은 미화한다. "주(主)"라는 말은 최소한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원의미에 있어서는, 일본여자들이 자기남편을 "슈진"(主人)이라고 부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종법사회에 있어서의 소유관계를 나타내는 상하주종관계의 질서(Hierachy)를 상징한다. 야훼와 인간의 관계는 종적인 관계며, 일방적 소유와 지배의 관계다. 여기에 여성운동을 운운하시는 기독교여성들의 아이러니가 있다." 
카톨릭교의를 조금 배운 사람이라면 평생을 신주모시듯 모시는 대성인, 그리고 카톨릭의 신부님이나 수녀님 즉 양중(洋僧)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정규커리큐럼으로 배워야만 하는 토미즘신학의 주인공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도 일찍이 여자를 규정하여 "불완전한 남자"(an imperfect man)라고 하였고, 또 그것은 하나의 "개연적 존재"(an incidental being)라고 하였다. 즉 존재해야만 할 필연성이 없는 존재론적인 하위개념으로 설정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여자는 무엇이든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피조물이 아니며, 또 항구성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출처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일 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조차도 전체적 권위를 갖지 못한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특수한 족보계열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하나님에 불과했다. 이 세겜에서의 계약 이전에는 야훼란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었던 영역은 서산군에 있었던 신소도국(臣蘇塗國)만도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성서』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 『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성서』의 하나님 자신이 자기 하나만 섬겨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지, 나홀로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특정한 "계약"에 의하여만 성립한 하나님이며, 그 계약에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계약은 분명히 지금의 석유밭이 되어 있는 중동사막을 헤맨 민족들간에서 성립한 계약이다. 그리고 많은 하나님들 중에서 야훼라는 하나님은 공갈·협박이 쎈 하나님이다. 이렇게 공갈·협박이 쎈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협박·공갈칠 수 없으니까 "계약"을 맺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 요즘처럼 무서운 형벌이 있는 법질서가 엄존하고 있는 세상에도 "계약"이란 깨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세겜의 돌맹이에다가 여호수아의 카리스마에 힘입어 한 계약이 깨지지 않을리는 만무하다.

<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이 글은 도올 김용옥의 저서 『금강경강해』중 >들어가는 말>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일까?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개화의 물결의 선두에 섰고 나의 아버지 역시 휘문고보 시절부터 기독교야말로 우리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개화된 의사집안 광제병원 일가의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고 장성하여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증조부가 구한말에 종이품까지 지낸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과거에 급제하고 동복군수까지 하다 일제합병을 당했으니, 아주 고지식한 전통적 사대부 가문의 유교적 풍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분위기에 철저히 물들여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 漢詩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漢學의 소용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교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四書三經 나부랑이가 머리속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내가 학문을 하겠다는 실존적 자각을 하게되고부터 나의 사유의 출발이 된 경전은 유교경전이 아닌, 도가경전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학문의 적통은 노자와 장자, 즉 노장사상이다. 나의 기철학의 출발이 노자도덕경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내가 누누이 언명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노장철학 방면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어느 누구도 범치못할 확고한 문헌실력과 학문방법을 다져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춘추제가 경전중에서 외도라 하 수 있는 한비자, 묵자, 순자, 회남자, 손자, 내경 등의 외경을 폭넓게 공부했으니, 法家, 墨家, 陰陽家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대학시절부터 이미 삭발하고 절깐에 들어가 入山修道하는 승려의 체험을 했고, 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서물속에서 허우적거린지도 벌써 30년을 지냈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 파문을 던지는 적지않은 서적을 썼고 여기저기 대찰에서 說法을 하는 위치에 서게되었으니 독실한 불자라 말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신은 기독교인이요? 불교인이요? 유교인이요? 도교인이요? 선교인이요? 천도교인이요? 원불교인이요? 역술가요? 침술가요? 명리가요? 도대체 뭐요?

도대체 내 종교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어떤 종교의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정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나와 같은 삶의 역정을 가진 사람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혼란은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것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 당신이 꼭 어느 특정 종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질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결하고 소박하게 나의 평소 견해를 여기 밝히려 한다. 이것은 바로 금강경이라는 서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살어온 자그마한 실존적 원칙같은 것이래서 많은 사람에게 여실하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공기를 들여마시고 사는 한 사람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 
문이다. 요즈음같이 자유로운 "민주세상"에 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그 여실한 모습이야, 범법을 하지 않는 이상, 어찌 해볼 도리도 없는 것이 아닌가!

제1명제 :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생각해 보자! 여기 어떤 사람이 눈사람이 땡볕아래서 절대 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확고한 것이었다 한들, 눈사람을 땡볕에 놓고 보니 녹더라는 현상의 분석보다 구극적으로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에게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다 하더래도,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결국 눈사람이 땡볕 더위속에서 녹는다는 사실은 매우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믿음들이 더 강렬한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믿지 않아도, 세밀하게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냥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부활했다)는 것을 믿어야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람이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해보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얼마나 훌륭한 말씀인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온전하게 알 때에는 폐하리라 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서 전체적으로 아는 것으로 확대되어 갈 때에, 이런 지식의 확대만으로도 훌륭한 깨달음, 훌륭한 종교가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이다. 
孟子는 이것을 " 而充之"라 하지 않았는가? 여기 "거울" 얘기가 나오는데, 희랍시대의 거울이란, 박물관에 진열된 우리 옛날 거울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새와 같은 유리거울이 아니었고, 동판거울(銅鏡)이었던 것이다. 쑤세미에 돌가루를 민대어 닦아 놓은 동판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면 항상 희미하고 뿌열 것이다. 이런 비유는 실상 고린도라는 희랍의 도시에서 동판거울이 많이 생산되었었기 때문에 생겨난 비유였다. 그 뿌연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은 희미한 인식에서 얼굴과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은 맑은 인식으로 우리의 앎이 확대되고 깊어지는 현상을 사도바울선생께서는 "사랑"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때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괴팍한 남편(아내)도 전체적으로 알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참으로 사랑을 하게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가? 사는가? 꼭 죽을 것인가? 죽었다가도 살아 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모든 질문이 결국 부분적 앎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이러한 부분적 앎이 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더 오아(either-or, 이것 아니면 저것)의 질문이 다 폐하게 되는 것이다. 왜 꼭 종교가 신앙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단순한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지식의 온전한 확대에서 오는 깨달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의 고정된 믿음체계난 교리체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것만이 종교라고 생각하는가? 나 도올은 말한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제2명제 :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이 두 번째 명제는 실상 상식적인 경우, 제1명제속에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 상식적으로 神을 말하는 경우, 神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神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神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 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 
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 대립이라고 하는 서양 중세철학의 쾌쾌묵은 전형적 개념의 짝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꼭 믿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버리고 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神의 존재가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일 필요가 하나도 없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神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털보아저씨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나는 구차스럽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는 나는 그러한 질문에 방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예비하고 있지만,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口業은 여기서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토끼뿔이 몇 그램이냐?"하고 누가 대짜고짜 물을 때, 토끼뿔의 중량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하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 존재의 가능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때문에 그 존재의 속성에 관하여 논의를 한다는 것은, 때로 재미가 있거나 유의미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아니라 결말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한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대짜고짜 "요즘 마누라 안 때리냐?"(Did you stop beating your wife?)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침 내가 평소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대답이 가능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내가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응",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제(presupposition)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이러한 문화적 전제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언어께임속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를 근원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나나냐? 둘이 
냐?"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당신은 요즈음도 부인을 때리십니까?" "술 끊으셨습니까?"와 동일한 류의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神은"이라는 主部속에는 이미 "神의 存在性"이 포함되어 있음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神은"이라는 말은 이미 神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무의미한 토톨로기가 되어버릴 뿐이다. "까만 새는 까만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소소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神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 
神이라는 말을 하는 話者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규정되고 있는 수많은 숨은 述部的 전제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한, 그 어떠한 논의도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잇어서 神이 "사랑"이었다면 이것은 곧 "사랑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神이 "전지전능한 아저씨"였다면, 그 질문은 "전지전능한 아저씨는 존재하는가?"가 될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神이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이었다면, 그 질문은 곧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어의 술부적 속성이 기술될 때만이 그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곧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가 연재됩니다.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

그런데 일반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런 엄밀한 철학적 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 "하느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무엇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은 어떤 전지전능한 유일한 절대자, 우주의 시공속의 모든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절대자라는 어떤 막연한 "초월신=유일신"는 생각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절대자가 있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존재)과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도대체 어떠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근거위에서 그 필연성이 도출되는 것일까?

그런데 믿음의 대상으로서 神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고집한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神이 存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신만이 우주 전체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 참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나,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他존재를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他존재를 배제하는 유일무이한 存在라는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存在하는 모든 것이 될 수밖 
에 없다. 보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전체 그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우주밖에 있다면 그 존재는 또다시 한정되는 一者가 될 수밖에 없음으로, 他存在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유일신임을 자처하는 모든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한정된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뜻은 저기 있는 저 나무나 의자처럼 "실체로서 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신이란 우주밖에 있거나 우주내에 있는 어떤 물체인가?

흔히 유일신이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경배하는 存在의 대표적 예로서 우리는 야훼, 혹은 여호와 하나님, 혹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에 거슬렸다간 뼈도 못추리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유일무이한 神이 아니라 他神이 存在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내리신 그 유명한 십계명(Ten Commandments)의 첫계명은 무엇이었든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공동번역 출애굽기 20:3)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RSV)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당신 자신이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직접 말에 의하면, 여 
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딴 신들은 섬기지 말고, 나만을 섬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언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일신이라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 자신이야말로 다신론자이신 것이다. "유일신"이라고 할 때 유일(only)의 실제 의미는 "유일하게 받드는," "유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유일한 것처럼 섬기는"이라고 하는 부사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야훼 자신이 유일者임을 자처하는 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多者性인 것이다. 唯一은 頗多를 전제로 한다. 一은 곧 多다. 一은 곧 多의 전제없이 성립할 수가 없는 名言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앱굽기 34:14).

야훼는 바로 다른 신들을 진투하는 많은 신들 중의 一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신관을 자랑하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조차 "유일신"관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신 구약선경이 모두 雜神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한 위에서 성립한 유일신을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내말은 아무리 위대한 성서신학자라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대한 거역일 뿐이다. 유일신관은 곧 성서를 부정하는 불경이다. 우리가 神을 存在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神이 存在者인 한 그것은 많은 存在중의 一者일 수밖에 없다. 야훼래야 그것은 역사적으로 雜神을 물리친 萬神일 뿐이다. 이러한 야훼의 유일신화는 유 
대민족사에 있어서 다윗왕조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과, "잡신의 통일"의 일치현상은 모두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현상인 것이다. 정치권력의 통일과 신적 권력의 통일은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神 중심으로 종교를 논할 수 있을까? 그 많은 神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많은 유일신들을 어떻게 다 취급할 것인가? 부뚜막에는 조왕신(부뚜막신)이 있고, 툇마루에는 성주대감이 있고, 장독대에는 항아리신이 있고, 돼지우리에는 돈신이 있다. 인간의 이름보다도 더 많을 신들을 따라 종교를 논한다면 과연 종교가 논구될 수 있을 것인가? 신의 족보를 따질려해도 그것은 최소한 우리민족의 大同譜를 따지는 것보다 더 복잡할 것이니 과연 어느 장단에 그 유일성을 맞출 것이며, 어느 이름에 그 기준을 짤 것인가?

나는 말한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神의 學"(신에 관한 배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神學이 만약 神의 學이라면 그것은 신의 족보학(the Genealogies of Gods), 신의 전기학(the Biographies of Gods)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 모든 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現今의 수준이, 아무리 정교한 레토릭을 가장해도, 세계적으로 족보학 전기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종교는 철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문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예술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과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종교가 신학이어야만 하는가?

종교를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옹졸한 자들은 모두 기독교나 그 유사한 아류의 초월신관을 기준으로 삼아 그런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세계 종교사에 있어서, 종교학에 있어서, 그러한 편협한 규정은 불교의 엄존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교는 분명 이 지구의 엄청난 인구가 신앙으로 삼고 있는 고등종교다. 그것은 종교로서 현실적으로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神이 없다. 불교는 神을 믿지 않는다. 불교에는 神이라는 초월적 존재자가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불교는 무신론인 것이다. 무신론이 
어떻게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여기 우리는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테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무신론"아른 "신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없다"라 
는 말은 "신은 있는데 없다"가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데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세속적 의미에서 무신론이라 말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불교를 굳이 무신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神이 존재와 비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언어영역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맥락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神의 실체성 즉 존재성이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으로 역시 무신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닌 것이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심리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철학적 성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종교적 주제와 만나게 된다. 어찌 신학만을 종교의 유일한 통로라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신만을 종교의 유일한 주제라 말할 수 있으랴!

 

 

제3명제 :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절깐에 다니면 부처를 믿는다 하고, 나처럼 일요일날 교회도 아니가고 절에도 아니가면 예수도 안믿고, 부처도 안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나 절깐에 가는 것을 예수믿고 부처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장가면서 영화 믿는다고 하고, 식당가면서 음식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나의 삶의 구원이요,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특수한 믿음과 그의 극장가는 행위가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 개인 홀로만의 행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으로서 행위를 전젤 한다. 대강 인간의 제도라는 것은 인간집단의 어떤 기능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원래 인간 개인의 내면의 요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나의 내면의 구원이라든가 평온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고통의 벗어남이라든가 하는 매우 私的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종교의 기능이 사회적 집단을 통한 대중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 
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원숭이나 고릴라도 꼭 떼지어 같이 살고, 나도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종자인 것 같다. 그러니 종교생활이라는 것도 자연히 군집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人之常情 같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제형태속에 내재하며, 그러한 사회적 형태으 존속을 위하여 필요하게 되는 제요소, 예를 들면, 건물, 조직, 규약, 경제 등등의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종교를 생각할 때 종교적 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를 생각할 때 절깐을 부인할 수 없고, 기독교를 생각할 때 교회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가 제도와 공존하고, 종교가 제도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곧 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동아시아역사에 있어서 희한한 인물이 한명 있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의 크메르혁명을 주도한 폴 토트(Pol Pot)라는 인물이다. 폴 포트라고 하면 흔히 
"킬링필드"를 생각하고, 대규모의 인민학살과 잔혹하고 끔찍한 혁명극을 연상케 된다. 따라서 폴 포트하면 매우 냉혹하고 잔악하게 생긴 혁명가의 얼굴 
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폴 포트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만나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우 인자하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과묵하고 설득력있는 인물이 
라는 것이다. 성장배경도 아주 유복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불란서유학을 했고 사상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1975년 4월에 국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여 1979년 1월에 다시 월남군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 자그만치 150만명 이상의 자국민이 살상되었으며 20만명 이상이 공식처형된 인류사에서 그 유래를 보기 힘든 피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의 오류는 바로 이 인간세의 제도의 부정에 있었던 것이다. 老子 80장에 보면 "小國寡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곳에 "이웃 나라간에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함이 없다"라는 매우 목가적인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폴 포트야말로 老子가 80장에서 설파한 "소국과민"의 농업주의적 평등사회(agrarian egalitarianism)를 극단적으로 실현하려했던 과격한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시를 철폐해버렸다. 화폐를 없애버리고, 시장을 없애버리고, 학교를 없애버리고, 신문을 없애버리고, 종교를 없애버리고, 모든 사유재산을 없애버렸다. 그의 사고는 극단적인 반문명론적 해탈주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순박하고 무지한 원시적 농경사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만이, 가장 원천적으로, 구조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벗어나고 오염되지 않은 정결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판단이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의 급격한 실현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요구를 위배한 것이다. 도시문명이라는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이 수천년을 걸쳐 구축해온 자연스러운 業이었다. 그 業의 부정이 폴 포트 자신의 해탈을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국민을 기아와 질병과 공포의 아수라속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는 분명 제도속에 있다. 그리고 제도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러나 제도가 요청된다고 제도가 곧 종교는 아니다. 제도는 종교를 질식시킨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방편일 뿐이다. 내가 절깐에 앉아있다고 곧 불교인일 수는 없으며, 내가 교회에 앉아있다고 곧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 
제도가 곧 그 종교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모든 종교의 역사는 제도와 반제도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미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존의 카톨릭 제도와 투쟁하는 샐운 반제도적 성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주의의 승리는 또 새로운 제도로 고착된다. 그러면 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제도를 부정하는 새로운 성령주의가 탄생케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제도와 반제도의 변증법은 모든 종교사에 공통으로 구가되는 리듬이다.

마지막으로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이 연재됩니다. 
출처http://my.dreamwiz.com/mss107/frame.html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좀 피상적이다. 아직 우리의 논의가 "제도"라고 하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有爲的세계의 총칭이다. 無爲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임에 반하여 有爲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conven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약속이고, 가정도 약속이고, 선거도 약속이고, 정부부처조직도 약속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나 규칙, 법률이나 율법 이 모두가 다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체계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본질적인 제도가 인간存在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 제도란 바로 "言語"라는 것이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질적인 약속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존재의 내재적 절대적 조건이 아닌 외재적 社會的 규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한에 있어서는 언어를 부정할 수가 없다. 오로지 홀로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에 있어서는 언어는 부정될 수 있지만, 사회적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언어는 필요불가결한 存在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가 제도인 이상, 인간의 언어 또한 그것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제도가 곧 종교가 아니라면,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닌 것이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이나, 불타의 말씀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나 절깐이 곧 종교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적어놓은 성경이나, 불타의 말씀을 적어놓은 불경이 곧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의 제도적 측면의 유지를 위해서 요구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의 설법시기와 장소를 AD 30∼33년 갈릴리의 어느 시골로 잡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순간에 듣는 사람의 고막을 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문서로,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그렇게 가시적 형태로 보존했어야 할 어떤 제도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제도적 요구가 없었다면 성경이라는 언어체계는 존속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불경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가 요구한 것이고, 불경은 절깐이 요구한 것이지, 교회가 있기 전에 성경이 있었고, 절깐이 있기 전에 불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 사찰이라는 종교제도의 발생이전에는 오직 예수와 불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말씀대로 어떤 고정불변한 절대적 실체적 사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이나 불경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라고 생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러한 논리는 너무도 급작스레 짧은 지면에서 直言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충격으로 와 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다. 
원불교교전이 금세기초를 산 전라도人 박중빈이라는 覺者의 말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원불교교전의 성립이 원불교라는 종단의 성립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교전의 성립은 원불교라는 사회적 제도의 자내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전 편찬내용이 역사적 제도적 요구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가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교전 이전에는 오로지 초기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종교(불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종교(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敎理란 곧 敎의 理요, 敎의 理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理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제도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利害가 발생시키는 배타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 
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질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 인간세의 전쟁의 대부분의 명분이 바로 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와 더불어 存在한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 교리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알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가 곧 종교일 수가 없다고 하는 나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성경도 불경도 거시적으로는 모두 교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經에서 종교를 찾는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진실된 생각같지만 실상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영원히 꿰뚫어볼 수 없는 우매한 자들의 유치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經의 그릇된 절대성을 유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요, 유대민족의 그러한 종교문화는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 상황과 운명에서 기인된 것을 뿐이다.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罪業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을 設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의 해답이다.

중교란 무엇인가? 침묵할 지어다. 구태여 나의 口業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 김용옥의 所見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금강경이란, 어떤 종교조직의 교리경전이라기 보다는, 두 밀레니엄동안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온 진리체계인 것이다. 나의 설법은 나 개인의 독단이 되기 쉽다. 그러나 금강경의 설법은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역사의 축적된 진리의 氣가 설법하는 것이다. "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設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키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經에 종교의 본질이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내가 어지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한손가?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스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敎(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設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요,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設하는 몇몇의 통찰에 感入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스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21세기의 인류의 과제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악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첫째가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ecological concern)이요, 그 두째가 모든 종교 이념간의 배타의 해소(religious coexistence)요, 그 셋째가 학문의 생활화(The decompartmentalization of human intelligence)이다.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제각기 인류를 구원하다고 선포하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종교야말로 인류를 억압하고 대규모의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파라독스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無明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 
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종교간의 배타의 문제에 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도들보다는 기독교들에게서 매우 강렬한 배타의식을 직면하게 된다. 나의 긍정이 타의 부정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그들의 "전도주의"(Evangelsim)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의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선민의식(Chosen People)의 연장태일 뿐이요,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이란 팔레스타인이나 이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속에서 살아가야만했던 유랑하는 유목민족의 역사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된 후천적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기되어야 할 "구약", 즉 "옛 약속"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하는 보편주의적 사랑의 약속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은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Apostle for Gentiles),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萬敎를 統攝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최근 내가 원광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원불교도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고 또 깊은 이해를 하게되었는데, 원불교도 애초에는 조선의 땅의 고유한 환경속에서 피어난 혁신불교운동이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賞讚하 
는 것은, 바로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를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잠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났건만 그 생각의 포용성이 소박하면서도 세계의 여타 종교의 편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열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通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인 것이다. 금세기(20세기) 기독교는 조선땅에서 놀라운 확대의 일로를 걸었다. 그러한 확대는 배타적 전도주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확산이 이제 축소의 일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유기체의 법칙이다. 21세기 조선의 기독교는 20세기의 팽창주의 추세를 유지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팽창주의적 확대만을 모색한다면 기독교는 이땅에서 불운한 역방향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배타에 배타로 맞서서는 아니된다. 배타는 자기논리에 의하여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배타에는, 수모가 따를지라도, 끊임없는 포용의 자세로 임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의 금강경강해를 불교도가 듣기 보다는, 기독교집안에서 자라난 편견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21세기 문명사적 과제상황의 근원적인 해결의 열쇠가 이 금강경속에 다소곳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賢者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이렇게 해서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의 연재를 마칩니다.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1)

아래글은 도올 김용옥의 여자란 무언인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작대기와 구멍의 신화

서양에서는 사람을 맨이라고 부르고 한자 문명권에서는 사람을 르언(사람 人의 중국식 발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맨과 르언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다르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맨에는 성(性)이 규정되어 있는 데 반해 르언에는 성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맨이라는 단어를 쓰는 튜톤어군에서 맨은 사람 즉 우리가 성별의 구분없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의 총집합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중에서 여자를 제외한 남자만을 의미한다. 여자들은 분노를 터뜨릴 만한 일이겠지만, 여자는 맨이라는 언어의 엄밀한 의미를 추적해 들어간다면 분명 인간이 아니다. 남자만이 인간인 것이다.

그럼 서양에서는 여자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설명이 필요없이 우맨(Woman)이라고 한다. 우맨은 맨과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다른 성이 아니며, 그 성에 대한 독립된 어원을 가지는 단어조차 없다. 우맨은 맨에다가 우를 붙힌 것일 뿐이다.

즉 우맨은 맨의 일종이면 맨에게 종속되는 그 무엇이다. 우맨이란 말은 영어사적으로 고찰하면 13세기말에 문헌적으로 나타나는데 고대 영어의 초기에는 없었고, 중세 영어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와이프라는 말과 맨이라는 말의 복합어 Wifman이다. 와이프라는 말은 우맨보다 사적으로 선행하는 말로서 와이프의 초기 의미는 그냥 여자라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 그러다가 9세기 말경부터 결혼이라는 예식에 의하여 남자에게 종속된 사람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맨은 맨에 대한 우이며 곧 남자의 배우자로서만, 즉 남자라는 인간의 어떠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짝으로서만 그 존재의의를 갖는 동물이다.

혹 어느 독자는 내가 영어에 나타난 남녀 구조만을 가지고 서구 문명 전체를 규정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무식한 비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오르겠지만 그것은 서구 문명의 모든 언어 구조와 사고 구조에 정확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매우 특유하고도 저열한 사고방식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왜 싸르트르의 애인 시몬 드 보봐르가 그의 여성해방의 역저를 <제2의 성>이라고 제목 붙혔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서양에 있어서의 여성은 그 전 역사를 통해서 인성(humanity)의 제1차적인 성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성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2차적인 제2의 성이며, 남성과 동등한 다른 성이 아니다.

남성은 남성 자신의 몸만이 우주와의 직접적이고 정상적인 커넥션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주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 그들 자신이 여성의 몸은 불완전한 것이며 하나의 장애이며 감옥이며 여성의 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모두 그 특성 자체의 이유로 2차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교육받은 한국의 여성이라면 누구든지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 그 결어의 덕택에 여성일 뿐이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을 자연상태의 결함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일찍이 여자를 규정하여 불완전한 남자이자 그것은 하나의 개연적인 존재라고 했다. 즉 존재해야만 할 필연성이 없는 존재론적인 하위 개념으로 설정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무엇이든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피조물이 아니며 또 항구성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이따위 시시껍절한 말들을 위대한 사람들의 아구를 빌어 나열하기란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럼 도대체 왜 여자는 제2의 성이 되어야만 했는가? 왜 그럼 애초부터 여자가 제1의 성이 되고 남자가 제2의 성이 될 수는 없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매우 복잡한 인간 존재와 그 역사의 총체적 분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쉽사리 해답될 수는 없다.

나는 서구문명에 있어서 여성의 제2의 성됨의 가장 원천적 출전을 창세기에서 찾는다. <구약성서>가 서구문명 전반에 끼친 영향은 나의 재론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창세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서구인이 인류의 조상으로 알고 있는 아담이라는 말이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히브리어에서는 사람이라는 일반명사로 쓰이는 말이며 그것은 진흙을 뜻하는 아담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맨이 사람과 남자를 동시에 뜻한다는 튜톤어에 대한 우리의 논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아담이 곧 사람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 할 때 사람은 곧 아담이었으며 아담의 개념 속에 여자는 들어가 있지 않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사람으로서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아담이라는 남자이며, 단지 그 남자가 그 사람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하기 때문에, 그 심심함을 풀기 위한 파트너로서 여자가 제공되는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 사람이 아담의 갈빗대, 그 많은 갈빗대 중에서도 단지 하나를 뽑아 그 자리는 살로 메우고 만든 아담의 부속체이며 연장이다.

이것은 이 신화가 만들어진 당시의 인간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그 인식 구조를 반영할 뿐인 것이다. 여자가 아담의 갈빗대 하나에 불과한 부수적 존재라는 사실은 이 신화가 얼마나 철저하게 부계 중심이며 막강한 가부장제적 권력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의 혹평이 필요 없다. 여자는 보쉬에의 표현대로 아담의 "남아 돌아가는 뼈다귀"에 불과한 것이다.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2)

아담이 자기 몸에서 뛰쳐나온 여자(히브리어로는 하와, 영어식 발음으로는 이브. 후에 아담이 지어 불러준 이름이다. 하와는 어원적으로 생명을 뜻하며 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리란 뜻에서 아담이 지었다. 즉 모성의 의미가 강하다. 창세기 3장 20절)를 바라보았을 때 외친 싯구 "여자라고 부르리라 남자로부터 나왔으니"에서 히브리 원어는 우리말 번역처럼 여자와 남자라는 독립적 어원을 갖지 않는다.

그 싯구에서의 남자는 이쉬이며 여자는 이쉬솨이다. 즉 여자는 남자인 이쉬에 솨 하나만 덧붙인 것이다. 이는 영어의 맨과 우맨의 관계와 동일하다.

우리말의 여자는 남자라는 어간에 음절 하나를 더 붙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남자에 대하여 여자를 여남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여자로서 독자적인 영역이 확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쉬솨는 이쉬의 배필로서만 의미를 갖는 아내일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남녀를 불문하고 여자의 보지 구멍에서 태어난다는 이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 그리고 그 구멍이야말로 모든 생물의 원천으로서의 신성한 의미를 갖는다는 보편적 종교학적 사실을 완전히 거부한 이 창세기의 신화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된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거짓말이 꾸며지고 지금까지 인류를 농락하고 있는가? 혹자는 여자가 여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사실은 매우 우연하고 단순한 사실일 뿐이며 그것을 확대 해석하여 인간 진리의 전반을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철학적 궤변일 뿐이라고 말할 지 모른다. 또 남자:여자의 언어적 사실과 맨:우맨, 이쉬:이쉬솨의 언어적 사실의 대비가 동양철학자인 나에 의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물론 이러한 모든 대비와 그 대비를 가능케 한 발상은 완전히 나의 독창적인 것임을 밝혀둔다) 그 의도가 동양을 옹호하고 서양을 내려침은 아니다.

예수는 씹을 줄 알면서 공자는 씹을 줄 모르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공자는 너무도 엄청나게 씹혀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또 씹어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하지만 예수를 소신껏 씹는 놈은 없다. 예수를 씹으면 벼락 맞아 뒈지는 줄로만 알고 있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미신성이 있고 타부가 걸려있다.

창세기 신화에 나타나는 여성관은 서구인을 수천 년 지배했고 최근세에는 전세계로 확대되어 인류를 농락하고 있는 거짓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거짓말은 실상 중동 문명권의 매우 특수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형성된 특수한 문화 가치의 소산이다.

여성 문제에 관해 다방면의 분야의 성과를 섭렵하여 서구 역사를 통해 여성이 얼마나 억압되어 왔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 보봐르의 경우도 그녀의 최대 약점은 비교문화론적 시각의 결여에 있다. 즉 서구 중심적 사고의 울타리 속에서만, 그 역사의 구조 속에서만 맴맴 돌며 여성의 울분을 외칠 뿐이다.

여성의 비극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지만 그 비극이 초래된 문화사적 배경의 전관적(全觀的) 시각과 그에 대한 명쾌한 미래 방향의 제시가 석연하지 못하다.

우선 동서문화의 그랜드 스케일의 비교문화론을 운운하기 전에 우리의 주제를 장식했던 제목의 글자의 자의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우리가 중국 글자를 논할 때 전통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의거했던 것은 기원후 100년경에 성립되었다고 추측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 어원사전인 <說文해자설문解字>이다. 후한의 쉬선(許愼)이 만든 것으로 그 책 제목을 오늘말로 바꾸면 단순자를 설명하고 복합자를 푼다는 뜻이 된다.

<설문해자>에는 르언 즉 사람 人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해가 붙어 있다. "하늘과 땅의 성(性)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이것은 주문인데 팔과 다리의 형상을 본뜬 것이다." 이 설명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人이라는 글자의 형상이 인간의 팔과 다리를 그렸을 뿐 남녀가 구분되어지는 성기의 모습을 나타냈다든가 하나의 성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서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설문해자>의 설명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끄는 대목을 "천지지성최귀자야 天地之性最貴者也"라는 부분이다. <설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으로 간주되는 청나라 때의 뚜안 위차이가 쓴 <설문해자주>는 바로 이 부분을 <예기 禮記>의 예운편의 人을 해설한 문장을 인용하여 주를 달고 잇다.

예운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힘이 합쳐진 것이며, 음과 양의 기운이 교합한 것이며, 형체와 신령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늘과 땅을 이루는 다섯 운행의 가장 빼어난 기를 타고난 것이다....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덕성의 핵심을 모은 것이며, 또 하늘과 땅을 이루는 다섯 운행의 모든 단서가 집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다섯 가지 맛을 다 먹을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의 다섯 가지 소리를 다 구분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의 다섯 가지 색깔을 다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인은 모든 법칙을 만들 때 반드시 하늘과 땅을 가지고 그 근본을 삼는다..."

이러한 <예운>의 기록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의 특수성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의 탄생이, 하나님이 여섯 날 동안 이 세상을 다 만들고 힘들어서 하루를 쉬고 나서 또 심심하니까,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해서 삭막하니까, 사람이나 우선 만들자고 흙으로 빚어서 콧구멍에서 입김이나 훅 불어서 만든 그따위 비지개떡 만드는 식의 조작적 탄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그 자체에 내재하는 덕성의 생명력의 결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3)

그리고 하늘과 땅 자체가 여성성과 남성성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체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天地之德, 陰陽之交, 鬼神之會"라는 원문에 있어서 地-陰-鬼와 天-陽-神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자든 남자든 불문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하늘성과 땅성, 양성과 음성, 신성과 귀성의 교회(交會)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이해는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여자와 남자의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또 대부분의 중국 고문헌이 이런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나의 이런 원리적 설명이 동양사회 남녀관계의 현실적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사적 시각으로 남녀의 문제를 규명해 들어가면 그 현실적 양태는 동서에 별 차이가 없다. 부권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와 동동한 위치를 향유한 역사는 인류사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최소한 그런 제도사의 사회경제사적 분석에 앞서서 그들이 이상으로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 체계가 너무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해 놓고 그 현실적 모순을 더 깊게 천착해 들어가려는 나의 작전 계획을 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부연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철학적 사실은 창세기의 신화나 예운의 설명 방식이 그 연원에 있어서는 거의 동시대에 성립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인간 창조를 설명하는 어떤 원리적 틀이 결여된 단순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하여 예운의 인간 형성이 설명 방식을 음양오행이라는 매우 과학적이고 원리적인 설명원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자! 그럼 여자 女子라고 할 때의 女라는 글자의 원형을 추적해 보자.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상형문자가 아니다. 상형은 사물의 형체라는 공간성을 주로 나타내고 또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그 공간적 물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 때문에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인간의 관념이나 시간적 개념들, 그리고 공간적 물체와 관계없이 순수한 의미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개념들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제약이 뒤따른다. 그래서 생겨난 문자가 희의자(會意字)와 형성자(形聲字)이다.

회의자란 상형자에서 성립하고 있는 뜻과 뜻을 모아서 만든 뜻글자이고 형성자란 형체를 본뜬 상형자의 문자성분과 순수하게 그 뜻과 관계없이 소리만을 나타내는 문자 성분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소리글자이다. 한자의 발전은 이런 문자학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단계적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형 -> 회의 ->형성의 순서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자의 90%가 형성자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한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형문자가 아니다. 그러나 상형문자의 뜻을 일반적으로 넓게 쓰는 용법으로 규정하여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女)나 남(男)이라는 글자는 중국문자학사상 최고층에 속하는 갑골문자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女)년 상형자이고 남(男)은 회의자라는 사실은 男보다는 女가 앞선다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女라는 글자는 여성의 어떤 특징적인 모습을 그린 상형자이다. 그러므로 女는 매우 원초적인 시기에 이미 형성된 글자이며 그러나 男이라는 글자는 田자와 力자의 합자이다. 力이란 밭을 가는 농구구인 보습의 상형이며 田+力의 합자는 힘써 밭을 가는 장부의 모습이라고 <설문>은 말하고 있다.

즉 男은 단순한 상형자가 아니라 田이라는 상형자와 力이라는 상형자가 형성된 후에 그 상형자가 의미하는 뜻을 모아 만든 글자이므로 결코 원초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가 고도화된 이후의 개념을 나타내며, 사회경제사적 분석시간을 빌리면 농경문화의 성숙 이후의 개념이다. 그리고 男이라는 글자의 용례를 보면 그것이 단순히 농지 경작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농지의 관리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미 사회계급이 분화된 이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女라는 글자는 매우 원초적이고 안정성이 있으며 포괄작인 글자이다. 우리는 보통 옥편으로 글자를 찾을 때 글자를 분류한 부수 즉 변으로 찾는데 계집녀 변은 있지만 사내남 변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중국문자에서 계집은 사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주체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 주기 바란다.

女는 <설문해자>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순수한 상형자이다. 갑골문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사계의 권위자인 시라카와씨는 이를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설명이 부지불식간에 현대적인 여성관념에 사로잡혀 전체적 측면을 보지 못한 설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굴종적인 개념밖에는 이 해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우선 <설문>에서 "女, 婦人也, 象形" (女는 부인을 말한다. 상형자이다)라고 짧게 설해를 붙인 사실에 주목한다. 즉 女가 추상적인 여성의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개념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처녀를 제외한 부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문>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내가 주목한 사실은 우리가 엄마의 의미로 쓰고 있는 어미 모(母)자의 갑골문 고형이 바로 계집 女자와 동일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갑골문에서 母자는 계집 女의 유방 두 개만 첨가되었을 뿐 글자의 모습이 동일하다.

<설문>에는 이 母자를 설해하여 "아기를 가슴에 품고 젖을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 아기의 모습이 갑골문이나 금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쉬선의 추측은 부정확한 것이다. 갑골문에 있어서 母와 女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며 금문(金文)에는 여자의 이름을 母자를 써서 만든 경우가 많으니 可母 魚母와 같은 예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女가 부인을 뜻하는 것과 또 女가 母와 동자(同字)라는 사실 그리고 여자를 나타내는 母자에 젖통(젖통은 유방의 순수 우리말임)이 강조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은 일맥상통하는 연관체인 것으로 보인다.

女가 상형이라면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본 뜬 것일까?

나는 인디안의 풍습을 그린 영화를 볼 때마다 유의하여 관찰한 여자의 모습이 있다. 인디안 여자가 아기를 낳는 모습이다. 인디안 여자는 아기가 밑으로 나올 때가 되면 땅 위에 꿇어앉아 양 무릎 가랑이 사이의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똥을 누듯이 아기가 나오면 양손으로 받아낸다.

터키의 중부에 있는 카탈 휘이크 지방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여신의 형상도 마찬가지였다. 이 출토품은 BC 6,500년에서 5,7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류사에서 최초의 해산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즈텍 문명에서 출토된 여신 틀라졸테오틀의 해산 모습도 역시 동일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그 가랑이에서 애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해산 모습이 고대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고대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집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곡식이 많이 생산되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고 자식이 많이 생산되어야 그 집단이 부강해질 수 있다.

생산, 그것은 그 집단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며 고대사회에서는 그 생산을 가능케 하는 힘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의식이 발달한다. 이를 인류학에서는 퍼틸리티 컬트(fertility cult) 즉 생산 숭배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아기를 낳는 것을 "생산하신다"라고 하는 용법도 이러한 생산 숭배에서 그 근원이 찾아지는 것이다. 생산숭배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그러한 고대의 인간 중심적 사회에 있어서는 그러한 생산성의 상징으로 여성의 성기, 즉 보지에 대한 숭배가 의식화하게 된다.

앞서 인용한 여신들의 형상이 해산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 숭배의 종교적 의식에 그 출토품이 쓰였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 생산성은 여성을 특징 지우는 생물학적 사실로 이 생산성 때문에 여성은 고귀해지기도 하고 비천해지기도 하는, 그야말로 여성이라는 존재에서 떼어 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규명해야 할 것은 女子라고 할 때의 子의 의미이다. 우리는 子 하면 아들을 말하면 그것이 남성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의 천편일률적 천자문의 훈의 해독에 불과하다.

子라는 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글자이다. 女子라는 말에서 子를 아들로만 훈을 단다면 계집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說文解字注>에 나온 여자의 해설을 들어보자

"여자라고 말하는 것은 남자와 짝을 지어서 대칭으로 말하는 것이다. 子라는 것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모두 부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또한 여자의 자는 그 부모에 매여 말한 것이니 자식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해설은 후대의 용법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여자라는 말은 고어에는 없는 용법이다. 한문이란 기본적으로 단음절 언어이기 때문에 女면 女고 子면 子이지 女子라는 복음절 단어는 후대에 형성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子라는 말에는 반드시 성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즉 <詩經>의 용법상으로 子는 남자, 여자에게 구분 없이 다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자의 용법을 아들 자로만 규정 짓는 오류는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왜 분명히 르언(人)은 남과 여라는 상대적이면서도 동등한(논리적으로) 두 개념의 교합체로 이해되고 있는 데 반하여 왜 맨(사람)은 맨(남자)라는 즉자적(卽自的) 절대성에 의하여만 규정되고 있는가? 왜 여자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즉자가 될 수 없고 즉자에 대한 타자(他者)로서만 이해되는가? 왜 남과 여는 동등한 대자(對自)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맨은 맨에 대한 우로서만, 저급하고 비본질적이며 우연적인 위치밖에 차지할 수 없는가?

즉자에 대한 타자가 성립한다면 바로 동일한 논리에 의하여 그 타자는 즉자가 되고 그 즉자는 다시 타자화해버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항상 즉자와 타자간의 충돌이 생겨나고 이러한 충돌을 막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여태까지 어려웠던 논의를 매우 쉬운 말로 풀면 다음과 같다.

"맨(man)에 있어서 보지는 자지의 결여태이다. 그런데 르언(人)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담에게서 이미 완성되었다. 그래서 아담(남자=사람=진흙)인 남자는 자기라는 즉자(the one)를 대자가 필요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완전한 존재의 모습은 두 다리 가랑이 사이에 대포 받침의 두 바퀴와 같은 불알이 딱 버티고 있고 그 불알 위에 대포 같은 작대기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우뚝 솟은 작대기의 형상이 소위 자지라는 것인데, 이 위대한 자지, 가끔 수시로 울끈불끈 빳빳해지는 이 자지의 형상이야말로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며, 신과 통하는 초월(transcendence)을 상징한다.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4)

그런데 에덴동산에 데려다놓은 걸작품의 그 부분이 울끈불끈 서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데, 분명 그 작용은 신의 창조의 중요한 부분일 텐데, 그 작용을 완수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대기를 끼워서 그 작대기의 작용을 완수시킬 수 있는 구멍을 창조하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아담의 갈빗대 하나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새로이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아담으로부터 그 아담의 물건을 끼워 맞추기 위한 구멍으로서 주문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에 진저리를 치실 독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의 이러한 표현은 눈곱만큼의 과장이 없는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성립한 인간관의 현실이다.

내 말을 과장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기독교인들이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에 한 번만 더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한다.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 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

이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전근대적인 망언은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김없는 거룩한 성서의 말이며, 또 그 털보 바울의 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여자가 밖에 나다닐 때 면포(천의, 너울, 장옷 등)로 얼굴을 가리는 풍속은 조선조 후기에나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은 어떠한 여성철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 위계질서의 변화에 따른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중동문명권의 경우, 물론 후기 서구라파 문명도 포함하여, 태곳적부터 이미 여자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다닐 수도 없었고, 회당에서 말도 할 수 없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면포로 가리고 와야한다고 으름장을 주면서, 그의 맹랑한 여성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이미 모세의 시절로부터 수천 년 내려온 유태민족의 풍습과, 그 풍습을 양식화한 창세기의 인간창조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의 여성관은 불행하게도 향후 2천년 인류 역사의 중요한 부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로마대제국의 전성기를 거쳐 중세기, 르네상스, 오늘의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이 기독교 문화에서 성립한 여성관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금 그 문명이 제시하고 있는 철학. 종교. 문학. 심리의 결정적 패턴을 유실하고 만다.

창세기의 창조설화가 말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확인하고 또 지그문트 프로이드에게까지 연결되고 있는 이 작대기와 구멍의 신화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그 구멍은 작대기를 끼우기 위한 것으로서만 그 존재 의의를 갖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대로 그 구멍 자체가 그 작대기를 위하여만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 구멍은 그 나름대로 존재 의의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설화의 양식 속에서 그 구멍은 그 작대기의 결여태로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 구멍은 그 작대기가 없는 상태, 빠진 상태, 빈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는 자지의 결여태이며,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보다 고상하게 이를 표현하여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태라고 했던 것이다.

보지는 자지의 결여태라는 생각은,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동양인의 사유구조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동양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여성의 현 실태를 적나라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가 확보된 이유는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결여태로 보는 철학에 있지는 않다.

보지를 자지의 결여태라고 하는 생각의 20세기적 표현은 비엔나의 의과대학생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드에게서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거세불안)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는 또 그 유명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는 보봐르의 <제2의 성>의 가장 중요한 테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레이션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외디푸스 콤플렉스과 프로이드의 마음에 자리잡은 것은 대강 1897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카스트레이션 콤플렉스도 그 전후로 프로이드에 의해 처음 하나의 가설로 인류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의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바로 이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표리를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유아심리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것이며, 또 뉴로시스(신경정신질환)의 정신역학의 구조를 밝히는 데 가장 탁월한 업적으로 평가되며 오늘날 정신분석학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몰론 이 때의 유아 심리란, 주로 유아심리의 발전 단계를 프로이드의 구분에 따라 입 단계, 똥구멍단계, 자지 단계로 나눈다면 제3단계인 자지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제3단계가 이미 보지 단계가 아니고 자지 단계라는 사실, 즉 유아심리 발전에 있어서 보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이 매우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이미 프로이드학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로 분석을 시작하자.

거세 불안이란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가 생후 약 2년 동안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가 우리 나이로 3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남자아이는 여자 몸에 자기가 가랑이에 달고 있는 대포 같은 작대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여자아이는 남자 몸에 자기의 몸에 없는 것이 불쑥 뛰쳐나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러한 있음과 없음의 인식이 바로 그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남자아이는 자기의 자지가 여자아이처럼 "짤려 없어질 것(거세)"을 걱정하게 되고 이에 대한 공포는 때마침 생기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즉, 엄마라는 존재를 하나의 성욕의 대상(love object, 이 때 love는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정확하게 씹한다는 뜻임)으로 느끼는 심리가 발동함에 따라 그것과 가중하여 아버지가 죽이고 싶도록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엄마와 씹하고 싶어지고 아버지는 내 자지를 짤라버릴 나쁜 놈, 즉 나의 정욕적 쾌감의 원천인 그 아름답고 좋은 자지를 탐낼 나쁜 놈으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며 그와 경쟁의 관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의 관계로부터의 탈피 과정, 즉 아버지라는 권위의 우산으로부터의 탈피 과정, 그리고 엄마라는 성욕의 대상에서 진짜 씹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의 이행 과정이 곧 인간의 성숙 과정이며 이러한 성숙 과정에서 그러한 이행을 스무쓰하게 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적 현상이 뉴로시스(신경정신질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의 핵심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프로이드는 과연 맞는가? 과연 나는 거세불안 속에서 떨면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성장했는가? 그대들의 삶을 뒤돌아볼 때 과연 그러했는가?

프로이드에 의하면 여아는 자기 보지에 자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지에 대한 선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지를 가진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고, 엄마는 아버지와 자기의 욕망적 관계를 질투하는 방해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웃기는 이야기다. 나는 과연 우리 나라의 여성들이 자기의 유아 의식을 회고해보건대 몇 퍼센트나 자지 선망을 체험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고려대학생 남녀 천여명을 상대로 설문을 해본 결과에 의하면 프로이드의 이론에 가깝게 오는 상황이 5%도 되지 않는다.

우선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때 두 가지의 뺨이 분화된다는 것인다. 즉 영양섭취의 뺨과 성욕적인 뺨으로 분화되는 데, 이 성욕적인 뺨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유아가 엄마의 젖을 빨면서 그 대상을 자기 성욕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입 단계로부터 시작하는 쾌감은 원래 자애적인 것인데 아이의 성숙은 이러한 자애를 포기하고 그 애(愛)를 대상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기술을 잘 뜯어보면 그는 매우 명백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즉 아들이나 딸이나 다 여자인 엄마가 키운다는 사실, 그러면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과 엄마의 유방 사이에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라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범하고 있는 제1의 오류는 인간의 성감(sexual pleasure)을 단지 이성간의 관계, 즉 보지 속에 자지를 끼워놓고 펌프질하는 행위로만 보는 오류이다. 그래서 아들 - 엄마, 딸 - 아버지라는 매우 단순한 크로스적인 관계만이 발생하고 있다. 물론 유식한 독자는 프로이드의 섹스 개념이 그렇게 유치한 이성간의 펌프질이라는 씹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반 의식형태를 규정하는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우주를 설명하는 보편적 원리로서의 틀리라는 것이라고 나를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 프로이드의 섹스 개념의 추상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추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는, 보다 실존적이고 이면적이고 핵심적인 그 자신의 섹스 개념은 이성간의 펌프질이라는 너무도 협소한 성개념이라는 것이다.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5)

인간의 섹스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섹스를 가지고 이 우주를 설명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는 너무도 섹스 그 자체를 몰랐다. 나는 프로이드 개인 자신의 성생활이 매우 유치한 것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너무 성욕에 신들린(사로잡힌)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로이드가 범하고 있는 제2의 오류는 인간의 세계를 너무도 섹스라는 하나의 관점에서만 모두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드 비판가들에 의하여 범색론의 오류(the fallacy of pansexualism)라고 이미 지적된 것이지만, 인간의 심리나 의식 현상은 매우 복잡다단한 것이다. 그리고 병적 현상뿐만 아니라 정상적 현상도 그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프로이드의 범색론이야말로 20세기 인류사에 그가 끼친 거대한 공적과 더불어 막대한 해독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단순히 성욕의 불만이라는 문제만으로 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문제를 파악 못하고 자기 자신을 파멸로 휘몰아가고 있는 수많은 우리 나라의 프로이디안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다. 섹스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이지만 여러분들이나 프로이드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마어마한 괴물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보다 본질적인 여러 측면의 이해를 부족하게 가진 많은 정신분석의사들이 그들의 환자에게 저지르고 있는 오류 내지는 범죄를 잘 알고 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경우에도 근친상간의 환상이 그렇게도 유아 발달심리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보는 것은 인간의 매우 천박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즉, 프로이드가 보고 있는 인간의 이드적 세계에는 이미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문화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특별히 성욕을 억압하여 오고 또 그 성욕이라는 것을 죄악의 원천으로 보는 기독교적 모랄 구조의 틀이 전개되지 않고서는 그가 말하는 이드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이드는 기독교 윤리의 억압 속에서 형성된 인간관의 맥락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융이 르포이드에게 반발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국부성을 절대성으로 확장시키는 오류에 있었던 것이다. 성욕을 억제의 대상으로는 보았어도 전혀 죄악(Original Sin)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동양의 문화전통 속의 인간의 인격 구조 속에서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그러한 인격 구조의 긴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내가 지적하는 프로이드이 허점은 바로 우리가 여태까지 진행시켜 왔던 여자의 주제와 가장 밀착되는 비판이다. 즉 보지는 자지의 결여태라는 우리 논의의 구조와 프로이드의 가설들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와 그로부터 말미암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존재론적 판단, 즉 보지는 자지의 비존재 형태라는 판단이 없이는 완전히 그 콤플렉스가 설 기반을 상실하고 만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는 바로 서구문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태고의 히브리 신화의 구조, 즉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성립한 작대기 - 구멍의 인간관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드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매우 명백한 존재론적 가설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자지가 짤린다"는 불안은 그 불안에 앞서서 "저 보지는 내 자지가 비존재하는 것이다. 내 자지는 완전하고 좋은 것이고 저 보지는 불완전하고 나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비존재가 되기 싫다"는 존재론적 판단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과연 모든 남자아기와 여자아기가 그러한 존재론적 판단을 잠재 의식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내리고 있는가? 독자들은 과연 그대들의 과거를 회상해볼 때 그러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는가?

여자아기는 아버지를 따라 공동 목욕탕에 가서 무수한 자지를 보았을 것이고, 남자아기는 엄마 따라 공동 목욕탕에 가서 무수한 보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선망의 대상이고 경멸의 대상이었던가?

혹 어느 프로이드에 미쳐 있는 정신분석의사님은 나보고 이러한 설득으로는 프로이드의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 깨지지 않는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를 반박할 수 있다.

첫째, 프로이드의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는 결코 과학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카스트레이숀 콤플렉스는 단지 프로이드라는 산 개인의사가 환자들과의 접촉에서 느꼈던 모종의 느낌을 좀 조직적으로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기술은 매우 문학적이며 결코 시험관에서 파란 것이 빨갛게 되는 것 같은 물리적 사실은 아니다.

둘재, 나른 반박하는 정신분석의사 자신의 나에게 설득되기 전에 이미 프로이드에게 설득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설득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그 형이상학은 결국 아담의 신화며, 맨의 신화며, 바울의 면사포 신화일 뿐이다.

형이상학이란 견해를 달리하여 보면 뒤집어지는 것이다. 단지 그 견해의 시각이 너무도 강한 권위에 의하여 바뀌어질 수 없도록 강력하게 고정되어 있을 때, 그 시각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보통 인간들에게는 없을 뿐이다.

프로이드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한 동양인 반응을, 나에게는 우리 나라의 못난 프로이디안 정신과 의사보다는 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한 사람, 우리 나라 사람에게 너무도 유명한 중국의 저널리스트인 임어당(린 위탕 林語堂)은 그의 <생활의 발견>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인인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서양 사람들은 너무 섹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너무도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리고 그들의 매우 괴이한 여성관의 특징은 여자를 남자의 씹짝(mate)로만 생각하고 여자를 엄마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여자란 아기를 요람 곁에 서서 내려다볼 때, 그리고 풍만한 젖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을 때, 그리고 손에 네다섯 살 난 아이를 잡고 걸어갈 때 가장 아름답고 진지하고 위엄 있게 보인다. ... 혹자는 내가 모성의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할 지 모른다. 그거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소위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는 중국인에게는 어차피 별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아버지와 딸의 콤플렉스, 아들과 엄마의 콤플렉스, 소위 프로이드가 말하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란 것에 대한 어떠한 운운도 우리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며, 너무도 웃기는 가설일 뿐이다. 이러한 나의 여성관은 나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중국인들이 지녀온 가정의 이상관의 영향하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더 타당할 것이다."

어떻게 보지가 자지의 결여란 말인가?

보지와 자지는 생물할적인 사실이며 그것은 결코 인류 역사의 사건은 아니다. 보지는 보지며 자지는 자지다

 


도올의 비판-로마제국의 환영 기독교

문화제국주의

러셀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환영이라고 보았다. 왜 그랬을까? 
제국주의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에 있다. 용산에 미군부대가 없어져도 미국이라는 문화의 지배는 이 땅에 오래 살아 남는다. 당(唐)나라 문명이 통일신라문명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했듯이‥‥‥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은 사라져도 로마제국의 환영(幻影), 기독교 문화제국주의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어떤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의 도올 김용옥선생의 글을 읽으면 문화제국주의의 본질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쉽게 국제적 여론을 피해가며 그 나라를 장악하는 길은 우선 그 나라에 우리나라 말을 잘하고 우리나라 풍속과 종교를 잘 알고 우리나라 풍속과 종교를 잘 알고 우리나라 문명의 모든 것을 숭상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확보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우리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언어의 공통분모를 가진 그들을 대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숫자를 될 수 있는 대로 늘이기 위하여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명분아래 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들을 서울대, 연대, 고대, 이화대 등 명문의 학교에 유학시켜 프라이드를 줄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한복을 입게되고 한옥에 살게되며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를 모시는 단군교를 믿게 된다(우리나라의 모습이 한복-한옥-단군교-된장-꼬치장-김치밖에는 없다는 가설아래서 상기의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르트나 커피나 양고기요리보단 된장이나 꼬치장이나 김치 야채요리를 더 좋아하게 된다.

이들은 귀국하여 그 나라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선각자로서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종교적,정치적,문화적 리더로서 모든 러더쉽을 장악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단군교를 퍼뜨리고 단군교와 같이 퍼져들어갈 많은 문화적 소산과 생활습관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런 유학생들 작전외로도 한국의 단군교선교사를 그 나라에 파견할 것이다. 이 단군 선교사는 한국의 거대한 강남교회들의 연보돈의 지원을 받아(한국의 교회들이 모두 단군교교회라는 가설에서) 그 현지에 가서 단군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중동나라사람들이 알라신을 버리고 우리나라 단군할아버지을 경배하며, 길가 방방 곳곳에 우리나라 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같은 목장승, 석장승이 우뚝우뚝 서고 그들은 출근길에도 거기 서서 절을 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단군선교사들은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가르쳐서 사상의학대학을 세우고, 그들이 모두 한국약초풀뿌리에 의하여 병을 치료하도록 한다. 그들은 점점 한국보약과 침,뜸에 길들여져서 그들의 고유한 의학과 삶의 지혜를 망각해버릴 것이다. 그리곤 점점 그들의 가옥형태를 아름다운 한옥체제로 바꾸며 대통령의 관저까지 우리나라 99칸짜리 개와집처럼 만든다. 그들은 된장과 꼬치장과 김치를 먹고 고름 댕기달린 한복을 입는다. 이런 모든 생활습관에 길들여지면 그들은 그들의 사막문화에서 특이하게 발생했던 배두인족의 강인한 문명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고 점점 사막에서는 살기 싫게 되고 사계절 온대농경문화인 한국의 온화하고 온후한 생활습관을 더 고등한 문명의 체계(higher civilization)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전면적으로 진행되게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그 나라에게 이권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무엇이든지 한국적인 것이 없으면 도무지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국의 물자와 문명의 무형의 모든 것까지 계속 팔아먹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형국을 그 문명에 내재하는 내장장치로서 확보하게 된다. 웬만큼 한국군대나 외교관이 철수를 해도 그 나라의 지배는 낙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명의 환골탈태현상이 우리나라사람들에 의하여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시동만 걸었다) 그 중동나라 자국민들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열심히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일 때, 그것보다 더 달갑고 고마운 일은 없는 것이다. 이런 매우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가설의 체계는 결코 가설이 아니라 해방후 40년간 한국과 미국사이에서 이루어진 정확한 현실이다. ‥‥‥

한국 최근세사의 문화사의 최대의 비극,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장기 지속되고 있는 조선문화 황폐화, 말살화정책인 대처-비구싸움 및 그로 인한 종단내분은 바로 이러한 미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의 일환의 음모로서 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노망끼 늙은이 이승만이 벌린 정치조작극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대처-비구싸움을 붙인 "불교정화유시"는 사사오입개헌의 준비를 위하여 국민의 반독재적 관심을 호도시키고 혼란위기의식을 조장시키기 위한 위장술책이었으나 불교계에선 이러한 음모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 싸움의 기만술책에 휘말려 들어가 버릴 뿐이었고 한국불교는 이로써 종단의 자주성을 상실하는 "관권불교"와 "폭력불교"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 미제국주의와 그 앞잽이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연결되는 군사독재정권은 처절하게 조직적으로 한국민족세력 혹은 내가 말하는 반미(反美)아닌 비미(非美)적 문화(인식)의 가능성인 불교세력을 탄압, 분쇄시켰다. 그러한 조직적 탄압의 확증은 첫째, 대처-비구의 싸움조장이며 둘째는, 철저하게도 승려의 교육의 기회를 조직적으로 봉쇄시켰으며 셋째로는, 우리나라에서 고려대학과 더불어 유일한 민족재단학원인 동국대학교의 탄압과 관권화이다. ‥‥‥

미군놈들이 한국에 와서 상대하고 대접해준 한국사람들, 즉 그 당시 미국놈들하고 짝짝궁이 맞아서 출세한 놈들, 그 때 한국을 대변하여 향후 한국을 지배하는 어떤 틀을 농간한 인물들의 공통분모는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친미기독교도들이야말로 현대 한국의 상류사회를 독점한 인물들이었다. ‥‥‥ 한국기독교세력의 팽창시기는 정확하게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시기와 일치한다. 기독교가 군사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이란 우익팟쇼정권이다. 파시스트의 특징은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를 그 종교로 삼는다는데 있다. 2차대전 이후의 세계냉전체제에 있어서 반공이란 친미를 의미한다. 친미의 종교적 표현이란 곧 기독교다!

그렇다면 기독교세력의 팽창시기와 우익독재정권의 강화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 군사독재와 가장 강렬하게 대항한 세력이 바로 기독교세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제제국주주의의 브레인드레인 정책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박애주의적인 개방교육의 탈을 쓰기 때문에, 그 제국주의의 주체에 대하여 찬동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동시에 키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브레인드레인의 특색은 친제국과 반제국을 동시에 양육한다는데 그 뿌리깊은 반동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해방후 모든 반미제국주의의 사상형태는 바로 그것이 미국유학생들에 의해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지 쏘련과 중공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미국은 미제국의 유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반미(反美)를 가르친다. 미국은 반미 그 자체를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들이 콘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설정한다. ‥‥‥ 김지하를 죽였던 것도 미국이고 김지하를 살려낸 것도 미국이다. 김대중을 조선민중의 우상으로 만들어준 것도 미국이고 그를 조선민중의 똥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미국이다. 문익환을 교육시키느라고 돈댄 것도 미국이고 문익환을 반미투쟁의 기수로 키우느라고 돈댄 것도 미국이다. 한국의 모든 반미독재투쟁의 돈은 가난한 김일성 형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유럽의 기독교문화권에서 온다. 나 도올 김용옥도 이런 미제국주의의 자본으로 키워진 놈이다. 심지어 민중불교운동자금까지 유럽기독교재단에서 들어왔다고 한다면 또 말해 무엇하리요?"[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 - 정경(正經)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경(正經)을 성립시켰다.

♣ 정경(正經)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경(正經)을 성립시켰다.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경 대 외경의 구분이 부재했었다. ........ 그들(초대교회의 신도)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파루시아 즉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다.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 생전에 예수가 호령을 치면서 천사들의 소리와 신의 나팔소리를 반주로 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확신했고 그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고 자기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공중에서 예수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데전 5:16∼18). 그리고 이 미래사실이야말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최대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의 상징적, 은유적, 추상적 이해가 아니다. 예수의 재림이란 그러한 사실의 모습으로 이 시간 이 공간 속에서 현실화되어 일어난다고 확신했고, 후년에 그는 재림 전에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빌 1:20∼25)[류형기 <성서주해> Ⅳ:561] ......

대체적으로 초대교인들은 최저한 AD150년경까지는 긴박한 파루시아의 기대 속에서 살았다. 즉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현세는 단순한 준비과정에 불과했으므로 현세 속에서, 즉 역사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든지 역사 속에서 무엇을 성취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경전이 일차적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물론 파루시아는 계속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영화는 상연되지 않고 계속 연기공고만 나붙은 것이다. 이러한 지연 속에서 초기 기독교는 파루시아를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비종말화는 점차적으로 역사의식의 증대를 가져오고 그러한 역사의식은 교회론으로 종결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는 조직으로서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다. 교회야말로 천국의 지상에 있어서의 역사적 표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의 사상적 물줄기의 완성을 바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카톨릭 교회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초대기독교 문헌의 정경화는 이러한 교회론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해 내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A.D. 150년 경까지만 해도 예수사도나 기존경전의 인물이름을 빌어 무명으로 혹은 가명으로 경을 쓰는 일은 전혀 위작의 나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되었다. ........... 우리는 케리그마, 즉 예수의 수난,죽음,부활,승천의 보고, 그리고 그의 행위와 말의 수집이 원래 구전의 전통(oral tradition)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구전은 예수의 언어였던 아람어가 주축이었고 이 구전 자체가 희랍어로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희랍어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다 죽고 난 후에는 이 구전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게 된다. 복음서의 최초의 제작은 이러한 구전의 보존을 위하여 이루어졌고, 또 구전간의 상이에서 오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파벌들이 자기들의 구전을 기록하게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립은 교회의 예배와 의례(liturgy)를 위한 기록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제1세기 말경에는 상당수의 복음서들이 제작된다. 어떤 복음서들은 사도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부활한 예수의 직언이라고 하여 그 권위의 우위성을 보장받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여겨진 복음서에 대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여기는 복음서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정통성의 근거는 사도 저작성(apostolicity)이었다.

이 사도저작성이라는 기준자체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으로는 분쟁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고 2세기에는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소아세아를 중심으로한 동방교회 사이에 정경의 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2세기 말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3세기의 오리겐(Origen), 4세기초의 유세비우스(Eusevius)등에 의한 신학적 논란을 거쳐 조정과정을 거치는데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 애굽인 복음서(Gospel of the Egyptions), 바나바서(Letter of Barnabas), 12사도 교의서(Didache), 헤르마스의 목자서(Shepherd of Hermas), 바울행전(Acts of Paul),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요한행전(Acts of John), 그리고 도마복음서(Gospel of Thomas) 등등은 여러 분류방법에 의해 외전으로 탈락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의 27서가 정경으로 규정된 것은 아리아니즘(Arianism)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독교정통성의 옹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서였다. 라틴교회는 제롬(Jerome)의 영향 하에 아타나시우스의 결정을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27서 형태는 4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의 권위가 일시에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동서방교회에서는 기존의 성경을 썼다. 예를 들면 4세기 중엽의 시나이티쿠스 코우덱스판본(Codex Sinaiticlus)은 바나바서와 헤르마스서를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리아의 교회에서는 타티안이 편집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 5세기까지 쓰였고,....... 7세기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시리아에서는 27서짜리 경전이 쓰여지게 된다. 그 뒤로 1546년에 라틴 벌게이트(the Vulgate)가 인쇄되기까지 텍스트 그 자체는 계속 유동적었다. 마틴 루터는 경전성의 기준을 "사도성"과 "그리스도에게로 귀결되는 것"의 두 척도에 두었는데,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후자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으나 관습의 권위에 복종하여 이 네 편을 신약의 마지막에다가 포괄시켰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우리는 현존 텍스트 그 자체에 절대적 권위를 두고 일점일획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성찰되지 않은 통념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성경의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성경의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 신약성경의 원저자의 원사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인용된 성구들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국론>을 번역할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성경지식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우리의 성경지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 
이와같이 성경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것이다. 오늘까지 존재하는 사본 중에서 신약 27서 전체를 보전하고 있는 판본은 50종에 불과하며,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그리고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고판본의 해독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구두점 없는 한문 고전이 갖는 문제점과 대동소이하다." [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비판-이스라엘의 역사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는 바보새끼들은 더 이상 역사를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당시 사회 상황은 농부와 목자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는 점이다. 농부와 목자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에 자주 나온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몇세기에 걸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투쟁이 그 배경이 되고 있는데 이 형제 살인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오리엔트 메소포타미아의 목축신 두무지(다므스스)와 농경신 엔키무드의 투쟁 이야기이다.

성서에 보면 농부(카인)와 양치기(아벨)가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당하는 것은 농부이다. 이것은 농경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민족, 혹은 유목민족의 신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즉, 히브리인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신화의 힘> 중에서]

 

 

왜 카인이 여호와에게 선택을 받지 못하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 오늘날 가나안 민족이 히브리인들을 몰아내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면 이 유대의 민족신 여호와신 대신에 가나안 민족신인 바알신이 자리할 것이고 농부가 양치기를 밀어내고 선택받는 스토리가 채택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야말로 역사의 거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이러한 갈등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Bible을 읽는 다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도올 선생의 얘기를 들어 보자.

"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얼마나 심한 육체적 고통과 수련이 따르는가를 ―. 인류에게 있어서 "농경"이란 "현재적 고통"을 "미래적 쾌락"을 위해서 참는 "이성의 발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열심히 한눈 팔지 않고 모든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면서 가을의 수확의 기쁨을 위하여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또 수확을 저장하여 겨울을 넘기는 준비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 따른 주도면밀한 사고력이 없이는 농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중함"이란 곧 인간의 "이성"의 발전의 원초적 양태이며 곧 "농경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질서 속에서만, 그러한 농경의 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이러한 이성적 질서로부터 어떠한 "비이성적 해방"을 추구하게 된다. 농경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해방의 최초의 문명적 산물은 바로 "술"이었다 그리고 또 "色"이 있었다. 우리말에 항상 "酒色"이라는 말이 쌍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가 인류문화에 가장 원초적인 해방을 나타내는 보편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酒色"에서 "酒"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희랍의 농경민족에게서 발전된 바카스예배(Bacchilc Cult)이며, "色"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가나안 농경민족의 바알의 축제 즉 혼음의 축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카스 예배와 바알 예배가 우리민족에서는「東夷傳」의 영고(迎鼓)나 동맹(東盟), 그리고 솟터의 제사 속에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東夷傳」의 기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월과 시월에 國中大會하여 飮酒歌舞하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제의 모습이며, 「東夷傳」의 기자들은 "其俗淫"이라 하여 그 풍속이 음란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고도의 제국문명의 유교독존의 세뇌를 받은 중국의 지성의 눈에는 한민족(韓民族)의 모습이 매우 "음난"하게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민족의 사사들이 가나안의 바알축제를 그렇게 본 것처럼....... 그러나 이것을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구조의 틀 속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酒와 色의 축제는 희랍의 바카스축제(Bacchic cult), 가나안농경민족의 바알축제, 중국의 『시경(詩經)』, 우리나라의 견우,직녀의 신화 등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농경문화의 매우 중요한 전인류적 보편종교양식이다.

『구약』의 「사사기(士師記)」는 한마디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대립·마찰·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실존의 현장이며,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는 농경생활의 안락이나 그에 뿌리박고 있는 고도의 문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문화의 접촉에서 오는 초기현상적 칼춰쇼크(culture-shock)가 反文化的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사사들의 임무는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갈등, 즉 고도로 성숙한 가나안문화의 유혹과, 또 문명에 대한 저주와 방황하는 자유로 얼룩진 유목생활에 대한 참신한 동경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민족적 갈등으로부터 구출하고 야훼의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었다. 즉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새롭게 접촉한 바알신앙문화는 또한 참신한 유혹이었으며, 특히 농경의 생산예찬과 그로 인한 성적 해방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유혹은 하나의 타락이며, 야훼에 대한 배반이며, 계약의 위약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야훼자신이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야훼께서는 몹시 화가 나셔서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을 때 명령한 대로 이 백성은 살지 않는다. 통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사사기 2:20∼23 공동번역판)

이것은 야훼가 결코 몰아내지 못한 갈등이다. 그리고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이란 현존재의 시험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는 바보새끼들은 더 이상 역사를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에게 하느님이 있었다면, 「동이전(東夷傳)」에도 하느님이 있고 『시경(詩經)』에도 하느님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에게 나타났던 갈등은 어떠한 문명에서든지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의 갈등의 이스라엘적 표현에 불과하다." [도올<여자란 무엇인가>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

 

 

도올의 종교론-도올논어 20강

(신종추원)


[ 愼終追遠(20강) ]
요약: 이상훈

   이 강의는 대단히 중요한 강의라고 생각되며, 여러분들께 혹시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얕은 실력이나마 제가 뒤에다가  도올 선생의 저서에 있는 글을 비롯하여 살을 좀 보탰습니다.   참고 하시고 유익한 토론을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강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상례(喪禮) : 凶禮.     빈례(빈소차리는 예)와 장례(무덤만드는 예)로 구분    

  제례(祭禮) : 吉禮   
  愼終은 喪禮를 의미하고 追遠은 祭禮를 의미한다.

* 종교의 주제(the main theme)는 God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death)이다.

죽음은 유한성의 문제이다.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언어다. 인간은 언어를 얻는 대가로 죽음의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 죽음의 해결 방식    

· 시간 밖에서 : 기독교, 모든 고대 종교

· 시간 안에서 :  유교( 나의 존재는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의 연결은 무한하다. 조상숭배는 시간 안에서 해결하는 대표적 방식)  

-  개인적 해결 : 기독교, 불교

-  집단적 해결 : 유교 

積善之家, 必有餘慶 <주역><곤례문언>  인간의 구원을 家단위로 생각하고 있다.


* Hebert spencer(1820-1903)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진화론적 사고에 기초하여 모든 학문을 통합할려고 노력하였다
Ancesto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ligion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제사이다. - spencer의 <사회학원리> 중에서


* 여호와(야훼)는 유대종족의 하나님이다.  기독교인들은 절대 야훼를 믿는다고 하면 안된다.  야훼는 구약의 신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다르다. 유대교의 율법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낡은 약속 속의 폐기되어야 할 하느님이다.

* 모든 종교는 다신(多神)으로부터 출발한다.  

기독교 : 십계명 중의 제1계명 -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  (다른 신들의 존재 인정 :다신론)


* 多神論(polytheism)   --->     一神論(monotheism)   ---> 무신론(無神論)


유일신으로의 신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일치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은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유대민족에게도 다윗왕조 이래도 일신론(一神論)이 굳어진다. 중국에서도 진시왕 때에 와야 "상제" 등의 통일된 신의 개념이 생긴다. 그 전에는 모두 다신론이고 다신론의 모체는 조상숭배이다.  그리고 모든 신(神)은 족보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반드시 인간의 족보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추상화되어 보편적인 신으로 되어간 것이다. ( 유에메니즘[Euthemenism]: BC300년 전후에 활약한 신화작가 유에메로스의 주장. 모든 神의 계보는 역사적 영웅지배자.종족의 추장,전시의 혼령에서 비롯되었다. )


* 불교는 절대적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종교진화의 최종단계이다 - Edward conze


* 불교는 심리학이다 그심리학의 궁국은 滅執이다. - 도올


 

* 윤회(transmigration)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것을 계속반복한다. ( 범어(梵語) - samsara)

무아론(諸法無我)과 윤회사상(윤회의 주체로서의 我가 인정됨)은 조화되기 어려운 이론적 갈등이 있다.

* 인간이 살아있다함은 하늘적 氣와 땅적氣가 골고루 섞여있는 상태이다.  땅과 하늘氣가 천천히 없어지면 안락사이고, 교통사고 등으로 인하여 하늘氣는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땅氣가 없어지면 수(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혼) 가 된다.

땅적 氣가 없어지더라도 하늘적氣는 즉시 없어지지 않고 서서히 흩어진다.(4대 120년간 존속)

그동안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는다(4대봉사)
그러나 유교는 영혼의 영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양인의 세계관은 영혼의 독자적 영속성(identity)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神滅論이라고 부른다.

* 不遷位-4대를 넘어서 영원히 모시는 神位

* 제사는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혼령과의 화해이다.  이러한 의식은 동양사람들에게 깊은 역사의식을 심어준다.  나의 행위가 자손 만대로 영향을 준다. 내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집단적 해결)  그러니 도덕적으로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갑자기 죽으면 하늘氣는 땅氣가 사라지고 없어 당황하게 된다.  굿은 鎭魂이다.  즉 혼을 달램이다.

* 신주 뒤뜰사당에 모셔진 혼들은 family의 개념에 속한다.
* 埋祖(매조) : 사대봉사후에 신위를 땅에 묻는 제식. 이것은 魄이 아니라 魂을 묻는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귀신들로 인하여 그연속성이 보장된다.

* 희랍철학자 플라톤의 idea論 : idea는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고향이다. 영혼의 독자성(identity)를 인정한다.   희랍인의 영혼은 초시간적이다 그러나 동양인의 영혼은 시간 내적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동일하게 초시간적 구원을 추구한다.  유교는 시간내적 구원을 바랄 뿐이다.

불교는 산스크리스트어,팔라어를 기독교는 히브리어 희랍어를 기초로 하고있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인도 유러피안 어군의 주부-술부관계속에 매여있다.

* 윤회는 영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moksa)이라고 한다.
인도인의 열반(Nirvana) 희랍인의 idea 유대인의 천국(kingdom of heaven)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 김성철 씨
묘법연화경에 방편품 제2편에 의하면  불자의 신행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다.

              석가 왈 "여기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다 나가라" 
불자의 신행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보살행이다
윤회가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탈하려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유발된다.  
 

* 종교에 있어서 God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서구의 근대정신은 모두 무신론 atheism에 기초하고 있다 무신론을 유신론(theism)의 한형태이다.  기는 끊임없이 娶散한다.   기철학적 세계관은 영혼의 지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취산하는 한 고리일뿐이다.


 

* 동양인의 神은 歷史다.

* 마테오릿치(1552-1610)
italy출신의 제수이트 신부로서 중국에 30년을 살면서 동서문명의 
화풍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대표작 天主實義(1603)는 우리 나라 개화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 Rites controversy-전례논쟁
1628年 중국강소성 가정 종교회의에서 시작되어 1704년 크레멘트 2세의 칙령으로 마무리된 논쟁인데 4백년을 끌었다. 공자숭배,조상숭배를 금지

* The second vatican council(1962-85)
토착적 의례를 천주교의 전례를 할수 있다고 선언함

* 金昌淑(1879-1962)
경북성주 출신의 유학자 호는 心山 평생을 항일투쟁과 반독재투쟁에 헌신.   1946년 성균관대 설립 유학발전의 결정적계기마련. 

* 김수환추기경이 心山賞을 받는 겸허한자세(절까지 함)에서 오늘의 종교인들은 배워야 한다.

" 기독교정신은 하느님에 대한 효로부터의 下向이고, 유교정신은 인간에 대한 효로부터의 上向이다"

      - 김수환추기경     (끝)

여기까지가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강의는 종교에 대해 참으로 많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가 쓰고 있는 글 중에서 발췌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쓰고 있는 책에서는 경어체를 쓰지 않았으니 양해 바랍니다)

먼저 왜 기독교인들이 야훼신을 믿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신 관념이 어떻게 형성, 발전되는지를 알아 봅시다.


--------------------------------------------------------------------------------

▣ 신(神)관념의 발생과 발전과정


신(神)관념은 씨족신,부족신,지방신(민족신),세계신 등으로 발전하는데, 신(神)과 그 신을 모시는 씨족,부족,민족은 흥망성쇠를 같이한다.


신(神) 관념은 원시시대로부터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신 관념의 주류(主流)진화과정은 최고 원시적 신 관념인 씨족신으로부터 부족신, 지방신, 수신(首神), 국민적 유일신의 단계를 밟는 한편 마나(mana), 애니미즘(animism), 토템(totem) 등 방계(傍系)관념의 진화과정이 별도로 전개되면서 때때로 주류진화과정과의 사이에 혼선을 이루어 오게 되었던 것이다.

씨족신은 원시장로(原始長老)의 신격화로부터 비롯되며, 노인(老人) 부(父) 조부(祖父) 지도자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稱號)가 대부분이며, 처음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태를 가졌다가 점차로 인격화되는 경우가 많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각 촌락마다 각자의 씨족신이 있어서 최초에는 동물의 형태를 가졌다가 후대에 가서는 인격화하여 민간의 숭배대상이 되었으며, 고대 셈족에도 가나안人의 각 씨족에는 선조(先祖)이면서 군주(君主)의 의미를 지닌 씨족신 바알(Baal)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보편적 신이었고, 헤브라이人의 씨족신 여호와(Yahveh)나 페니시아人의 씨족신 틔리안·멜카트 그리고 모하메트 이전 아라비아人의 씨족신 알라(Allah)도 모두 선조이자 군주이며 각기 씨족사회의 지도자였다. 이외에 셈족의 여러 씨족신 에아(Ea) 벨(Bel) 마르두크(Marduk) 신(Sin) 샤마슈(Shamash) 이슈타아르(Ishtar) 나부(Nabu) 에슈문(Eshmoun) 등도 모두 씨족신이었다. 이러한 씨족신은 중앙오스트레일리아의 아룬타족,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 멜라네시아人, 시베리아의 골야크족, 동아메리카의 난디人, 남아프라카의 즐루人 등 전세계에 걸쳐 나타난다.

씨족신 시대에서 부족신(部族神) 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각 씨족신들 중에서 가장 힘쎈 씨족신이 그 칭호에 군주(君主)·창조자 (創造者)라는 의미를 첨가하여 더욱 발전하는 한편, 인지(認知)가 발달하고 생활양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각 씨족신, 동물신, 자연신의 세 가지 신관념이 분과화(分科化), 기능화(機能化)하게 되면서 인간생활이 미세한 부분까지 섭리를 행하게 되어 실로 신관념의 발달이 극도에 달하게 된다.

부족신 시대에서 분화발달의 극에 달하였던 신관념은 지방신(地方神)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리(整理)·간소화되기 시작된다.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그 예를 다 들 수 없고, 잘 알려져 있는 제우스(Zeus)신과 여호와신에 대해 알아 보자.

제우스도 최초에는 인격(人格)의 보통성질을 구비한 야만인의 추장(酋長)으로 나타났었다. 이것은 제우스도 그리이스인의 원시추장을 신격화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제우스는 그리이스 여러 지방의 주신(主神)이 되어 점차 다른 신들의 기능을 흡수하고 그 토지 또는 기능으로부터 유래한 여러 가지 칭호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여러 신들과 인간의 부(父)가 되었지만 아직 유일한 세계 창조자는 되지 못했었다. 제우스의 도덕적 성격이 서서히 상향 발전한 사실은 문서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호머(Homenos)의 시(詩)에 의하면 제우스는 아가메논의 지적, 도덕적 성질을 가장 많이 구비한 보편화한 아가메논이었다. 제우스가 어느 때에는 충동과 감성의 동물이었고 어느 때에는 사려있고 위엄있는 지배자였었다. 또 핀더나 BC 5세기의 비극에서는 세계정의와 질서의 대표자가 되고 후대에는 전세계의 선사(善事)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리이스인의 정치적 권위 관념을 표현하여 그리이스 신화 중에 나타난 일신교의 관념에 가장 근접한 신이 되었다.

한 신(神)으로서 질서적으로 진보하여 저명한 대신(大神)이 된 가장 명료한 예는 헤브라이의 여호와에게서 볼 수 있다. 이 신은 본래 아라비아 북경(北境)에 거주한 어느 부족의 신이었던 것을 헤브라이人이 채용한 것인데, 헤브라이인의 특수한 품성과 결부하여 발달하였다. 최초에 이 신은 도덕적으로나 지적(知的)으로나 조야(粗野)했었는데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윤리상으로 고상한 신이 되었고 또 만능의 신이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이 신은 다른 여러 민족의 신보다 우월하며 가장 강한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시대의 헤브라이人들은 자연숭배의 다신교도였으며, 헤브라이인이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하는 일신교를 믿는 것은 모세때 이후이다. 헤브라이 역사의 각 시대에 있어서 그 민족이 이 신에 대해 가졌던 관념은 각 시대의 경제적 내지 지적(知的) 특징과 결합된 것이었다.

봉건국가가 붕괴되고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신관념도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전국민에게 동일신의 숭배를 강요하고, 혹 어떤 국민에게는 원지방신(元地方神)들의 명칭만은 허용하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일신(一神)의 신하로 인정될 뿐이요 전국민의 숭배는 일신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국민적 유일신으로 발전한 예로는 헤브라인人의 여호와, 아라비아人의 알라, 그리이스人의 제우스, 로마人의 쥬피터, 바빌로니아人의 마르두크, 페니키아인의 몰로흐, 시든人의 아수라레트, 모압人의 케모슈, 페르시아人의 아후라마즈다 등의 신들이 있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세력이 팽창해짐에 따라 제국주의가 세계역사를 장식하게 되자 신관념도 또한 그 영향을 받아서 국민적 유일신은 자국민(自國民)의 숭배에만 만족하던 종래의 태도를 일변하여 피정복국가의 신들을 배격, 정복, 말살하고 그 국민들의 숭배를 강요하며 또 종교의 홍보 방식에 의하여 다른 국민에까지 침투하여 세계적 유일신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전인류에 군림하려는 시도를 강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에서 큰 성과를 거둔 신이 여호와신과 알라신이다. 여호와는 오늘날 전인류의 약3할을 포섭하였고 알라는 약1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현대는 유일신들이 세계적 지위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결전장인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다음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도올논어 강의에서 말한 내용이다.

" 유일신(唯一神)으로서의 신(神)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일치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이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유대민족에게도 다윗왕조 이래로 일신론이 굳어진다. 중국에서도 진시왕때에 와야 상제 등과 같은 통일된 신의 개념이 생긴다. 그 전은 모두 다신론(多神論)이고 이 다신론(多神論)의 모체는 조상숭배이다. 모든 신은 족보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반드시 인간의 족보가 있으며, 역사적 영웅, 지배자, 종족의 추장, 전사의 혼령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추상화되어 보편적인 신으로 되어간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를 더 들어 보자.

"태초에는 하느님(여호와)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 센 하느님, 어떤 동네의 종족신(種族神)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6세기, 유태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귀양살이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한다.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쇄신하는 길뿐이다. 구약시대 세계는 근동(近東)을 중심으로 겨우 몇 백 마일 크기의 3층짜리 케이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즈텍문화라는 게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는 중국이 있는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세계가 바뀜에 따라 종교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성인들도 동초서초(東抄西抄), 이것은 여기에서 꾸어오고, 저것은 저기에서 꾸어오고 해서 소프트웨어를 꾸미는데 이것을 종교의 발전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도 그걸 읽을 수 있다." (죠셉 캠벨 <신화의 힘>에서)

"히브리인의 하느님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라는 부족신(部族神)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다곤이나 모하브 민족의 체모스와 같은 부족신과 싸우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6∼8세기에 나타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1세, 예레미아, 이사야 2세와 같은 예언자들은 야훼는 히브리인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이며 모든 역사와 인류의 심판자라고 끈질기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후 하느님은 신앙의 가족에 속하는 동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이나 집단을 돌봐주는 하느님이 되었다." (존 힉스<종교철학 개론>중에서)

이제 신 관념에 대해 윤곽이 뚜렷이 잡힐 것이다.

   태초로부터 인류는 높은 산과 강, 바다 등의 지형으로 분리된 전세계의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각기 그들 고유의 신(神) 개념을 갖고 살았다. 중동의 여호와신과 알라신, 이집트의 오시리스,호르스,이시스,라아 등의 신, 앗시리아 제국의 야스르신, 수메르의 아누신,엔릴신,엔키신,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신,에아신,아누신, 셈민족의 바알신, 바빌로니아의 마루두크신,아쉬타르신,엔릴신, 그리스의 제우스신,데메테르신,아프로디테신,아폴로신,포세이돈신,아르테미스신, 이탈리아의 주피터신,비너스신,마르스신,베스타신,야누스신,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 신, 인도의 파라브라마, 중국의 반고, 일본의 천조대신, 한국의 환인,환웅,단군 등 그 민족의 근간을 형성하기까지 숱한 신들이 있었으며, 전쟁에 의하여 타민족이나 부족에게 지배받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하느님들은 그 민족에게는 절대 유일신, 또는 다신적(多神的) 존재, 혹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 그 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힘센 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약한 민족에 의해 창조되었던 신의 이름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힘센 민족이 만들어낸 신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神)과 그 신을 모시는 씨족, 부족, 민족은 흥망성쇠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여호와신이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하느님 신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와 더불어 여호와신이 득세하면서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은 하느님하면 기독교의 하나님밖에 없는 줄 알고 있는 실정이다.


여호와는 바이블에 숱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일뿐이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유대인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구약을 보라. 타민족과의 전쟁에서도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유대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여호와신이 유대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유대교는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도를 하지 않는 희한한 종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약은 일개 유대민족의 역사서요, 유대교의 경전일 뿐이지, 타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서이다. 온갖 대량 살육과 근친상간, 불륜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기록을 어찌 성스러운 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대학 철학과의 중국철학교수로 있는 아리엘 교수에 의하면 오늘날 랍비정통의 유대교에 있어서 제일의적인 것은 『탈무드』이지『구약』이 아니다. 『탈무드』야말로 유대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탈무드』야말로 그들의 구체적 역사와 생활의 원형이다. 그에 의하면 『구약』은 하나의 역사서이며, 중국의 『二十五史』나 한국의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이상의 권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역설한다. 그가 모든 유대인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경전에 대해 매우 비성서적(우리가 보통 쓰는 의미에서의 성서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실체와 유리된 허구의식 속에서 그것은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중에서)

유대인들은 오히려 여호와신를 섬기는 다른 민족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가?

▣ 시간 밖에서 해결하는 방법과 시간 밖에서 해결하는 방법

우리는 여기서 서양의 직선사관(창조-타락-종말)과 동양의 순환사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  직선으로 인간세의 역사를 파악할 때에는 대부분 종말을 향한 어떤 가치관의 직선체계가 성립하게 마련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세는 좋아진다든가, 문명은 진보한다든가, 더 살기좋은 세상이 된다든가, 자유를 향유하는 계급이 더 많아진다든가, 자유의 의식의 점차적 증대가 이루어져서 좋다든가 하는 등등의 생각이 이루어진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사관은 이러한 기독교의 묵시록적 직선사관의 대표적인 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선사관의 병폐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서(시간 밖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직선으로 그 무엇을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은 반드시 그 역사의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가 역사 밖에 있게 마련이다. 그 역사 밖에 주체가 있어야 그 목표가 설정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그 목표에 의하여 일사분란하게 지배되고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밖에 있는 역사의 주체는 더 말한 나위없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God)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직선사관의 병폐는 역사 밖에 있는 역사의 허구적 목표를 향해 역사의 현실을 연역적으로 획일화시키며 너무 일률적으로 가치판단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무서운 독단에 의해 역사의 현실적 다양성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만들어가고자 했던 사회모순의 배경에는 분명 그러한 직선사관의 오류가 숨어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순환은 역사가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기독교문명 속에서 먹고 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체험이 본질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순환과 반복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일차적으로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중용』의 말을 빌리면 "시중(時中)"일 뿐이며 순환 그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반복적인 것일 뿐이다. 순환의 역사는 중용의 역사며 중용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자내의 밸런스에서 구하는 역사다. 직선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두지만 순환의 역사는 역사의 목표를 역사 안에 둔다. 역사의 목표란 현실적 인간에게 삶의 기준이 되는 이상(Idea)을 말하는 것인데, 이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영원한 이상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반드시 우리의 삶의 밖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죽어서 천당을 간다고 하는 생각은 나의 이상이 분명 나의 삶의 밖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확인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 있을 동안 나의 몸의 Input(밥)와 Output(똥)의 발란스를 취하여 완벽한 건강을 이룩한다는 것도 매우 일상적인 것 같지만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이상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것이다.

순환적 역사에 있어서는 역사의 목표가 상황적이며 자내적(自內的)이며 역사자체의 함수에 따라 역동적이다. 그리고 묵시론적 종말을 향해 모든 가치관을 일률적으로 휘몰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현실을 포섭한다." (김용옥<삼국통일과 한국통일[상]>중에서)

" 돌아감이 없는 직선적 발전은 파괴일 뿐이요, 절망일 뿐이요, 단절일 뿐이요, 종료일 뿐이다. 그것이 헤겔의 오류요, 맑스의 오류요, 기독교 묵시론의 오류요, 사막문명권 사람들의 절망감의 오류인 것이다. 돌아감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창조다. 돌아감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다. 이 돌아감의 창조를 헤겔사관에 빠진 자들은 정체(Stagnation)와 미개와 암흑으로 오인한 것이다. 발전을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미개한 자들이요, 암흑구덩이를 헤매는 자들이요, 유토피아의 신기루에 떠도는 가련한 유령들이다.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개명(明)하다, 밝다(明)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모르는 자들이 역사와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흉칙한 짓을 망령되이 일삼는 것이다." (김용옥 <노자와 21세기[중]>중에서)


우리가 만일 앞을 향하여 계속 걸어간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은 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의 밖에서 바라보면 그 사람은 거대한 원의 궤적을 따라서 돌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직선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지니는 한계로 인한 근시안적인 착각이며, 우주만유는 초미시세계로부터 초거대세계에 이르기까지 순환으로 존재한다. 역사(歷史) 또한 통일과 분열의 연속이며, 순환이다. 새로운 왕조 또는 국가의 탄생기,통일기(統一期)(봄)-성장기(여름)-절정기(가을)-분열기,쇠퇴기(겨울)를 거쳐 또 새로운 왕조,국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관이든, 역사관이든 직선적으로 인식하기가 쉽다. 그러나 거대한 원(圓)의 극히 일부분을 잘라 보면 직선으로 보이는 것처럼 직선사관은 단견(短見)이며, 지극히 근시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 생각해 볼 문제들 ]

▣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하는데 찬성하십니까?  불교를 신앙하는 분들 계시면 이에 대해 게시판에 생각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윤회론과 無我論은 상호모순되는 것일까요? 

참고로 라즈니쉬의 견해를 인용하겠습니다. 

《 붓다는 결코 신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H.G웰스는 붓다에 관해 말했다.  "그는 가장 신적이다. 또한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非神的인 사람이다."  그렇다 바로 그렇다. 그는 가장 신적이면서 가장 비신적인 사람이다.  그대는 붓다보다 더 신적인 사람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존재도 그 앞에서는 그저 무색해질 뿐이다.  그의 광휘는 그토록 찬란해서 그의 존재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신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가 신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무신론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신을 말하지 않은 것은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난센스이다.  그대가 신에 관해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현자들도 신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신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붓다는 참으로 이성적이어서 이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신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조차 부정적인 방법으로 그를 규정짓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 역시 말이다."  그는 철저하게 논리적이다.  그는 신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붓다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신에 관해 말한 적은 결코 없다.  내가 그를 특별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에게로 이끈다.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신에게로 데려갔다. 그의 현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신 뿐만 아니라 영혼, 진아에 대해서조차도 그는 이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말한다.

"나는 그대에게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그대가 들어가서 보라."

그는 말한다.

"붓다는 길을 가르칠 뿐이다.  붓다는 그대에게 철학을 주지 않는다. 그대가 거기 있다. 들어가서 보라."》[<42장경> p24~25, 라즈니쉬 저, 황광우 이경옥 역, 성하출판]

▣  불교의 윤회론에 의하면 해탈하지 못하는 한, 영혼이 영원히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윤회한다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영혼이 4대(120년)가 지나면 흩어져 사라진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그리고 그 영혼이 독자성(identity)을 유지할까요?  못할까요?   저는 도올 선생을 존경하지만 그의 기철학적 입장  즉, 영혼이 독자성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는 부분은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적어도 동양의 수행 세계나 무속의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해 본 사람 중에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가령 <말썽꾼 귀신도 내 말은 듣지요>를 쓴 성안스님이 쫓아내는 귀신들도 이승에서 살다가 죽은 혼령들입니다.  그들은 그 자신이 살아 생전에 가지고 있던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제사는 단순히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혼령과의 화해일까요?   

▣ 기독교는 윤회를 부정할까요?(도올강의 내용과는 무관)   기독교에서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진리가 왜곡되면서 윤회에 관련된 성경구절이 모두 삭제되기 전에는 윤회를 인정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윤회를 증명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은 많이 살아남아 있습니다.(둘로스데우 著<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참조)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윤회와 전생을 믿습니다.  기독교도 이신칭의 같은 유치한 교리에서 벗어나 과거의 윤회사상을 다시 되살려야만 보다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올의 기독교비판 - 노자와 21세기 종강

21세기와 노자 마지막 강연 때 낭독하였던 글 중 기독교에 대한 메시지

"우리 민족은 내가 허약하다고 느꼈을 때 과감하게 타를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조선왕조 말기에 이미 남인(南人)들은 조선조 성리학이 공리공론에 빠져 민생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을 개탄하고 새로운 과학문명의 젖줄이요, 근세적 인간구원의 활기였던 기독교를 과감하게 독자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남인들이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흡수한 과정은 이 지구상 가톨릭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자외적(自外的)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내적(自內的)으로 기독교를 흡수한 유일한 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환인.환웅.단군의 홍익인간의 드넓은 마음으로 인간세의 보편주의를 실천하여 근세적 민주의 대세에 참여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보편주의를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일제의 학정에 항거하였으며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과학적 사유를 익히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우리는 과학(science)과 민주(democracy)를 수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리 요, 기쁜 소식 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소리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소리가 되고, 기쁜 소식이 슬픈 소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행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잘못 형성된 유대민족 특유의 선민의식이 조선기독인들의 독선과 아집과 배타와 전도주의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사랑의 보편주의와 홍익인간의 초민족(超民族)적 구원을 외친 예수와 사도바울의 복음의 메시지를 위배하는 비기독교적 이단행위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교만치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구한말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천막속에 모인 조선인들에게는 면사포를 거두고 남.여.노.소가 같이 얼굴을 마주대고, 한곳에 앉아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그들의 삶을 불사르고도 남을 감격이며 구원이었습니다.

이러한 감격과 구원의 모습이 어느샌가 사라져버리고 이제 한국의 교회는 독선과 아집과 권력과 탐욕과 권세와 권능의 자부감속에 안주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대인의 우환과 심려를 폭력으로 묵살하려하며, 정당한 비판과 지적을 비난과 사기로 엄폐하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이라는 나의 신학적 테제를 정당화하는 비졸(鄙拙 : 비속하고 치졸함)한 짓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도올-기독교[인터넷 한겨레]


도올-기독교

얼마전 큰 문제가 되었던 KBS 방송의 도올논어. 10월 13일 제1강 도올 김용옥의 공자와의 만남으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도올은 개독교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개독교인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역자 주- 개독교=기독교(개신교+천주교 등)등도중에 특히 개신교도임을 강조하는 말)

우선,첫번째로 개독교가 도올 김용옥을 협박하여 입을 틀어막은 사건!

이번 사건이 단순히 김용옥 대 개독교 일개 사건이 아니라,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유는 개독교의 행태 및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개독교의 타 사상 및 비기독교인에 대한 위해, 협박, 위협, 반대운동, 실력행사, 무분별한 전도행각, 배타적 광기는 이제 위험 수위를 넘어서 타 사회구성원에게 막대한 심적, 물적 피해를 끼치고 국론분열을 일으켜 크나큰 사회악을 만들고 있는 수위에 이르렀다.

개독교는 그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계속해서 물의를 빚어왔고 불상 목자르기 사건, 진화론 배척사건, 단군상 파괴사건, 도깨비팬티 판매 중지 협박사건, 이수역 명칭 반대 위협사건 등으로 계속해서 비기독교 타 사회 구성원에게 협박과 위협, 공격으로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왔다.

이들의 행태는 정말로 이제는 가만 놔둘 수준을 넘어섰다. 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중세의 신권주의 종교독재자들을 보는 것 같다. 개독교는 이제 자신들과 반대되는 것에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반대, 협박, 위협을 가해대며 물리적, 법적, 심적으로 결국 자신들의 뜻을 관철해내고 있다.

이것은 사회 내에서 많은 수를 이용한 특정 종교계층의 일종의 양적 팽창이자 제국주의적인 패권장악 시도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국조 단군을 도끼로 부숴버리고 한마디 사과도 안하며 오히려 신문지상에 대고 "단군은 미친XX다, 우리는 계속 단군을 없앨 것이다"라고 떠들어대고, 단군상 건립주체에 대해서 온갖 협박과 위협을 가해대는가 하면 부패와 부정을 고발한 MBC 등 방송사에는 각목을 들고 몰려가 건물을 에워싸 폭력적으로 협박하고 이제는 한 철학자가 떳떳하게 학문적으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려는 것을, 자신들의 종교 교리를 조금 비판한다는 이유로 단체로 일어나 협박, 위협하며 입막음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범죄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고, 많은 숫자의 세력을 이용한 사회적인 위해, 협박, 범죄행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는 최근 스포츠투데이 사건, 교회 세습사건 등 양적 물적 팽창으로 온갖 비리와 부패에 휩쓸리고 있는 기독교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대로 개독교의 독단과 독주를 용납하면 결국에는 개독교가 한국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누구도 개독교를 비판하지 못할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개독교에 대해서 한마디 비판적인 말도 못할 그런 파쇼적인 시대가 올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시대는 왔다. 이 시대의 대표적 철학자 도올 김용옥씨(이하; 도올)가 기독교의 공갈 협박으로 입막음을 당했다. 세상에 학문적으로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도 못한단 말인가? 그 어떤 학자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어떤 비판논문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정말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도올이 개독교의 협박에 무릎 끓은 일은, 우리들도 언제든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철학자 도올김용옥까지 협박을 당한 마당에, 이제 그 누구도 기독교를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선 국조 단군까지 업신여기고 대표적 철학자의 입까지 틀어막을 정도로 오만방자와 독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개독교에 대항하여 3200만 비기독인과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모두 일어나야 한다. 이제는 안티개독교 운동을 벌일 때이다.

도올은 1982년에 고대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당시부터 초지일관 개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학생들은 이것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애증이라고 오히려 사랑이라고 느꼈다. 거의 20여년 동안 수많은 비판을 개독교에 대해 가했지만, 이번같이 이슈화되지 않았다.

이번 KBS에서 도올이 늘 지난날처럼 강력하게 되받아 칠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은유적으로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는 "도올이 많이 약해 졌구나!"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동안의 기독교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개독교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왜 과민반응을 하는가?" 단군상 비판등은 어제오늘의 이야기 아니다. 왜 요즘 부쩍 사회에 이슈화시키는가?, 그것은 도올이 말했듯이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 비해 너무 많이 변해서가 아닐까?

기독교는 물론 다른 종교집단도 마찬가지지만 자기들 내부가 정말 청렴하고 자신있다면,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할 것이다. 모든 종교집단들이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문제시 할 때는 자기들 내부문제가 심각하다고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독교 신자여러분 도올이 당신들에 대한 비판을 할 때가 그래도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도올같은 철학자가 아무런 말이 없는 그 날,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의 의의가 없지 않을까? 
인터넷 한계레에서 퍼온글입니다.

 

 

도올과 역사적 예수 연구

아래에 소개한 사이트는 미국 pbs 방송국의 사이트입니다. 
미국의 pbs 란 Public Broadcasting Station 의 약자로서 완전히 독립적인 방송입니다. 선전은 전혀 하지 않으며 오직 국민의 기금으로만 움직이는 방송국이 PBS 입니다.

이 PBS 에서 방영한 방송이 바로 From Jesus to Christ 라는 제목의 3 시간 짜리던가요 ? 그런 시리즈 물이었고 이 방송은 미국 전역으로 PBS 를 타고 방송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획기적인 것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예수가 목수라는 이야기도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송은 미국에서만 방영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본에서도 1999 년에 방영되었습니다. 단 일본에서는 NHK 같은 곳에서 방영한 것이 아니라, 케이블 방송인 Discovery Channel 에서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내용이 미국이나 일본처럼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

만일 위의 방송이 가능하다면 우리나라는 아직 괜찮은 나라입니다.

도올은 이러한 상황의 미국이나 일본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관해 도올이 강의중에 언급했다는 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많이 안다는 뜻이겠지만, 초기 도올의 강의에서는 그러한 도올이 알고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방영했다면 아마 큰일이 났을지 모르지요.

보다 자세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사이트는

http://www.xtalk.org

입니다. 이 곳에 가시면 세계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모든 자료실들이 링크 되어 있습니다.

가서 한번 살펴 보세요. 
도올도 그러한 연구결과를 알고 있음이 틀림 없다고 보입니다만...


도올의 비판 - 하늘나라는 장소가 아니다. (번역의 잘못)


▷ "하늘 나라"는 장소일까? 아니면 사건일까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번역은 아주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의 이론과 실제」의 저자 나이다(Nida)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는 "장소"라는 의미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표현은 너무도 자주 사람들에게 오해되어 왔다.

 나라(kingdom)가 명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 반성 없이 그것은 대상을 지시해야만 한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상 그것의 제일차적인 지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the rule of God)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문제는 하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구문에 오면 더욱

첨예화된다. 이 경우는 "하늘"이 "하나님"의 대용어(代用語,substitute)로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한 유대인들의 금기적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하늘"은 보통 일종의

장소술어(place term)로 간주된다. 이 결과 나타나는 경향은 이 구를 "하늘에 있는 나라"

(the kingdom which is in heaven)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이것은 명백히 착오적인

것이다."


그리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여기에 역주(譯註)를 달았는데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나이다가 말하고 있는 문제는 번역의 문제 혹은 해석의 문제가 신앙의 근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신학적 문제를 본질적으로 제기한다는 좋은 실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이다의 발언의

입장은 현금 우리 나라의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광분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도들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 나라의 부흥적 성격을 가지는 대부분의 교회는

묵시사상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이러한 묵시운동(apocalyptic movement)은

지속적인 것이며, 그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여호와의 증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티켓이 이제 거의 다 팔렸다고 주장한다.

몇 자리 안 남았으니 빨리 사라는 것이다. 만원사례가 육박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완전히 하늘에 붕 떠 있는 나라이며,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부흥목사가 돈벌어 먹는 것도 이 마지막 티켓을 남발하여 팔아먹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천국이 그 따위 곳이라면 람보를 보러 극장에 암표를 사서 들어가듯이 암표라도 사서 들어가겠다.

 만원사례 걱정없다! 하늘나라는 대상, 즉 장소가 아니라 행위이며 사건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화적 은유(mythical metaphor)이다.

이 세계를 버리고 하늘에 붕 떠있는 나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지말고 이 세계에서 나라를 행위하라!

무지한 동포들이여~.


[ 김용옥 <도올 논문집> 「번역의 이론과 실제」 p257~259, 통나무, 1991 ] "


도올의 비판-"방언은 도둑놈의 발광일 뿐"


"우리나라 교회에는 혓바닥의 괴상한 진동에서 생기는 요상한 공기의 떨림을 "방언"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신령한 것이라 하여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하고, 돈을 갈취해 먹는 파렴치한 도둑놈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일상언어 체계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어떠한 음성적 진동도 방언으로 간주될 수 없다. 사도행전 2장에서 이야기하듯, "방언"이란 "외국

어"나"지방말"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여러나라에 전파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이 무교육자들에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권능을 준 사건을 말하며 나는 지중해 연안처럼 제각기 다른 언어가 교차되고

있었던 특수 상황을 생각할 때 가능할 수도 있었던 어떠한 사건을 "오순절 교회"의 사건으로

성서의 기자는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한글개역판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텅(tongue)"을


모두 "방언"으로 번역한데 반하여

공동번역판은 그것을 문맥에 따라 "외국어" "자기네 지방말""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자기네 말"로

바꾸고 "방언"이란 말을 아예 없애 버렸다.  탁월한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언"은 문자 그대로

"사투리"이며, 한글개역판의 번역자들도 요새 교회에서 쓰는 의미의 "방언"이 아니라 "사투리"란 의미로

즉 "지방말(local language)"이란 뜻으로 "방언"을 썼던 것이다. 요새 성령파 교회나 기도원에서

울려나오는 "방언"은 백치 아다다의 말도 못되는, 사투리도 아니고 지방말도 아닌 도둑놈의 발광이다.


[ 김용옥 <도올 논문집> 「번역의 이론과 실제」 p233, 통나무, 1991 ]


도올의 비판-연역적 대전제의 무비판적 수용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일상적 경험, 그러한 귀납적 사실들은 차분하게 관찰하기에 앞서, 아주 매우 성급하게 우주 전체를 꿰뚫어 버리는 원리나 이념적 전제를 확보하려는 갈망이 있다. 역사적으로 칼맑스의 『자본론』이라는 텍스트를 차분히 강독하기에 앞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연역적 구조를 단숨에 파악하기 위하여 "의식화" 운동에 가담하고,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의 허실을 형량하기도 전에, 어떤 공산주의라는 연역적 구조가 두뇌에 자리잡기만 하면 그것을 위하여 용감히 목숨을 바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의 기독교도들도 성서신학의 세밀한 갈래들을 조목조목 따져 공부하거나, 모든 기독교신앙의 확실한 근거가 되는 기독교『성서』의 희랍어 원전 텍스트 그 자체로서 연역적 전제가 없이 攻讀하는 자는 희소하고, 우선 기독교라는 이념체의 몇 가지 연역적 전제들, 부활이라든가 천당구원이라든가 하는 논리구조를 확실히 파악하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갈망이 성취됐다고 자인하면 그 후는 불문하고 그 연역적 대전제에 따라 모든 행동양식을 주저없이 결정한다. 대부분의 광신의 성향이 이런 의심할 바 없는 몇 개의 연역적 전제의 확신에 대한 갈망에서 생기는 병증들이다. 그것은 논리라기보다는 감정의 맹목적 성향들일 것이다. [문창옥著,김용옥序<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序文, p11~12, 통나무 ]


--------------------------------------------------------------------------------

위에서 도올이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이블의 진실>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으니 아래의 내용을 읽어보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http://xbible.glad.to/6-20.htm

 

 

▣ 기독교의 논리

▷ 삼단논법

1) Bible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진리의 말씀이다.(대전제)

2) Bible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3)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이다.

기독교의 삼단논법은 위와 같다. 1)을 긍정하고 받아 들이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가 되어 버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맨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신학자들이나 일부 양심적인 성직자들은 Bible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필자는 그것을 증명하는 많은 내용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도 성직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가르치고 있으며, 순진한 신도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직자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성서가 편찬된 과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을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은 거짓과 기만에 바탕을 둔 믿음인 것이다.

▷ 순환오류 - 성경으로 성경을 증명하는 기독교인들

질문자 : 넌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기독교인 : 그럼, 당연하지.

질문자 :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네가 하나님을 보기라도 했니?

기독교인 :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건 성경이 증명하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이니까.

질문자 :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인지 어떻게 알아?

기독교인 :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을 보면 말야, 성경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질문자 :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쓰여진 그 말이 신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인지는 어떻게 알지?

기독교인 : 성경에 쓰여진 말은 모두 신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이라구. 그러니까 믿어야지.

질문자 :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냐구?

기독교인 : 넌 정말 의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그렇게 덮어놓고 의심만 하지 말고 기도부터 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믿음을 주실 꺼야.

위의 대화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인과의 대화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의 한 구절로 성경 전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글 내용의 증명을 그 글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순환논리(논리의 오류)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어떤 책이라도 신의 계시를 받은 책으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성경이 수 없이 많은 수정과 편집으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참으로 우매한 믿음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http://xbible.glad.to


지난해 5월 KBS 강좌 ’도올의 논어 이야기’를 돌연 중단하고 해외로 떠나 궁금증을 자아냈던 도올 김용옥(金容沃.전 고려대 교수)씨는 10일 “KBS 강좌를 그만뒀던 것은 목이 아팠기 때문”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후 참여불교 재가연대 주최로 동국대 본관 중강당에서 열린 ’불교의 본래 모습-달라이 라마를 만난 후’라는 제목의 초청강연에서 이같이 밝히고 “지금도 인후염으로 인해 잘 아는 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난 그를 보기 위해 커다란 강당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 앞에 특유의 흰색 도포 차림으로 나타난 김씨는 KBS 강좌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함께 그간 뉴욕과 인도, 티베트 등지를 오가며 연구한 초기 불교의 본질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방송을 그만둔 뒤 인도로 갔던 것은 붓다가 되기 전 청년 싯달타의 행적과 정신적 발전과정에 대한 개인적 관심 때문이었다”면서 “그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 불교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고 소개했다.

그가 이날 강연에서 소개한 내용 중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는 부분.

김씨는 ’불교가 무엇이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불교는 무신론이며 과학’이라는 답변 내용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선불교의 잘못된 전통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가 잘못 전달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붓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란 뜻”이라며 “’연기’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해탈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신비화된 개념이 아니라 철저한 과학적 통찰”이라고 역설했다.

김씨는 이날 특유의 열정적인 제스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 각종 학문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강당에 모인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한국 기독교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통찰은 김용옥 특유의 직설적 어법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김씨는 “근대화 과정에서 유입된 기독교가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많은 긍정적 역할을, 특히 교육분야에서 했으나,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는 바로 우리 사회를 광신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가 만들어놓은 이같은 광신주의는 정치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돼 이를테면 지역감정과 같은 맹목적 광신주의를 낳았다고 꼬집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월드컵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민족적 역량을 깨달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한국사회를 이끌었던 기독교를 대신해 초기 불교의 합리적.과학적 전통이 중심이 되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결론을 내렸다.

한편 이날 강연이 열린 동국대에는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연 1시간 전에 이미 1천여석에 이르는 본관 중강당이 다 차서 일부는 강단 주변 또는 계단에 앉거나 서서 강의를 듣는 등 김씨의 대중적인 인기와 유명세를 반영했다.


) 그렇게 나의 몸을 단련해 가던 중, 어느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치 않게 떠오른 영감에 의하여 몇가지 품새를 만들게 되었다. 이 품새들은 순전히 나의 건강유지를 위하여 내 몸에 맞게 고안된 것이며 전혀 작위적 목적이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나는 이 순전한 나의 독창적품새를 나의 기철학 체계와 관련지어 "천지기술"이라고 불렀다. ... 많은 사람들이나를 내 나이에 비해서 ... 너무도 젊게 보인다고 말한다. 사실 나의 건강을 유지한느 비법은 모두 이 나자신의 묘법인 "천지기술"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천지우주와 인간의 몸에 대한 근원적통찰이 나의 일상적 동작의 체험을 통하여 획득한 것이며 몇가지 품새로 압축되어 있다. ...

2) 나는 정말 이 복더위에 낮에는 서향방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카미카제 문장군(모기)에 들볶이면서까지 이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주제의 책을 쓰게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다. 그런데 붓을 대다보니 나역시 생각이 못미쳤던 거대한 문명사의 논리들이 나의 사고의 공간에 정신없이 날라들었고 그것을 다 카트해 내버릴려고 하니까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사명감이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 오- 주여! 그대는 왜 나에게 지혜를 주셨나이까?

3) 나의 기철학은 한국사회에서 근원적 개혁을 갈망하는 수없는 젊은 이들에게 인식의 전환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4) 나 도올은 기발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 도올은 상식을 말할 뿐이다. 후학들이여! 나의 폼과 멋을 배우지 말라! 그것은 이 역사가 나에게 부과한 사명이요 불행일지니, 오로지 나의 실력만을 배우라! 도대체 이 땅에 누가 나만큼 정확하게 한문을 읽을 수 있으며, 도대체 이 땅의 누가 나만큼 각방면에 정통적 학문의 소양을 축적해 왔는가?

5) 남들은 열흘동안에 이러한 대작을 쓸 수 있다면 왜 안쓸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서 황금같은 방학의 시간에서 열흘을 통채로 뽑아낸다는 것은 좀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6) 나 도올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개념적 조작에 의한 지식의 세계에 있어서는 거의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의 경지를 맛본 달인이다. ... 그러나 문제는 그 양자의 가치서열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바드 박사 중에도 권력에 아부하고 나라를 망쳐먹고 인간적으로 말짜인 개새끼들이 얼마든지 있듯이 그러한 몸의 공부의 달인이라 할지라도 그 달인적 행위의 과정이 그 인간의 인간됨을 위대하게 만드는 어떤 느낌을 제공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용옥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에서

'역사와미스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형작약탄 만화  (0) 2015.06.18
조선 500년 역사에 대해서  (0) 2014.06.13
영국 노동당에 대해서  (0) 2014.03.12
이성계와 사병들의전투력  (1) 2014.02.02
이공계 거물들의 흔한단체사진  (0) 2014.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