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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영국 노동당에 대해서

by 501™ 2014. 3. 12.
우리가 흔히 외국 정치현황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나라는 역시 미국과 독일이겠죠. 

하지만, 영국 정치계도 알고 보면 상당히 재밌습니다. 

영국은 큰 규모의 두 정당이 정권을 놓고 늘 혈투를 벌입니다. 바로 보수당과 노동당이 그 주인공들이죠.


보수당과 노동당의 첫 대결은 2차 대전 막바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칭송받는 역대급 총리 2명)

이 당시 처칠은 자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민영웅이니, 당연히 질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그는 당시 안정적인 인기를 구축하던 클레멘트 애틀리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처칠이 구상했던 비대위 내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국내 문제를 주로 다뤘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내치를 안정적으로 해결하며 자신이 이끄는 노동당과 자기 자신의 지지도를 높여나갈 수 있었습니다.

총리로 취임한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민생 문제들을 별 탈 없이 해결하며 지지도를 높여나갔고, 종전 이후 막막해보였던,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문제들을 별 탈 없이 다 해결하는, 그야말로 내정의 제왕 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노동당 내각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고,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아뉴린 비반과 해럴드 윌슨 등이 동반 사퇴하는 등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애틀리도 이를 컨트롤 하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다시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줬고, 처칠은 국무총리 직에 복귀하게 되죠. 

(영국 국민들은 처칠보다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내정에 뛰어난 리더를 윈했고, 애틀리는 그 기대치에 120% 부합했다)

애틀리는 물러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애틀리가 처칠보다 뛰어난 리더였다는 의견이 많을 정도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리더 덕에 노동당은 보수당에 다음 가는 제 1야당으로써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힙니다. 

애틀리가 물러난 뒤, 노동당은 재집권하는데 무려 13년이 걸립니다. 정권을 다시 되찾아왔던 인물은 다름 아닌 애틀리 내각에서 근무했던 헤럴드 윌슨이였고, 그는 임기 초반부터 북아일랜드 문제라는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게 됩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그저 그랬습니다. 덕분에 1970년 들어 총선에서 보수당에 패했고, 4년간 야당 총수로 다시 활동합니다. 그러다, 1974년에 다시 승리, 총리 자리에 복귀합니다. 

(과학혁명시대의 새로운 사회주의를 외쳤던 윌슨 전 국무총리)

윌슨 총리의 경우 진보적인 정책으로 꽤나 많은 호평을 받았는데요. 동성애, 이민, 낙태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실패의 실패를 거듭했다는게 그의 흠이죠. 1976년, 그는 당수 자리를 제임스 칼레한에게 물려주고 다우닝 가를 떠납니다. 

후임 제임스 칼레한은 산업 국유화를 통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고, 그와 함께 폭망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선거에서 보수당에게 압도적으로 완패하며 총리직에서 쫓겨났고, 다음 해에는 당수직을 버리고 정계에서 은퇴합니다. (안습) 그렇게... 마가렛 대처의 시대가 시작이 되었고, 노동당은 20년 가까이 손가락만 빨게 됩니다.

마가렛 대처는 11년간 집권하며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고, 그 후임 존 메이저 역시 7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존 메이저는 마가렛 대처와 같은 스타성을 지닌 정치인이 아니였고, 이미 92년부터 당내외적으로 모든 인기를 잃은 상태에 있던 식물 총리에 불과했습니다. 1997년, 혜성과도 같이 떠오는 노동당 소속의 정치인 2명은, 이런 존 메이저를 짓눌러 버립니다.


1997년, 노동당은 400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으로 정권을 되찾아 오는데 성공합니다. 그 중심에는, 노동당의 젊은 당수 토니 블레어가 있었습니다. 옥스퍼드를 졸업했던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 토니 블레어는 "제 3의 길"을 주창하며 대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데 성공했으며, 그의 뛰어난 스타성은 보수당의 고정 지지층을 잠재우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블레어의 뒷배경에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든 브라운이였는데요. 고든 브라운은 본래 노동당의 차기 당수로 유력했던 인물이였습니다. 94년,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대세는 고든 브라운 쪽으로 기울었지만, 고든 브라운은 토니 블레어를 돕기로 결심했고 당권은 자연스레 토니 블레어에게 넘어갑니다. 이 당시 브라운은 블레어에게 차기 당권을 양도받기로 약속을 했지만, 블레어는 이 약속을 더럽게 안 지키다가 막판이 되서야 지킵니다. 

(노동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사람)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두 사람은 참 다르면서도 내각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최고의 정치 파트너였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잉글랜드 태생의 옥스퍼드 졸업생, 거기에 법률가 출신이었고, 고든 브라운은 스코틀랜드 태생의 에든버러대학교 출신이였습니다. 거기에 고든 브라운은 STV라는 스코틀랜드 최고 규모 방송국의 PD 출신이였기 때문에, 블레어와는 일치하는 점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각각 총리와 재무상으로써 최고의 호흡을 선보였습니다.

블레어는 기본적으로 "제 3의 길"이라는 스탠스를 주창하며 대중들에게 표를 얻어냈고, 총리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1년까지는 압도적으로 보수당에 비해 우위에 있는 지지율을 자랑했고, 덕분에 별 탈 없이 연임될 수 있었지만, 갈수록 떨어지는 지지율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때문에, 20명이 넘는 스핀 닥터들을 기용했고, 그 중 엘라스티어 캠벨은 블레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무리수까지 둡니다.

2005년, 총선에서 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브라운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지지를 호소했고, 블레어는 싫어도 브라운만은 믿을만하다 라는 심정으로 영국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노동당에게 정권을 맡깁니다. 하지만, 다음 해 펼쳐졌던 지방 선거에서는 참패를 면할 수 없었고, 토니 블레어의 별명은 Tony BLIAR로 변해 있었습니다. 부시의 푸들이라는 치욕스런 별명에 거짓말쟁이까지 되어버렸으니, 이미 블레어의 시대는 끝났던 것입니다.

(기자 출신의 스핀 닥터 엘라스티어 캠벨은 무리한 전략으로 블레어의 지지율 하락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2007년, 블레어는 총리직과 노동당 당수직에서 물러났고, 당권은 자연스럽게 고든 브라운에게 넘어갑니다. 영국 국민들은 이 때만 해도, "거짓말쟁이, 부시의 푸들은 갔다. 진정한 총리감이 총리가 되었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환영했습니다. 고든 브라운은 블레어 내각 10년 동안 쭉 재무상을 맡으며 영국 경제의 부활을 이끈 주역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기 침체가 오고, 브라운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게 되며 욕을 심하게 많이 먹게 됩니다. 재무상으로써 보여줬던 능력을 믿었지만, 브라운도 경제 상승률 하락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죠. 블레어가 이미 개판을 쳐놓고 나갔는데, 브라운으로써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았었습니다. 하지만, 노동당 의원 피터 멘델슨은 그런 자신의 주군 브라운을 몰락시키는 주범이 되버리고 맙니다.

(피터 멘델슨은 그의 자신감에 걸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처세술이 뛰어난 정치인은 아니었다.)

피터 멘델슨은 노동당의 기획단장 출신으로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노동당 청년당 위원장을 맡는 등, 이미 입지가 탄탄히 다져졌던 인물이였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노동당 내각에서 장관도 지냈습니다.  LTV (런던TV)에서 PD로 재직했고, 그의 타고난 제작기획력을 바탕으로 노동당에서 홍보기획단장으로 출발합니다. 이 때부터 이미 "악마 기획단장"으로 정치권 내에선 꽤나 유명했다고 합니다. 92년 선거에서는 의회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그 때부터 블레어-브라운 라인의 브레인으로 활약합니다. 1999년에는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을 맡아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그 뒤, 브라운 내각이 출범하면서부터 실세로 등극했고, PD 출신답게 뛰어난 리더십으로 부하들의 신임을 곧잘 얻기도 했지만, 외무장관이 되면서부터 그의 거만한 행동에 대한 구설수가 도마 위에 올랐고, 그에 대한 불신이 늘어났습니다. 정작 외교관으로써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지만, 이미 언론은 그의 편이 아니었죠. 


고든 브라운 내각이 막판 들어서 지지율이 폭풍 하락하고 더붙어 질 것 같지 않던 2010 총선에서도 패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언론과의 싸움이였는데요. 토니 블레어는 당장 영국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일간지 <가디언>과 <타임즈>등을 소유하고 있는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디언>은 공식적으로 노동당을 지지한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고, 루퍼트 머독 또한 정치신념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사업가에 가까웠기에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죠.

하지만 고든 브라운은 고집이 쎈데다 자존심이 정말 강한 사람이였습니다. PD 출신이였던 그는 권력을 "비판"하는데 더 익숙한 인물이였으며 "권언유착"을 애초에 싫어했던 인물입니다. 블레어가 스타성으로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릴 때 브라운은 자신의 능력으로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죠. 

애초에 내각에서 가장 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고든 브라운과 피터 멘델슨은 모두 방송국 프로듀서 출신, 즉 언론인 출신이였음에도 불구, 이들은 언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를 결국 거부했고, 이는 내각의 파멸로 이어집니다. 국민도, 언론도, 브라운에 고집에 지쳐있었고, 노동당에 지쳤던겁니다. 

결국 2010년, 13년만에 정권은 다시 보수당에게 넘어갔습니다.


(현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하지만 현재 영국 총리를 맡고 있는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 역시 지지율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당장 다가올 2015년 총선에서 자리를 지켜낼지부터가 미지수입니다. 현재 노동당 신임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는 노련한 지도력으로 당을 이끌고 있고, 캐머런의 연속 된 삽질은 13년만에 다시 얻어낸 정권을 5년만에 다시 노동당에 갖다 바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죠. 흥미롭게 지켜볼만합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추천~
엠엘비파크펌 맑은주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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