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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호주신문에 나온 이순신장군

by 501™ 2012. 7. 25.





호주 신문에 소개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입니다. 기사 해석은 루리웹 불멸갤의 GuessW 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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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위대한 영웅, 불멸의 제독 이순신 2007.2.20 화요일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상류층 동네인 한양 (지금의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변씨 부인의 세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조상을 가졌지만 할아버지가 중종때 정치적 숙청에 연류되고 아버지가 관직을 멀리하여 부유하게 살지 못했다. 그는 집안의 경제상태가 나빠져서 시골의 외갓집 아산으로 이사갔다. 21살때 이웃동네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나이의 상류층 젊은이처럼 그도 젊었을때는 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22세가 되어서 무과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전통적으로 문과가 무과보다 더 높이 여겨지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회적 유죄판결때문에 무과를 택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 보고서, 시등은 그의 무사로서의 용기와 현철함뿐 아니라 글재주도 뛰어났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는 1572년 28세때 무과시험을 보았다. 시험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졌다. 모인사람들은 그가 재빨리 일어나 가까이 있던 버드나무가지로 부러진 다리에 묶고 일어서는것을 보고 놀랐다. 일차시험후 그는 포기하지않고 4년후 다시 무과시험을 쳐서 32세에 시험에 통과했다.



그후 그는 여러곳에서 근무하면서 무관장수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정직함을 타협하려하지 않는 성격때문에 권력자들로 부터 호의를 구하지 않았다. 그결과로 그의 무관경력은 길고 그의 업적은 주목받지 못했다. 한번은 그는 상관의 옳지않은 행동에 참여하지 않았다해서 직을 잃은적도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실수를 그에게 뒤집어 씌운 다른장수의 거짓된 고발로 백의종군(common foot soldier) 의 잔혹한 강등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기전 몇달전 그를 어릴때부터 알고 조선한국이 그의 능력을 필요로한다고 굳게 믿던 영의정 유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특별승진을 받아 전라좌수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수군지휘관이 되자마자 그는 조선수군을 소생시키고 재건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는 행정제도를 바로잡고 전쟁이 임박한것이 뚜렷하지 않았는데도 무기상태를 개선했고 수군훈련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전함을 만드는데 주력했고 일본침략 하루전에 거북선을 완성시켰다. 그는 흔들리지않는 충정, 놀라운 전략과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불굴의 정신으로 7년간 23차의 수전을 승리로 이끔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구했다.



그가 믿기어려운 승리를 거두는동안 이제독은 그의 삶을 더욱더 놀랍게 하는, 개인적으로 계속되는 비극과 삶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그를 죽이려한 왕과 직면하면서도 나라에 대한 충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독은 그를 거짓으로 비난한 조정의 그의 적들과 원균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아끼면서 건설한 조선수군이 원균의 일본수군에 대한 참담한 패배에 의해 무너졌어도 그는 그의 분개가 직무를 이행하는것을 그만두게 허가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완전 충성은 도전받지 않은 수군의 기적을 이루는것을 가능하게 했다. 1598년 54세때 그는 7년전쟁을 끝낸 노량 마지막전투에서 영예롭게 사망했다. 그는 사후에 충무공이란 호칭을 받았다.


역사적 배경:
16세기를 마감하는 말년에 조선은 상당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적 파당사이의 늘어가는 갈등은 부정을 야기했고 그것은 세금제도의 혼란?을 가져왔다. 파당간의 갈등은 지방정부로 퍼졌고 그로서 국가 정치전체를 불안정하게 했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관료임명과 거기 따르는 잘못된 행정은 사람들에게 불신임과 노여움의 감정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무관훈련은 줄어들고 국가방어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는동안 한국해협 너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에 150년간의 국내 분란을 끝내고 일본을 그의 지배하에 통일했다. 통일의 과제에 대처하면서 그는 그의 권위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 다이묘(성주)들의 권력을 약하게 할 방도를 찾고 그의 중앙정부 권력을 강화하려했다. 이 목적으로 그는 내부적 분쟁과 다이묘들의 에너지와 주의를 밖으로 돌리기위해 이웃국가의 침략을 꾀했다. 첫째, 그는 한국왕에게 그의 군대가 명 중국으로 빨리 움직일수있게 길을 내어줄것을 요구했다. 한국은 히데요시의 진심과 일본침략의 가능성을 관찰하러 사절단을 보냈으나 그들은 상반되는 의견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은 침략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김은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왕과 그 지배층은 경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접근을 비웃고 전쟁의 가능성을 무시했다. 



히데요시는 그의 서곡이 완전 거부를 당했을때 한반도 침략을 결정했다. 몇세기간 평화로운 생활에 적응해있던 나라 한국은 일본이 1594년 4월에 16만군대가 침략했을때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우세한 숫자, 훈련, 조총무기의 일본군앞에서 장비가 갖춰지지않은 조선군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쪽의 방어진은 며칠만에 돌파되었고 일본병력은 어려움없이 북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조선왕 선조는 4월30일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도망갔다. 그것은 일본군이 서울에 도착하기 이틀전이었고 부산에 일본 군대가 도착한지 18일 밖에 되지 않은때였다. 일본군은 그나마 그들과 대항할 용기가 있는 모든 조선군을 패하고 북쪽으로 계속 움직였다. 조선 왕과 조정은 평양을 포기하고 한반도 북쪽끝의 의주로 도피했다. 조선백성들은 왕과 조정의 무능력과 무책임에 분노했다. 두달만에 몇부분만? 빼고 전 나라가 승리의 일본 침략자에게 넘어갔다.



오천년 이상 한국역사에 많은 국가 영웅이 있었으나 1592년 일본 침략시 조선 한국을 무너질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에 비할 사람은 없다. 그는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마음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2005년 4월 전국적으로 행해진 설문조사에서 이순신은 43.8%로 한국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뽑혔다 (조선일보 2005.4.15). 그러므로 이순신의 고귀한 생과 그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행한 놀라운 업적이 한국밖으로 알려지지 않은것은 아주 애석한 일이다.

이제독은 역사에서 아무도 견주지 못할 전공을 이루었다. 징키스칸도 그가 싸운 20차 전투중 2 전투에 졌다. 나폴레온 보나팔트도 23전투중 4전투를 졌고 프레드릭왕도 12전투중 4전투를, 한니발도 5전투중 한 전투를 졌다. 이제독은 바다에서 그가 싸운 23전투중 한번도 지지 않았다. 배나 군대 수에 있어서 가공할 확률을 극복하고 그는 일본과의 7년 전쟁에서 배 두척만 잃고 전투마다 그의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오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 영국궁정수군 부제독은 ‘일본의 해상과 정치역사의 영향’이란 그의 책에서 이제독의 생애와 승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것을 인정하는것은 언제나 힘든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생각될수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패배라는것을 모르고 적의 앞에서 죽은 아시아 족의 위대한 수군 지휘관이어야 할것이다. 그의 업적은 한반도 연안의 바다 밑바닥에 그들의 용감한 수병들과 함께 누워있는 수백척 일본선박들의 잔해로 집계될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한적이 없다고 주장하는것은 과장이 아닌듯하다. 그 평판에 도전하기에 그의 행위는 여러 다른 환경하에서도 너무나 완벽했으니까. 그의 전 경력은 그가 가이드로 삼을 만한 과거역사에서 가르침을 받은적도 없었지만 그가 정확한 결과를 가져오기위해 전투가 행해져야 하는 것처럼 바다에서 전투를 행하였고 자기 나라의 방어자로서 최고의 희생을 치름으로서 끝을 내었다는 말로서 요약될수 있을것이다’ (p 66,67).


다음은 일본 한국연구기관에 의해 출판된 보고서의 발췌이다.
도도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수군이라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찌른 쓰시마 (1905) 의 승리한 전투에서 돌아왔다. 그는 일본 제독이었다. 축하연에서 하객중 한명이 흥분하여 외쳤다. ‘당신의 위대한 승리는 정말 놀라워서 역사에 영원한 자리를 차지할만 합니다. 당신은 트라팔가 전투에서 나폴레온을 패배시킨 넬슨제독과 등등하게 여겨질수 있읍니다. 당신은 정말 전쟁의 신입니다.’ 여기에 도고제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찬사에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에 합당한 제독이 있다면 그사람은 이순신입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 일뿐입니다.’

일본학자 후지카 아키아노(?)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순신제독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나타냈다 (‘경? 8권, 1977). 도고는 이제독을 주인으로 여기고 쓰시마 전투이전 그를 위한 제를 지냈다 (중요한 일이전에 조상이나 역사적으로 주요인물에 대해 제를 지내는것은 일본의 전통이다). 세상의 위대한 전쟁영웅중에 비평과 비난을 피한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그들 모두 그들과 싸운적에 의해 ‘잔인한 박해자’나 ‘굶주린 늑대’라고 불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독은 그정반대로 나라와 동족에 대한 순수하고 완전한 충정, 한결같이 승리로 이끈 현출한 전략과 책략의 이용, 불리한 환경을 극복한 무적의 용기와 그의 꺾기지 않은 성실함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 일본인사이에서도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존경심은 일본 장군들과 역사가들의 이제독에 대한 많은 연설과 글에 명백히 나타난다. 다음은 몇몇 그런 예이다.


역사를 통해서 정면공격, 급습, 집중과 확산 전략을 이룬 장군은 거의 없다. 전체로 부분을 정복하는 기술을 정복한 나폴레온이 그런 장군이었다고 할수있고 제독중에서는 두 전략의 천재가 그러할것이다. 동쪽에 이순신, 서쪽에는 영국의 호라쇼 넬슨. 7년 전쟁이란 제한된 역사 기록에 의거한것 뿐이고 불행히도 조선에서 태어난 관계로 그의 용기와 현철함이 서양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제독은 의심할바없이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었다. 이제독과 비교될수 있으려면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키엘 드 로이터보다 나아야 할것이다. 넬슨은 개인 인물됨과 고결함에 있어서 이제독에 훨씬 미치치 못한다. 이제독은 거북선이라 알려진 철갑선의 발명가였다. 그는 진실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년전 수군 전략의 대가였다.
사토 덴타로? (1866-1942), 일본 수군의 부제독, 황제의 군대역사 p399에서.


이순신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조선 한국을 침략했을때 바다에서의 모든전투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킨 유명한 한국장군이다. 그는 관료와 군장수들중 정직하고 부정을 모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충정과 용기뿐만 아니라 지도력과 전략면에서 거의 기적같은 이상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는 넬슨이전의 제독이었고 이제까지 세계역사에 그와 비길 사람은 없었다. 이인물의 존재가 한국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지만 그의 기념하는 존경심은 일본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전략과 업적은 보존되었고 메이지시대 일본수군을 건설할때 자세히 연구하게 되었다.
시바 교타로? ‘언덕위의 구름’ 센카이 신문 (1972.3.27)


이제독의 23수전중 가장 주요한 전투는 한산전투와 명량전투였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전중의 하나로 생각되는 한산전투에서 이제독은 그의 유명한 ‘학익진’으로 그에 상대한 일본 적함 73척중59척을 가라앉히고 포획함으로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결과적으로 해안선을 따라 진군하려던 히데요시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가 130척의 적함을 13척으로 무찌른 명량해전은 해양 역사가들에게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독은 가끔 넬슨제독과 도고제독에 비교된다. 셋다 그들나라의 운명을 위해 싸웠고 주요수전을 승리로 이끔으로서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동족을 구했다. 하지만 트라팔가의 넬슨의 전투와 쓰시마의 도고의 전투는 이제독이 싸운 명량전투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강한 나라 영국은 트라팔가 전투에서 그당시 수전에 경험이 없고 자기네보다 별로 많지 않은 함대를 거느린 적과 직면해 싸웠다 (프랑스, 스페인33척, 영국 27척) . 쓰시마전투 경우에도 많은 면에서 일본수군이 우월했다. 그들을 대항한 러시아 발틱함대 선원들은 세계의 반바퀴를 도는데 걸린 7달의 항해로 기진맥진 해있었다. 극지방 출신의 러시아 수병들은 적도지방을 항해하면서 병의 발발로 대단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점을 생각해볼때 일본 본토 가까이에서 싸우고 높은 사기의 극도로 훈련이 잘된 일본수군이 사기잃은 러시아 병력에 승리한것은 놀라운일이 아니다.

이제독은 진실로 전설적인 수군기록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전투기록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훌륭하고 고귀한 희생에 있다. 그의 생과 사를 헌신한 7년 전쟁은 제국주의 팽창을 꾀한 정치인의 욕망으로 조정된것일 뿐만아니라 이순신의 나라와 동족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소망으로 움직여진 전쟁이었다. 

(난중일기 1595.1.1)
...나라의 현상태를 생각하니 눈물이 뺨을타고 흘러내렸다 …..

(난중일기 1597.9.15)
…전략의 원칙에 의하면 ‘죽고자하는자는 살고 살기를 구하는자는 죽을것이다…


가끔 그는 기아상태를 견디면서 그의 부하들이 훈련받는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고뇌했다. 그는 자신을 희생했고 자기보다는 병사와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았다. 그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행하였다. 그는 타협치 않는 충정심, 불굴의 의지와 한결같은 용기로 전쟁의 위기에서 지도자들이 길을 잃었을때 나라를 구했다. 그는 정직한 원리원칙을 고수했고 사악한 제도를 끝냈으며 그의 부하들을 철두철미한 준비와 개척자정신으로 이끌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켰고 명철한 책략과 전략, 부하들의 절대신임을 얻은 이기심없는 헌신으로 전투에서 연속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는 도고제독과 넬슨제독처럼 경험있고 잘 훈련된 수군을 가지지도 않았고 그자신도 제독으로 훈련을 받은적이 없었다. 그의 나라는 작고 힘이 없었으며 그를 후원할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도 그의 충성스런 고귀한 정신에 감화되어 그가 23차의 전설적인 연속적인 승리의 기록을 얻게된것이다. 
그는 진실로 황폐한 땅에서 열매를 맺었고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한국인들에게 그는 단순히 영웅이 아니라 성웅이다. 그는 이순신 제독이다. 



참고: 도고, 넬슨, 이의 수군전투
도고, 쓰시마전투 (1905.5.27-28)
아군: 전함 4, 순양함 27, 다른선박들 (일본)
적: 전함11, 순양함 8, 다른선박들 (러시아)
결과: 일본승리. 적함 25척 침몰과 포획.

넬슨, 트라팔가 전투 (1805.10.21)
아군: 전함 27 (영국)
적: 전함33 (프랑스, 스페인)
결과: 영국승리. 23척침몰과 포획.

이순신, 명량전투 (1597.9.16)
아군: 13척 (한국)
적: 330척 (일본)
결과: 한국승리. 131적함 침몰, 90척 심하게 손상.


참고: 미키엘 드 로이터 (1607.3.24- 1676.4.29)
로이터는 네덜란드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독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17세기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의 역활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해 싸워 몇차례 주요승리를 거두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메드웨이의 기습’이다. 신앙심이 깊은 로이터는 그의 수병들과 군사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고 그들로 부터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별명을 얻게했다. ‘Bestevaêr’ (네덜란드 옛말로 ‘할아버지’). 그는 출생지 블리싱겐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동상으로 세워져 존경 받고 있다.
Michiel de Ruyter
From Wikipedia 
Michiel Adriaenszoon de Ruyter (24 March 1607 – 29 April 1676) was one of the most famous admirals in Dutch history. De Ruyter is most famous for his role in the Anglo-Dutch Wars of the 17th century. He fought the English and French in these wars and scored several major victories, the best known probably being the Raid on the Medway. The pious De Ruyter was very much loved by his sailors and soldiers; from them his most significant nickname derived: Bestevaêr (older Dutch for 'grandfather'.) He is honoured by a statue in his birthplace Vlissingen, where he stands looking over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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