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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미스테리

이공계 거물들의 흔한단체사진

by 501™ 2014. 1. 23.


솔베이 학회 Solvay Conference 1927

아우구스트 안토네 피카르(Auguste Antoine Piccard/1884.1.28~1962.3.24)

바젤 출생. 미국에 귀화한 화학자 ·항공기술자인 J.F.피카르와 쌍둥이 형제이다. 성층권(成層圈)과 심해(深海) 관측으로 알려졌다. 국립공업대학 ·브뤼셀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공중전기와 우주선(宇宙線) 관측을 목표로 기구(氣球)를 이용한 성층권에의 상승을 시도, 1931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1만 5781 m, 32년 취리히에서 1만 6940 m의 고도에 도달하였다.

심해 관측도 시도하여 바티스카프(bathyscaphe)라는 특수잠수기를 제작, 1953년 툴롱 난바다에서 3,184 m, 다카르 난바다에서 4049 m까지 잠수하여 심해잠수의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E. Henriot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1880.1.18~1933.9.25)

오스트리아의 빈 출생. 빈대학에서 공부하고 로런츠의 후임으로 1912년 이후 레이덴대학 교수로 있었다. 기체론(氣體論) ·상대성이론 ·양자론 등 이론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보어의 양자조건(量子條件)의 기초가 된 단열불변량(斷熱不變量)에 관한 연구가 있다.

학문적으로는 볼츠만의 영향을 받았는데, 통계역학 연구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33년 암스테르담에서 자살했다. 저서로 《역학에서 통계적 견해의 개념적 기초》(4권, 1912)가 있다.


Ed. Herzen

테오필드 드 돈더(Theophile de Donder/1827~1957)


에르빈 루돌프 요제프 알렉산데르 슈뢰딩거(Erwin Rudolf Josef Alexander Schrodinger/1887.8.12~1961.1.4)

빈 출생. 파동역학(波動力學)의 건설자이다. 화학을 공부한 후 식물학을 연구, 식물의 계통발생 논문을 발표했고, 그 밖에도 고대문법이나 독일시의 감상에도 재능을 보였다. 빈대학교에서 수학 중에 연속체(連續體)의 고유값[固有値] 문제를 연구했는데, 이것은 그 뒤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슈투트가르트대학교(1920)를 비롯, 브레슬라우대학교 교수(1921)를 거쳐 라우에의 후임으로서 취리히대학교 교수(1921)로 취임했다. 여기에서 수학자 H.바일과 P.디바이와 알게 되어 고체비열 문제, 열역학 문제, 원자스펙트럼 등을 연구했다. 1926년 파동역학 연구를 하여, N.D.보어의 양자(量子)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고유값 문제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L.V.드브로이가 제출한 물질파(物質波)의 개념을 받아들여 미시 세계에서는 고전역학(古典力學)이 파동역학으로 옮겨간다는 생각을 기초방정식으로서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에 집약하였다. 이것은 당시 W.하이젠베르크 등이 탐구하고 있던 행렬역학(行列力學)과는 전혀 각도가 다른 길을 걸어 양자역학(量子力學)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자이론의 새로운 형식의 발견’으로 P.디랙과 함께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27년 이후 베를린대학에서 옥스퍼드대학으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대학으로 옮겼으나 나치스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倂合) 때 이탈리아로 탈주하여 미국 프린스턴대학, 후에 더블린대학으로 옮겼다. 1940년 더블린아카데미 교수, 더블린고등연구소를 거쳐 동 연구소장으로 종사하고, 1956년 빈으로 돌아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그리스인 Nature and the Greeks》(1954) 《나의 세계관 Meine weltansicht》(1961)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가 있다.


E. Verschaffelt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Wolfgang Ernst Pauli/1900.4.25~1958.12.15)


빈 출생. 뮌헨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A.조머펠트의 지도를 받았다. 괴팅겐에서 M.보른의 조수로 있다가, 코펜하겐으로 가서 N.H.D.보어 밑에서 연구하였다.

1923년 함부르크대학 강사, 1928년 취리히공업대학 교수,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객원교수(客員敎授), 뉴저지대학 ·미시간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취리히공업대학 교수로 돌아갔다. 상대성이론을 전개하는 데 공헌하는 한편, 양자론(量子論)의 체계화에 힘썼으며 1924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원자구조론에 크게 공헌함과 동시에, 전자의 스핀을 해명하는 데 기여하였다.

β붕괴의 연구에서는 중성미자(中性微子:neutrino)의 존재를 제창하였으며, W.K.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장(場)의 양자론의 정식화(定式化)를 추진하여 그 기초를 확립, 스핀과 통계의 관계를 발견하고, 중간자론에서는 강결합(强結合) 이론을 제출하는 등, 이론물리학에서 크게 공헌했다. <현대물리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194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1901.12.5~1976.2.1)


1901년 12월 5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뮌헨대학교와 괴팅겐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24년 코펜하겐대학교에서 N.보어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론을 검토하였는데, 관측에 관계되는 양(量)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견지에서 원자의 복사(輻射)를 직접 주는 전이진동(轉移振動)의 계산규칙을 문제로 하여 그 법칙을 만들었다. 이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시초가 되는 일이었고(1925), 얼마 후 체계적인 이론이 정리되어 행렬역학(行列力學)이 이루어졌다.

1926년 코펜하겐대학교 강사를 거쳐 이듬해에 라이프치히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그 해에 실증적인 입장에서 선 현미경의 사고실험(思考實驗)을 고찰하여 불확정성관계(不確定性關係)를 제창, 양자량에서의 관측문제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새로운 이론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 후 수소분자의 문제, 다체문제(多體問題), 강자성(强磁性)의 연구 등으로 나아가, 1929년 W.파울리와 함께 장(場)의 양자론을 발표하여 양자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32년 원자핵 분야에서는 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우주선(宇宙線) 분석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장(場)의 양자론의 한계를 논하는 등 양자론의 진보에서 항상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불확정성원리의 연구와, 양자역학 창시의 업적으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41년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장을 겸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에 의하여 한때 영국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1949년 귀국하여 괴팅겐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들어갔고, 후에 소장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강의를 한 후 1958년 귀국,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후기 연구로는 플라스마물리학·열핵반응 등이 있으며, 1953년 비선형이론(非線型理論)은 소립자의 통일이론을 지향하는 야심적인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랄프 하워드 파울러 경(Sir Ralph Howard Fowler/1889.1.17~1944.7.28)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1932년 케임브리지 대학 수리(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통계역학에서의 다윈-파울러의 방법으로 유명하다. J. D. 버널과 공동으로 물과 얼음의 분자론적(분자론적)구조를 연구하여 (1933), X선 해석의 결과로부터 액체인 물속에서의 최근접분자(최근접분자)배치에 관한 정사면체 구조를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물의 액체구조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저서로는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1936) 및 E. A. 구겐하임과의 공동저작 <통계열역학(Statistical Thermodynamics>(1939)이 있다.


레온 니콜라스 브리유앵(Leon Nicolas Brillouin/1889.8.7~1969.10.4)


세브르 출생. 파리에서 공부하고, 파리대학 교수(1928),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1932) 등을 거쳐, 1941년 도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컬럼비아대학에 있었으며, 1947년부터 하버드대학에 재직했다. 이어 IBM에 관계하여 1952년부터는 웟슨연구소의 멤버로서 컬럼비아대학에 돌아왔다가, 1954년 퇴직했다.

초기에는 전자기파론과 상대론(相對論) 분야를 연구했고, 이어 통계역학(統計力學)과 양자역학(量子力學)을 결합한 양자통계역학을 개척했다. 특히 이 이론의 금속전자론(金屬電子論)의 응용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고체 안의 전자파(電子波)의 허용영역에 대해서는 ‘브리유앵대(帶)’라는 용어가 쓰이며, 대자율(帶磁率)에 관한 연구에서는 브리유앵함수가 도입되었다.

그 밖에 라디오안테나의 기술, 케이블 안의 전파(電波)의 전파(傳播), 자전관(子電管) ·도파관(導波管)의 연구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그 후 통계역학에서 출발하여 정보이론을 연구했으며, 기초물리학에의 응용과 정보 채널에 관해 논했다.


페트루스 요세푸스 빌헬무스 드베이어(Petrus Josephus Wilhelmus Debije/1884.3.24~1966.11.2)

미국의 물리화학자. 1936년 쌍극자 모멘트, X선, 기체 내에서 빛의 산란 등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10년 뮌헨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취리히대학교·위트레흐트대학교·괴팅겐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1935년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이론물리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독일이 그의 조국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2개월 전인 1940년 코넬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뉴욕 이타카로 건너갔고, 그뒤 1950년 화학과 학과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쌍극자 모멘트를 연구해 분자 안에 있는 원자들의 배열과 원자들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1916년 X선을 이용해 분말형태로 된 고체의 결정구조를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구조를 잘 알 수 있는 결정을 얻는 데 필요한 어려운 단계를 없앴다. 1923년 에리히 휘켈과 함께 용액에 존재하는 염이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해리된다는 스반테 아레니우스의 이론을 발전시켜 이온화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마르틴 한스 크리스티안 크누센(Martin Hans Christian Knudsen/1871.2.15~1949.5.27)

핀란드 출생. 코펜하겐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1912∼1941년에 모교의 교수로 있었으며, 한때는 총장을 역임하였다. 해양화학 분야에서 현대해양학의 기초가 되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염분(鹽分)’이라는 정의 확정, 표준해수(標準海水) 작성, ‘해양상용표(海洋常用表)’ 편찬, 크누센의 해수(海水) 뷰렛 및 피펫의 작성 등이 그것이다. 1930∼1936년 해양물리학분과회장을 지냈으며, 미국의 아가시 메달(Agassiz Medal)을 수상하였다.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경(Sir William Lawrence Bragg, 1890.3.31~1971.7.1)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출생. W.H.브래그의 아들이다.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와 애들레이드대학에서 공부하고, 1909년 영국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라우에현상에 관한 연구(1912)를 시발점으로 결정물리학(結晶物理學)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912∼1914년 아버지와 함께 X선에 의한 결정구조를 연구하여 1915년 아버지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19년 맨체스터대학 교수, 1937년 국립물리학연구소장, 1938년 캐번디시연구소장이 되었으며, 1941년 나이트 작위를 얻었다. 또 1954년~1966년 왕립과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 후의 연구로는 고분자구조(高分子構造)의 X선에 의한 해석 등이 있다.


헨드릭 안톤 클라머스(Hendrik Anthony Kramers/1894.2.2~1952.4.24)


폴 안드레 모리스 디랙(Paul Adrien Maurice Dirac/1902.8.8~1984.10.20)

브리스틀 출생. 브리스틀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1925년 케임브리지대학교로 옮겨 R.H.파울러에게 통계역학을 배우고, 1926년에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N.H.D.보어의 지도로 양자론(量子論)을 연구하여 1932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주요업적은 양자역학과 전자스핀 연구이다. 1925년 W.K.하이젠베르크가 내놓은 양자역학의 기초 논문을 보고, 비가환(非可換)대수학을 기초로 하여 별도의 양자역학 이론체계를 건설했다. 이 사이 보어의 지도 아래 대륙파(大陸派) 연구자와 접촉, 복사장(輻射場)의 양자론을 발표(1926), E.P.요르단과 함께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제출,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통일에 공헌하였다.

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과의 통합 문제에 따라, 전자론(電子論)(1928)과 구멍이론[空孔理論](1930)을 잇달아 발표, 디랙방정식이라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세워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개척하였다.

디랙이 존재를 예상한 양전자(陽電子)는 C.D.앤더슨에 의해 발견되었고(1932), 또 브래킷 및 G.오키알리니에 의해 양음전자쌍(陽陰電子雙)의 생성 및 소멸도 관측되어(1933), 그 예측의 정확성이 실증되었다. 그 후에는 전자기장의 양자론 완성에 힘써, 다시간이론(多時間理論)으로 장(場)의 이론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밖에 통계역학에서도 중요한 연구가 있고, F.페르미와는 별도로 제시한 페르미디랙통계 등이 있다. 또한 단자극(單磁極)의 제창 등도 하였다. 양자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1933년 E.슈뢰딩거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아더 홀리 콤프턴(Arthur Holly Compton/1892.9.10~1962.3.15)

오하이오주 우스터 출생. 우스터대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한때 미네소타대학교와 웨스팅하우스회사에서 근무하였고,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유학한 후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 교수로 물리학과장을 지냈다(1920). 그 후 시카고대학교로 옮겼다가 1945년 워싱턴대학교 총장에 취임, 이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1954∼1961).

프린스턴대학교 시절에는 지구의 회전을 나타내는 독특한 방법을 창안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X선 연구로 옮겼다. 결정(結晶)에 의한 X선의 반사 세기를 계산하여 원자구조를 조사하였으며, X선 산란(散亂)에 관한 ‘콤프턴효과’를 발견하여, 복사(輻射)의 입자성(粒子性)을 시사하는 실험 사실을 제시하였다. 이 효과의 발견으로, 이것의 이론을 실증한 C.T.R.윌슨과 함께 1927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 X선의 전반사(全反射)와 편차, 회절발[回折格子]에 의한 스펙트럼 연구도 있다.

우주선(宇宙線)의 지리적 변화를 전세계적으로 조사하여(1930∼1940), 위도(緯度) 효과가 지구 자기장(磁氣場)과 관련 있음을 결론지었다. 1941년 이후 원자력 이용에 관한 국가위원회 의장이 되어, E.페르미, E.P.위그너 등과 함께 우라늄 핵분열로(核分裂爐) 건설을 추진, 플루토늄로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었으며, 원자폭탄 투하의 정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루이-빅토르-피에르-레이몬드 드 브로이 7세(Louis-Victor-Pierre-Raymond duc de Broglie VII/1892.8.15~1987.3.19)

디에프 출생. 명문 귀족 브로이가(家) 공작으로, 1877년 쿠데타에 의해 수상이 된 정치가 J.V.A.드브로이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문학·역사에 흥미가 있었으나, 후에 물리학에 관심을 가져 1913년 소르본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의 무선부에 들어가 에펠탑에서 근무하며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였다. 대전 후에 실험물리학자인 형 모리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양자(量子)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여 1924년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에 물질파(物質波:드브로이파라고도 불린다)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모리스가 품고 있던 'X선이 파동(波動)과 입자(粒子)의 복합체가 아닐까'라는 견해를 다시 전개하여 물질입자라고 보는 전자(電子)도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한 설이다. 전자와 이에 따르는 파동과의 관계(드브로이의 관계)는 A.아인슈타인 등의 지지를 받았다.

전자파(電子波)의 실재에 대해서는 1927년 C.J.데이비슨과 L.H.저머가 니켈의 결정을 사용해 전자파의 회절(回折)을 실증함으로써, 물리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파동역학(波動力學)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후 소르본대학 강사, 푸앵카레연구소 교수, 1932년 파리대학 교수가 되어, 파동역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P.디랙의 전자론, 빛의 이론, 스핀을 가진 입자의 일반론, 핵물리의 응용 등을 논하였고, 양자론에서 인과율(因果律)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9년 파동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막스 보른(Max Born/1882.12.11~1970.1.5)

1882년 12월 11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였다. 브레슬라우·하이델베르크·취리히·괴팅겐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케임브리지·괴팅겐·시카고 대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15년 베를린대학교 교수, 1919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 결정물리학(結晶物理學) 등을 연구, 저서 《결정격자(結晶格子)의 역학》(1925)에서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1921년 괴팅겐대학교 교수가 되어 J.프랑크와 함께 원자구조의 연구를 추진하여 괴팅겐그룹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W.파울리, W.하이젠베르크, P.요르단을 비롯, E.페르미, P.디랙, J.오펜하이머, M.G.마이어 등 젊은 학자들이 참가하여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의 개척에 공헌했다. 특히 1925∼1926년 하이젠베르크 및 요르단과 함께 연구한 행렬역학의 정식화(定式化)와, 1954년 노벨물리학상을 타게 한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은 유명하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대학에서 추방당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1936년 에든버러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시절에 폴란드의 이론물리학자 L.인펠트와 함께 전개한 비선형 전자기장이론인 보른인펠트이론도 유명하며, 그 밖에도 상반성원리(相反性原理)를 논하였다.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1885.10.7~1962.11.18)

1885년 10월 7일 코펜하겐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 코펜하겐대학교에 들어가 물리학을 공부하고, 1911년 논문 〈금속의 전자론(電子論)〉으로 학위를 받았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J.J.톰슨, 맨체스터대학교의 E.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하였다. 당시 러더퍼드의 연구실에서는 α선 산란(散亂) 실험이 행해졌고, 러더퍼드는 원자의 핵모형(核模型)을 제출하였다. 귀국 후 1912년 코펜하겐대학교 강사가 되어, 원자모형 연구에 착수, 러더퍼드의 모형에 플랑크의 양자가설(量子假說)을 적용함으로써 원자이론을 세우고, 수소의 스펙트럼계열 설명에 성공하였다(1913).

후에 이것은 정상상태(定常狀態)의 개념을 전제로, 양자조건 및 진동수 조건으로 규정된, 보다 일반적인 원자이론으로 정리되어 보어의 원자이론이 되었다. 이 이론으로 고전론(古典論)과 양자론이 결합되었고, 양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복사(輻射) 이외의 경우에도 적용, 원자의 구조와 원자스펙트럼을 밝혀졌으며, 전기(前期)양자론 연구의 계기가 되어, 후에 양자역학으로 발전하였다.

1916년 코펜하겐대학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강좌에 부속된 연구소 신설을 제의, 1921년 그 소장이 되었다. 이것이 코펜하겐대학 이론물리학연구소이며, 새로운 물리학 연구의 중심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 물리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 연구소에서 양자론, 즉 양자역학의 개발을 추진했는데, 특히 대응원리(對應原理)와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를 제창했다. 1922년 원자구조론 연구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30년경부터 연구는 원자핵으로 기울어, 원자핵을 원자의 경우에 비해 보다 고전적으로 다룰 수 있음을 지적, 핵반응을 설명하는 액적모형(液滴模型)을 제출, 증발이론으로서 핵반응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미국에 건너가 맨해튼계획에도 참가하였고, 전후에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무기의 발달에서 생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들 문제의 연구를 공개하도록 주장, 국제연합에 공개장을 보내는 등(1950) 정치적 행동도 취하였다.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1881.1.31~1957.8.16)

브루클린 출생.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배운 뒤, 1903년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W.H.네른스트에게 지도를 받고 귀국하여 1906년 스티븐슨공업대학에 근무, 1909∼50년 제너럴일렉트릭사(社)의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였다. 텅스텐전구나 진공관 중의 흡착기체의 연구를 하여, 가스전구를 발명하였고, 1915년에는 고압정류관(高壓整流管)의 케노트론(kenotron)을 발명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하여 단분자층흡착(單分子層吸着)의 개념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은 랭뮤어의 흡착등온식(吸着等溫式)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원자가이론에서도 루이스의 이론을 더 발전시켜 루이스-랭뮤어의 원자가이론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응결펌프, 진공계를 발명하였고, 인공강우를 비롯한 기상학 연구에도 종사하였다. 1932년 이러한 계면화학의 연구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드비히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1858.4.23~1947.10.3)

킬 출생. 뮌헨대학교를 나온 뒤 베를린대학교에서 헬름홀츠, 키르히호프의 강의를 듣고, 클라우지우스의 저서에 심취하였다. 학위논문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하여〉 이후 열역학을 연구 주제로, 엔트로피·열전현상(熱電現象)·전해질용해 등을 연구하는 등 열역학의 체계화에 공헌하였다. 그 총정리인 《열역학강의》(1897)가 있다.

1880년 뮌헨대학교 강사, 1885년 킬대학교 교수를 거쳐 1889년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교로 옮기고 1892년 정교수가 되었다. 베를린으로 옮긴 뒤부터 당시 학계의 화젯거리였던 열복사(熱輻射) 문제에 몰두, 처음 선형진동자(線型振動子)로부터의 복사의 사출흡수법칙(射出吸收法則)을 문제로 다루었으나, 이것이 벽에 부닥치자 뒤에 열역학적 방법으로 바꾸어 엔트로피와 에너지 관계를 추적, 빈의 법칙을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루머, 프링스하임, 루벤스, 쿠를바움 등에 의해 제시된 실험과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남에 따라 빈 분포식의 개량으로 나아갔고, 1910년 마침내 실험과의 일치를 보게 된 ‘플랑크의 복사식(輻射式)’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그 물리적 해석을 둘러싸고 독창적인 에너지양자(量子)에 대한 생각에 도달, 보편상수 h(플랑크상수)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생각으로서 마침내 양자론의 전개를 초래하였고 물리학에 커다란 전기(轉期)를 가져왔으며, 이 공로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상대성이론에도 관심을 가져 1914년 아인슈타인을 베를린대학교에 초빙하였다. 1913년부터 베를린대학교 총장으로 근무하다가 1928년 물러나 그 후는 프로이센학사원의 종신 이사로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처음 에너지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볼츠만의 생각을 지지하고, 마흐의 감각론(感覺論), 사유경제설(思惟經濟說)에 반대하였다. 물리학적 인식론에 관한 많은 에세이가 있다.


마리아 스콜로도프스카-퀴리(Maria Skłodowska-Curie/1867.11.7~1934.7.4) 

폴란드의 바르샤바 출생. 결혼 전 이름은 Marj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 J.H.푸앵카레, G.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895년 P.퀴리와 결혼 후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되어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 이때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썼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寫眞法)보다 편리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이라 불렀다.

또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시료(試料)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속에 미지(未知)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했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 대하여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어 그 해 12월 라듐을 발견하였다.

이 두 원소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理學部)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이 후 단독으로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 1907년 라듐 원자량의 보다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고, 1910년에 금속 라듐의 분리에도 성공하였다. 그 동안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고, 라듐연구소 건립에도 노력하였다. 이것은 그 후 파스퇴르실험소와 퀴리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은 마리의 실험조수로 있던 F.졸리오 퀴리와 결혼,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방사능 발견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헨드릭 안톤 로런츠(Hendrik Antoon Lorentz/1853.7.18~1928.2.4)

아른험 출생. 레이덴대학교에서 물리학을 배웠고, 1875년 제출한 학위논문 〈빛의 반사와 굴절이론에 관하여〉의 우수함이 인정되어 1878년 레이덴대학교에 신설된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1912년 하를럼의 테일러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875년 학위논문에서는 맥스웰의 전자기장론(電磁氣場論)에 의한 전자기현상 및 광학적 현상의 해명에 힘을기울였다. 특히, 여러 물질상수(物質常數)에 의해서 표시되는 물질의 전자기적 성질, 빛(전자기파)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였다.

이를 위해 물질을 구성하는 미소한 하전입자(荷電粒子:전자)를 도입하여, 이 입자와 빛을 전달하는 매질(媒質) 에테르를 전자기적인 것으로 대치하여(전자에테르), 이로부터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을 개척하였고, 1878년 빛의 굴절률(매질 속에서의 광속)과 물질의 밀도와의 관계를 논하여 로런츠로렌츠의 식(Lorentz-Lorenz’s formula)을 도출하였다.

1884년 자기장과 편광(偏光)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P.제이만이 이에 대한 실험적 검증을 함으로써 로런츠가 예고한 식을 확인하였다(제이만효과의 발견). 이것은 물질 내에서 전자의 존재에 대한 확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전개된 물질의 전자론(로런츠의 전자론)은 미시전자기장에 대한 맥스웰방정식과 전자에 대한 힘(로런츠의 힘)을 기초로 자유전자 및 속박된 전자 또는 원궤도를 그리는 자기화전자(磁氣化電子)를 상정(想定)하여 금속의 전기전도 및 열전도, 빛의 분산이론 등 물질 내의 전자기현상을 해명하였고, 후일에 양자역학(量子力學)에 의하여 일관된 물질이론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에테르에 관한 고찰에서는 절대정지 에테르의 가정 위에 운동물체 내의 빛의 전파에 대하여 프레넬의 수반계수(隨伴係數)를 도출하고 지구운동의 효과를 논하였으나, 에테르에 대한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이 예상하였던 효과를 나타내지 않게 되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선구가 되는 ‘로런츠수축(로런츠피츠제럴드수축)’(1892)을 제창하였고, 또 국소시(局所時)를 도입하여 ‘로런츠변환’을 유도하였다.

1904년의 논문은 이러한 것들의 집대성으로서, 절대정지 에테르의 가정하에 그때까지의 전자론의 성과를 모두 포함하면서 모순 없는 로런츠전자론의 완성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써 고전전자론(古典電子論)을 완성하고 고전물리학을 총결산함과 동시에 새로운 물리학 탄생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컬럼비아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도 강의를 맡는 등 국제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여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1902년 제이만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3.14~1955.4.18)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스위스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 이를 1905년 발표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브라운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는 분자물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검토하여 광양자설에 도달, 그 예로서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그 동안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重力)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하고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일식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광전효과 연구와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할 것을 시도하였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운동의 지지자, 평화주의자로서 활약하였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1933년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 통일장이론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에 몰두하자, 미국의 과학자와 망명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가질 필요성을 통감하여 당시 대통령 F.D.루스벨트에게 그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원자폭탄 연구, 맨해튼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통일장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리만기하학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것은 2차 대칭하는 텐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생각해낸 통일장이론은 2차 대칭이 아닌 텐서에 의거한 이론이다. 이것을 아인슈타인 최후의 통일장이론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아인슈타인상(賞)을 마련하고 해마다 2명의 과학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파울 랑주뱅(Paul Langevin/1872.1.23~1946.12.19)

파리 출생. 190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1925년부터 파리대학 물리화학연구소장으로 근무하였고,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자성(磁性)의 연구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05년 분자가 지닌 자기모멘트를 근거로 통계역학적 고찰을 함으로써 ‘퀴리의 법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상자성(常磁性) 기체의 이론은 유명하다.

또 이것을 상자성 고체에도 적용시켰고, 반자성에 관하여도 앙페르의 분자전류를 전자로 대치하여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밖에도 브라운운동의 이론, 대기(大氣)이온의 하나인 ‘랑주뱅이온(큰이온이라고도 한다)’ 발견, 2차 X선 연구, 상대론(相對論)과 초음파 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스의 수용소에서 스위스로 탈출, 저항운동에 참가하였다.


Ch. E. Guye 


찰스 톰슨 리스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1869.2.14~1959.11.15)


스코틀랜드 글렌코스 출생. 맨체스터대학교 오언스칼리지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시드니서식스칼리지에서 배웠다. 캐번디시연구소에서 J.J.톰슨 밑에서 연구했고, 1925∼1934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구름의 발생을 연구하여 물방울이 하전(荷電)이온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톰슨의 이온전하 측정을 도와 성공을 거두는 한편, 이 발견을 이용해 고속하전입자의 비적(飛跡)을 관측할 수 있는 ‘윌슨의 안개상자’를 제작했다(1897∼1911). 그 후 이 장치는 원자핵·우주선(宇宙線) 연구에 널리 이용되어 큰 효과를 올렸다.

Χ선·선의 광자적(光子的) 거동을 조사했고, 또한 콤프턴 산란(散亂)을 실증하여 1927년 A.H.콤프턴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밖에 예민한 금박검전기(金箔檢電器)를 만들어 대기 중에 투과력이 강한 방사선의 존재를 기술했고, 우주선의 존재를 암시했으며, 뇌우(雷雨)의 전기적 구조에 관한 윌슨설(說)을 발표했다. 
 

오언 윌리암스 리처드슨(Owen Willans Richardson/1879.4.26~1959.2.15)


요크셔 듀즈베리 출생. 1900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캐번디시연구소에서 고온물체(高溫物體)의 전자복사(電子輻射)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1901년 포화전류의 온도의존식을 창안하고 ‘리처드슨효과’의 이론적·실험적 연구를 실시했다.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 교수가 되어 열전자방출·광전효과 등을 연구하고, 1914년 런던대학교의 킹스칼리지 교수가 되었다.
연구업적에는 자성(磁性)·전자론, 수소분자의 스펙트럼, 연질 X선, Hi 및 Di의 미세구조 연구 등이 있다. 열전자방출 등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192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참고
http://atlanticjaxx.wordpress.com/2011/02/07/set-of-images/1927-solvay-conference/
http://bigmoth.blog.me/80111292335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09593&s_no=109593&page=4

http://ppaktion.maru.net/379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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